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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 750~1258 )는 비잔틴의 병제를 상당부분 도입했지만 비잔틴만큼의 대규모 상비군이나 훈련, 편제 등을 갖추지는 못했다. 칼리프의 호위대( Haras )가 엄밀히 말해 유일한 상비군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호위대는 정부에게 봉급을 받고 칼리프에게 지휘되는 모든 군대를 뜻한다. 이들 정규군( jund )은 다른 말로 " 일정하게 봉급을 받는다 "는 뜻의 murtaziqah라고 불렸는데 크게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압바스 왕조( Abbasid Caliphate )를 섬기던 투르크군인들은 노르만인들이 기독교세계를 관통하여 원정을 다닌 것 같이 거의 모든 이슬람세계를 관통하였고 11세기에는 칼리프가 힘을 잃고 지방의 유력자들이 독립해나가자 거의 모든 독립국들이 투르크인 부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집단은 셀주크 투르크로 지금의 중국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랄의 스텝지방에서 왔다. 셀주크군은 쇠퇴하던 사라센 제국으로부터 페르시아를 평정했으며 1055년에는 그의 투르크 고관( vizier )이 파티마 왕조와 함께 음모를 꾸미는 것에 대해 강력한 동맹의 필요성을 느낀 압바스 칼리프의 초대로 바그다드로 입성했다. 그들의 지도자인 토그룰-벡( Togrul Beg )은 이후 바그다드의 술탄임을 선포했으며 그의 형제인 차그리-벡( Chagri Beg )은 페르시아와 호라산( Khorassan )의 술탄이 되었다. 토그룰-벡의 후계자인 알프 아르슬란( Alp Arslan )은 두 술탄국을 병합했으며 파티마 왕조로부터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빼았고 비잔틴을 만치케르트( Manzikert )에서 물리치고 서아시아를 거의 지배함으로서 거의 모든 이슬람( 주로 수니파 )을 다시 하나의 지배체제하에 통일했다.
셀주크인들은 술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지방유력자들( 주로 아랍인들 )의 기본적인 군사편제는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크타( Iqta ) 제도를 바꿔 순수하게 군사적인 임무에만 집중하도록 하였다.
총독들은 일년에 한번만 공물을 냈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충독 자신이 전비를 지출하여 무장시킨 일정한 양의 군대를 술탄의 지휘하에 참전시켰다. 페르시아에서만 투르크인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수장국( emirate ) 사십개가 있었으며 이러한 제도는 투르크인들의 세력이 미치는 곳에 두루 퍼졌다. 물론 투르크의 지배를 받지않는 아랍가문들의 수장령들도 몇몇 있었는데 그중 샤이자르( Shaizar )는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어떤 지방에서는 수장들이 영토의 일부나 마을을 유력자에게 주고 그들이 거느리는 군대를 술탄이 수장들에게 군역을 받는 것과 같이 군역을 받았다. 이들 소수장들은 대부분 아랍인들이었다. 유럽의 봉건제와 비교해서 이들 전차인들은 술탄에게 가신의 의무를 지지 않았으며 이들이 섬기는 것은 오직 자신의 바로 위의 수장들이었다.
