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숙의 긴 이야기를 끝내고 먼 하늘을 바라보며 슬픔과 회한이 찬 눈물을 짓는다.
기철은 그러한 경숙이 안쓰러워 가만히 어깨를 감싸 안는다.
경숙은 오랜만에 가슴에 쌓여있던 한을 풀어 놓으니 그래도 조금은 가슴이 후련하다.
기철은 처음 경숙을 보았을 때 어딘지 모르게 음식점 아줌마와 어울리지 않는 경숙의 분위기가 있었던 것 그리고 어딘지 우수가 어린 것 같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저녁이 되어 택시를 타고 속초로 들어온 기철네는 조촐하고 깨끗한 빠를 찾아 들어갔다.
술잔이 두어 순배 돌고나자 경숙이 묻는다.
“이제 기철씨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홀로 겨울 바다를 찾은 사연이 무엇인지?”
기철이 경숙의 물음에 계면쩍게 웃으며
“내 이야기를 듣고 나를 오해하면 안 돼요. 그 약속을 해야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데요?”
“나도 나의 살아온 이야기를 할 거예요.”
“그런데 무슨 오해를 해요?”
“어쨌든 오해 않는다고 약속하세요.”
“알았어요.”
“정말 약속한 거예요.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돼요?”
“알았다니까요.”
이렇게 대답하는 경숙은 이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데 이렇게까지 다짐을 받나 하고 의아해하고 기철은 자기의 이야기를 듣고 경숙이 자기의 의도를 오해할까 봐, 미리 이렇게 약속을 받을 것이다.
기철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영희와 결혼한 이야기
그동안 건설업에 종사한 이야기
00도로 건설공사 수주 이야기
00도로 건설공사 현장소장이 되어 공사한 이야기
00도로 건설공사의 사고 이야기
그 일로 형무소에 간 이야기
형무소에 다녀와 다시 뇌물공여죄로 또 수사를 받은 이야기
형무소 다녀온 후에 인생에 대한 회의와 심신이 혼란해져 우울증이 시작되었는데 뇌물공여죄로 수사를 받은 후 우울증이 더욱 심해져 나중에는 죽음에 대한 유혹에 빠져 자살 사이트에 들었던 이야기 일 년 이상 오랜 기간 치료 후 얼마쯤 병이 나은 것 같아 외국 여행을 하여 심신을 추슬러 보려는 생각에 강릉 오던 날 외국 여행을 떠나려 출국장을 나가다가 환청과 환상을 보고 도망쳐 나왔고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가 탈 비행기는 이미 이륙을 한 후라 그대로 집으로 갈 수 없고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 고속 터미널로 가서 강릉행 버스를 탔고 오는 도중에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과 만남에서 편안함이 느껴져 자기가 알던 세상과 결별하고픈 생각에 자기의 모든 신분증을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이야기 그렇게 해서 강릉을 와 바다에 갔던 것과 그래서 경숙을 만나게 된 이야기를 대강했다.
기철의 말을 들으며 같이 분노하고 같이 웃고 같이 울던 경숙은 마지막쯤에 우울증을 앓던 기철이 자기가 알던 세상이 싫어 모두와 결별하는 마음으로 강릉에 왔다는 말에 놀라서 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드렸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나?’
‘이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나와의 관계를 맺은 것인가?’
‘혹 세상을 결별하려 하는 한 과정으로 나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나와 나눈 모든 것이 우울증에서 비롯한 병적인 행동에서 기인한 것이란 말인가?’
‘나는 이런 사람에게 내 감정을 빼앗기고 그 감정에 빠져내 나의 과거까지 모두 말하고 말았단 말인가?’
‘이제 나는 이 사람과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일어서 가