그러므로 셀주크의 군대는 술탄의 호위대와 근위대, 고용된 용병대 등과 이크타 제도에 의해 모인 지방수장들의 호위대, 노예, 가신, 모집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술탄의 호위대는 주로 투르크인들이었지만 투르드, 비잔틴, 아나톨리아, 슬라브, 그루지야 노예 등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기병이었으며 연대로 편성되었다. 이 정규군은 아스카르( Askar )로 알려졌으며 여기에 속한 병사들은 아스카리스( Askaris )라 불렸다. 진급은 복무기간에 따라 정해졌고 연대장은 수장이라 불렸으며 더 높은 지위의 지휘관은 하집( Hajib )이라 불렸다. 고위장교들은 노예들을 모아 자신들만의 사병중대를 만들 수 있었으며 이들은 주인이 죽으면 그 주인의 이름으로 연대명이 정해져 아스카르로 편입되었다. 시리아 아스카르에서는 자유인들도 지원할 수 있었으며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투르코만( Turcoman ) 용병( 궁기병 )들과 카스피해 남서쪽 산악지대에 사는 다일람( Daylam )인들의 보병연대가 아스카르에 편입되어 싸우기도 하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다마스코스와 이집트 아스카르에 편입되어 있었으며 다른 곳에 복무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스카르의 인원은 지휘관이나 수장의 능력에 따라 달랐고 정확한 편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차 십자군 전쟁 때 시리아의 대표적인 수장국들이던 알레포( Aleppo )와 다마스코스는 각각 이천명의 아스카르를 보유하고 있었고 1115년에는 그 두 도시와 마르딘( Mardin )은 야전군에 총 오천명의 아스카리스를 동원하기도 하였다. 소국이었던 샤이자르 수장국은 수백명 규모의 아스카르 밖에 보유하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의 아타베그( atabeg )들이 보유한 아스카르들은 훨씬 강력했는데 그중 알레포의 전통적인 적이었던 모술은 안티오케이아( Antioch )를 점령할때 만오천명의 야전군을 동원했다. 13세기 중반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대부분이 용병인 12만명의 기병을 지휘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아스카르는 필요가 없을 때 타국에 빌려줄 수도 있었다고 보여지는데 1110년 시돈( Sidon )의 총독은 셀주크의 공격을 막기 위해 다마스코스로부터 투르크 궁기병을 빌린 적이 있다.
전투에서는 아스카르가 주력이었지만 모집병들도 필요할 때 빠질 수 없었다. 아랍의 이러한 민병제도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소아랍왕조들이 계속 되면서 존속했고 작은 아랍수장국들은 소수의 아스카르 밖에 거느리지 못했기 때문에 군대의 주력은 민병들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민병들은 북서아프리카와 쿠르디스탄( Kurdistan )의 이주자들과 함께 다양한 부족에 속한 아랍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금 다른 군대의 종류로는 땅을 수여받고 야전군에는 참전하지 않는 영역예비군이 있다. 이들은 12세기까지 이집트에 남아있었고 시리아에서는 초기 십자군시대까지 남아있었다. 유목아랍부족인 베우인( Bedouin )인들은 투르코만과 마찬가지로 따로 구성되어 있었다. 민병들과 영역예비군들은 모두 말을 탔으며 토종아랍인들은 창과 검으로 무장했고 원거리공격을 위해 투르크인 이주자들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두 군대에서 무기와 말은 본인부담이었지만 공동으로 출자하여 병기공장에 집단으로 주문하기도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셀주크군의 주력은 기병, 특히 궁기병이었지만 세번째 열에서는 보병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방이나 시골에서 징집되어 오거나 지원자들과 비전투 종군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열정으로 사기는 높았지만 훈련과 무장 등은 형편없었고 군사적인 가치도 적었다. 알레포와 같은 대도시의 시민들로 이뤄진 부대는 달랐는데 이들은 용감하기로 유명했고 공병과 지뢰공병으로 크게 활약했다. 보병의 주된 임무는 요새, 성전, 진지의 수비를 맡거나 공성전에서 활약하는 것이었다. 무기는 각자가 알아서 부담했다.
야전에서의 병종비율은 작전 때마다 달라서 단정지을 수 없다. 하지만 아스카르가 주력인 것은 변함이 없었고 1167년에 있었던 아슈무네인( Ashmunein ) 전투의 예를 든다면 쉬르쿠( Shirkuh )는 이천명의 아스카르를 보유하고 있었고 육천명의 각각의 지도자에 의해 지휘되는 투르코만과 투르크 용병 경기병들을 동원했다.
작전 중에 아스카르는 상당한 군수품과 마초들을 노새와 난타에 싣고 가는데 대체적으로 건조한 중동의 기후 때문에 마초의 비율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초동반은 아군의 영토에서 마초를 징발하는데 스스로 제한을 두게 만들기도 하였다. 아무튼 불충분한 병참은 작전기간을 겨울을 제외한 계절동안 두세달 정도밖에 지속시킬 수 없도록 만들었다.
군의들은 예전의 압바스 때와 같이 군대와 동행했는데 셀주크의 임시야전병원은 낙타 사십마리분의 의료품을 싣고다녔다.
위에서 본것과 같이 수장들은 아스카르에 절대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의지하고 있었다. 아스카르 외에 봉건모집병들이나 지원자들로는 효과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은 아스카르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이들을 잘 어루만져 주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아스카르는 특정한 인물에게 속해있는 집단이 아니라서 자신들이 섬기는 주인을 바꾸는 것은 색다른 일이 아니었다. 수장국들간의 끈임없는 전쟁은 더 많은 땅을 정복하고 더 많은 세금을 걷고 그를 바탕으로 하여 권력의 바탕인 아스카르를 강화시키거나 그들에게 지급하는 봉급을 늘리려는 의도로 인해 일어났다.
수장들간의 경쟁은 투르크와 아랍 왕조들간의 끈임없는 전쟁 뿐 아니라 수장과 그들의 피지배민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특히 시리아의 알레포와 다마스코스에서는 전통적으로 시민들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일종의 시민군인 아흐다트( ahdath )가 형성되어 그들을 복종시키려는 지배자들의 야망을 억제했다. 파티마 왕조가 시리아를 정복했을 때 다마스코스의 아흐다트는 정복자에게 복종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아흐다트는 나중에 십자군이 침략해올 때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수장국들의 독립성과 형식적인 바그다드 술탄과의 예속관계는 예전의 사라센 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셀주크 제국을 점점 붕괴시켜 나갔다. 상황은 셀주크의 왕자들과 지방정부들이 투르크 아타베그들의 손에 들어가면서 악화되기 시작했다. 아타베그는 왕실 아스카르 중에 뽑힌 해방노예로 대부분 킵차크( Kipchak )와 타타르( Tartary ) 출신이었으며 술탄에 의해 왕실에서 뽑혀 군사와 행정경험을 쌓으며 진급했다. 자유민들은 먼 지방의 관리를 맡기는 것에 대해 통 신뢰감이 가지 않았고 토종 페르시아인들이나 아랍인들이 정복자들에게 바치는 충성심은 일시적이었기 때문에 술탄을 오랫동안 섬긴 노예출신 고위관료들은 술탄에게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노예가 되는 것은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고 노예출신의 관료와 장군들은 많은 존경과 명예를 받았다.
살라딘은 1169년 프랑크와 손을 잡고 살라딘과 그가 이끄는 투르크인들을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민 파티마 왕조의 최고고문관을 참수함으로서 이집트의 실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살라딘의 실권장악을 못마땅하게 여긴 근위대의 수단부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살라딘은 이들의 병영에 불을 질러 가족들을 구하러 병영으로 돌아가는 반란군을 공격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아르메니아 부대는 반란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병영에 불이 나는 바람에 타죽거나 뿔뿔히 흩어져 버렸다. 수단인들의 저항은 화제 이후에도 이틀간이나 지속되었고 살라딘은 이들을 도시 밖으로 나가도록 일단 허가증을 줌으로서 사태를 일단락지었지만 살라딘에 대한 저항은 1176년까지 이어졌다. 근위대가 해산되자 살라딘은 자기 가문의 가신 중 쿠르드 자유인 천여명, 이집트에서 자신에게 충성을 맹새한 아사드-앗-딘 시르쿠( Asad-ed-Din Shirkuh )과 누레딘( Nur ed-Din )의 아스카르( askar ) 이천명을 뽑아 근위대를 새로 조직했다. 이들 새 근위대는 주인들의 이름을 따서 부대명이 정해졌는데 살라딘의 부대는 Salahiyah, 시르쿠의 부대는 Asadiyah로 이름지어졌다. 근위대 다음으로 살라딘은 군대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이집트는 1163년부터 조금이라도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려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제거하기로 유명한 Dhirgham의 철권통치를 받았으나 그는 프랑크 영토를 습격하는 것 외에는 대체적으로 방어적인 정책을 취했다. 살라딘은 기존의 봉건제도로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용병들에게 줄 자원도 부족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이크타( Iqta ) 제도를 도입하여 이년 뒤 작지만 효율적인 군대를 만들었다.
모술과 같은 이슬람의 주요군주들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아직 봉건모집병들이 필요했다. 그의 1174년부터 83년까지의 정복활동은 주로 정예궁기병들과 이집트 창기병들의 활약에 크게 힘입었지만 그것도 모집병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그가 이집트 병력만을 데리고 1170년과 77년에 시도했던 원정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원정 중 소수장들은 스스로 자원하여 살라딘의 종주권을 인정했지만 알레포( Aleppo ), 다마스코스( Damascus ), 모술( Mosul )같은 대수장국들은 1183년 알레포가 함락당할 때까지 강하게 저항했다. 살라딘의 손에 들어온 봉건수장들은 살라딘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 모술과 같은 경우 프랑크에 대한 지하드나 시리아 원정 등에 깊숙히 참여하기도 하였다.
십자군을 상대로 한 원정에서 살라딘의 군대는 셀주크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소속과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단 눈에 띄는 소속군대만도 그의 쿠르드 호위대, 맘루크( Mamluk, 그의 아스카르에 속해있음 ), 각 수장들의 호위병들, 쿠르드 궁기병과 투르코만( Turcoman ) 용병 그리고 모집병들이 있다. 1177년 아스칼론( Ascalon )에서 그는 이만육천명의 군대를 이끌었는데 그중 팔천명은 그의 쿠르드 호위병 천명과 용병들을 포함한 정예였고 나머지는 티레( Tyre )의 기욤( William )에게 " 낮은 서열의 흑인노예들 "이라고 묘사된 창병과 수단궁병으로 이뤄진 구이집트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187년이 되자 정예의 숫자는 아스카리스( askaris )와 용병을 포함한 만이천명으로 불어났는데 이것은 보병으로 참가한 구이집트군 모집병들과 같은 숫자였다. 이 병력들은 이집트와 시리아. 자지라( Jazira )와 디야르-바키르( Diyar-Bakir )까지의 북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알레포, 모술, 마르딘( Mardin ), Balad Sinjar, 에데사( Edessa ), 하란( Harran ) 등지에서 참가한 수장들의 병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아크레(Acre)에서는 다른 병력비율이 되었는데 이때는 모술, 디야르-바키르, 북시리아, Balad Sinjar, 티그리스의 쿠르드 참가병, 하란의 아스카르 그리고 살라딘의 직접 거느린 아스카리스들이었다. 2년 뒤 리처드1세와의 대결을 벌인 아르수프( Arsuf )에서는 투릌, 수단, 아랍, 베두인인들이 참가했다. 이것을 보면 그의 군대가 점점 정열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결과인지 53년 후 그의 후계자는 가자(Gaza)에서 오천명의 정예기병과 만명의 콰리즘( Khwarism )인들을 이끌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살라딘은 베두인으로 이뤄진 정찰부대를 둬서 항상 프랑크의 움직임을 감시하게 하였다. 군대의 핵심이 아스카리스와 투르코?용병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하마( Hama ) 참가병의 경우 살라딘은 그들을 항상 우익에 두어 신뢰감을 보였다.
살라딘의 주요문제는 전쟁 중 모집병들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원정에 참가한 수장들은 자신이 이끄는 군대의 보급과 무장을 스스로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특히 장거리원정에 경우 많은 경비를 지출해야했고 그렇게 되면 원정에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군사들의 사기는 몇주밖에 지속되지 못했고 충분한 전리품을 얻거나 추수철이 가까운 때와 겨울과 우기가 길어질 때에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용병들은 계속해서 봉급이 지불되거나 충분한 약탈을 하지 못한 경우가 아니면 싸우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신뢰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따라서 원정기간은 길어야 일년을 넘지 못했고 군대는 매년 봄마다 재편성되었다. 살라딘은 예외적으로 삼년동안( 1190~3 ) 군대를 유지하는데 성공했지만 그역시 이슬람군대가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1188년 그는 북시리아 원정에 성공한뒤 안티오케이아( Antioch )를 정복하려 했지만 원정에 지친 그의 가신들이 압력을 넣는 바람에 도시정복에 실패한 적이 있다.
약탈의 유혹은 또다른 약점이었다. 1177년 살라딘은 보두앵( Baldwin )이 이끄는 기사 500명과 만났는데 보두앵은 살라딘과 싸울 뜻이 없었기 때문에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고 그의 병력은 흩어져 약탈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상당한 군대가 보두앵의 지휘를 벗어나 살라딘의 군대를 공격했고 이렇게 벌어진 몽기사르( Montgisard ) 전투로 살라딘은 큰 피해를 입었다. 하틴( Hattin ) 이후의 진격도 역시 약탈에 대한 군사들의 욕심 때문에 티레를 함락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맘루크
맘루크들은 백인노예들로 전쟁에서 잡히거나 시장에서 팔린뒤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어린 시절부터 높은 계급의 수장들을 위해 군사훈련을 받아 호위대가 되었다. 맘루크와 비슷한 조직은 사라센 시절부터 있었지만 엄밀히 말해 그들은 맘루크가 아니었고 투르크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압바스 왕조( Abbasid caliphate )의 투르크 호위대는 투르크인만이 아니었고 슬라브, 아르메니아, 러시아인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이 순수히 투르크인만으로 구성되기 시작한 것은 1230년대부터인데 몽골의 침략을 받은 쿠만( Cuman )족이 킵차크( Kipchak ) 스텝에서 도망쳐 대규모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이들 호위대는 파티마와 프랑크로부터 약한 칼리프령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한 압바스 치하에서 강성해졌는데 누레딘과 살라딘의 지휘하에서는 더욱 숫자가 많아지고 강력해져 야전군의 절반을 차지할때도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살라딘의 후계자들에 의해 완벽해졌는데 봉건군대보다 뛰어난 이들의 자질을 깨달은 그들은 살라딘의 사후 일어난 내전에서 증원된 아스카르를 동원했다. 이후 호위대의 힘은 더욱 커져 자신들의 주인을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리는 경지에 이르렀고 술탄계승에도 영향을 미쳐 Kamili 맘루크가 엘-카밀( el-Kamil, Kamili 맘루크는 이 술탄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음 )의 작은 아들 Es-Salih Ayyub를 술탄위에 앉히기도 하였다( 1240 ).
아이유브( 1240~9 )는 왕조의 마지막 효과적인 술탄이었다. 술탄계승에서의 과정으로 그역시 같은 방법으로 쫓겨날 것을 우려한 아이유브는 Kamiliyah 맘루크나 군대의 쿠르드 자유민, 이집트와 아랍 모집병들 중 어느 하나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호위대없이 지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투르크인이 주류인 새로운 맘루크들을 수입해와 그중 천명 정도를 뽑아 푸스타트( Fustat ) 반대편에 있는 al-Rawda 섬에 머물게 했다. 이들이 수도에 머물지 않은 이유는 카이로에서 술탄 비호하의 안하무인의 행동과 기존의 맘루크들과의 알력 때문이었다. 새로운 맘루크들은 바흐리( Bahri, 완전한 이름은 al-Bahriyah as-Salihiyah ) 연대라고 불렸는데 bahr는 해외라는 뜻으로 새 맘루크들이 해외에서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아이유브는 1249년에 죽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몇몇 바흐리 지도자들은 자신들 고유의 맘루크까지 갖고있을 정도로 세력이 컸지만 계속 왕조에 충성을 바쳤고 바흐리의 본부는 Mansourah에 있다가 1250년 2월 이집트의 총사령관이 죽으면서 바흐리가 그자리를 차지하여 이집트의 군수권을 잡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들 바흐리를 이슬람의 템플기사단이라고 불렀다.
아이유브의 후계자는 같은해 모술에서 도착했지만 그는 자기 고유의 맘루크들을 이집트로 데려와 이들에게 실권을 줄 생각이었기에 바흐리와 다른 이집트 맘루크들의 지지를 잃어버렸다. 그해 5월 2일 그는 맘루크 바이바르스( Baibars )와 다른 바흐리들에게 피살당하고 아이유브의 아내는 고위 바흐리 사령관인 아이베크( Aybek )와 결혼함으로서 긴 맘루크 왕조가 시작되었다.
1099년부터 1107년까지 이집트는 해마다 우트르메르( Outremer, 십자군 왕국들 )를 침공했는데 이들의 부와 통합성 그리고 편제 때문에 파티마 왕조는 잠재적으로 셀주크( Seljuk )보다 더욱 위협적인 적이었다. 왕조는 가능하다면 원하는 만큼의 군대를 야전에 투입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1101년 9월 1,1000명의 기병과 2,1000명의 보병을 투입한 Ramleh 전투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고도 이집트는 다음해 이만명의 군대를 동원하는데 문제를 겪지 않았다. 해군력에 있어서도 다른 이슬람 세력에 비하면 독보적이라 할만큼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집트는 투르크와 달리 군사국가가 아니었지만 그 특유의 부로 많은 용병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정예부대는 왕실근위대(Halka)로 백인노예들로 이뤄져 있었으며 주로 다양한 투르크 부족들 중에서 뽑혔지만 슬라브, 아르메니아, 비잔틴, 수단인들 역시 포함하고 있었다. 투르크인들은 기병으로 활약했으며 수단인들은 보병이었다. 근위대는 몇개의 연대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각 연대 중에서 두드러진 병사나 혹은 출신국가에 따라 이름이 지어졌다. 비잔틴인으로 이뤄진 Rumiya( 로마라는 뜻 ), 슬라브인들로 이뤄진 사칼리바( Sakaliba ), 흑인들로 이뤄진 Sudaniya 등은 병사들의 출신국가에 따라 편성된 연대들이고 그외 Gafiziya나 Guyushiya라는 이름의 연대도 있었으며 근위대의 총병력은 오천명이었다. 그외 천영근위대라는 조직도 있었는데 총수 오백명 정도로 귀족가문의 젊은이들에서 뽑혔으며 군사와 관료수업을 받고 군사행정면에서 활약하였다. 이들 중 두드러지게 활약하는 사람은 수장( emir )이 될 수 있었다. 근위대는 전체군대의 핵심이었으며 전투 중 이들의 행동은 모든 군대의 사기에 영향을 미쳤다. 민약 이들이 패배하거나 전장을 떠난다면 전투는 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수장들은 그들만의 호위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1160년대의 고관(vizier)이었던 Dhirgham은 오백명의 기병과 Barkiya라는 연대를 따로 거느렸다.
다른 군대는 주로 아랍, 베르베르, 수단인들 중에서 충원되었지만 이들의 전투능력은 셀주크나 프랑크군에 비해 낮았다. 수단인들은 보병과 궁병을 맡았는데 활을 사용할 때는 무릎을 꿇고 화살을 쐈다. 베르베르, 페르시아, 시리아인들도 보병연대를 만들어 움직였다. 아랍과 일부 베르베르 병사들은 창과 칼을 들고 기병으로 활동했지만 프랑크 기병들에 비하면 전투력이 낮은 대신 기동력과 숫적 우세로 승부를 봤다. 군대 중에 궁기병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궁기병의 필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동맹을 맺은 투르크인들이 군대에 참여하여 궁기병으로서 활약하였다. 군대는 셀주크의 영향으로 영토예비병체제로 지탱되었다.
아랍인들은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동부와 시나이 반도에 거주하는 아랍인들( Bedouin )들은 경기병으로 치고빠지기 전술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아이유브( Ayyub ) 왕조에서도 활약하였다. 1249년 다미에타( Damietta )에서는 밤에 성벽 위로 기어올라가 밖에 나와있는 프랑크인들을 죽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다미에타가 십자군에게 점령항다기 직전까지 도시를 지켰지만 자신들의 임무에 그리 억매이지는 않았다.
베두인인들은 그때도 지금과 같이 살고 있었다. 여러 관계있는 가족들이 모여 씨족을 이루었고 하나 이상의 씨족은 그 밑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지족에서 선출된 족장( shiekh )의 지도를 받았다. 이러한 씨족들이 여러개가 모여 부족을 이루었다. 사회는 가부장적이었고 전사들은 족장이 하는 일을 자원하여 따를 뿐 명령을 받지는 않았다. 이러한 것은 족장의 의사에 따라 얼마든지 약탈을 위해 승자쪽편으로 돌아설 수도 있었던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정규전에서 베두인인들은 별로 믿을 수 없었다. Banu Kinana는 베두인 부족들 중 군사력과 용맹성으로 가장 명성을 얻는 부족이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군대의 힘은 거대했으며 12세기 초 우트르메르를 침공한 것은 오직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군대의 세부적인 것은 1037~94년 사이에 가장 잘 알려졌지만 12세기의 군대와 왜 그렇듯 달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시기의 잠재적인 군사력은 구만명의 보병과 115,000명의 기병으로 기병의 경우 만명은 궁정근위대, 오만명은 베두인, 이만명은 튀니지아, 만오천명은 모로코와 알제리였고 나머지는 기타지역에서 모집되었다. 보병은 이만명은 모로코( 특히 Masmudi족 ), 만명은 동방인( 시리아로 추정 ), 삼만명은 페르시아와 투르크에서 차출된 병력이었다. 병종들의 균형은 전쟁 때마다 달랐는데 1167년 Ashmunein 전투에서는 메일을 입은 구천명의 기병( Askaris로 추정 ), 삼천명의 궁병, 차으로 무장한 만만명의 아랍보병이 참전하였다.
군대는 복잡한 계급체제에 의해 지휘되었다. 국가의 최고기관인 궁정회의는 " 검의 남자 "라고 불리는 관리들의 기관인데 고위직부터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관( Vizier )
고위의전관( High Chamberlain )
원수( Isfehsalar ) - 모든 군대와 궁전보호책임자
대수장( great emir )
군주( sword-bearer )
창군주( lance-bearer )
마필관리관( equerry )
카이로 방위사령관
푸스타트( Fustat ) 방위사령관
군대에는 세 종류의 수장들이 있었는데 가장 높은 금사슬의 수장은 수많은 사단들을 지휘할 수 있었고 군주( sword-bearer )는 칼리프와 관리들을 호종하는 역할을 맡았다. 가장 낮은 계급들은 함께 모여 중장기마대를 형성했으며 그들의 종자들은 보다 가벼운 무장으로 기병부대를 이뤘지만 이들의 무장은 베두인 경장기병들보다는 중장이었기 때문에 중장인지 경장인지 분류하기 어려웠다.
십자군 시대 이집트의 해군력은 이슬람 중에 가장 강력했으며 11세기와 12세기에 걸쳐 프랑크와 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해군기지들은 알렉산드리아, 다미에타, 아스칼론( Ascalon ) 그리고 시리아와 홍해 등에 설치되었다. 해군에는 전함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각 지방과 항구에서는 일정한 수의 상선들을 공급하여 함대를 지원하였는데 이러한 전통은 아이유브 왕조 때까지 계속 되었다.
해군의 역할은 바다에서만 한정되지는 않았다. 각 전함들은 선장의 지휘를 받았는데 이들은 해병들을 주로 지휘했고 항해는 주로 부선장의 몫이었다. 해병들은 12세기에 최소 두가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1183년 이집트를 출발한 이들은 홍해를 건너 베두인 말을 타고 메디나( Medina )를 공격하려는 샤티용( Chatillon )의 레날( Renauld )을 패배시켰고 1189년에는 아크레( Acre )에 만여명의 해병들이 상륙하여 살라딘이 아스칼론 전투 이후 새로운 군대를 일으킬 때까지 프랑크인들을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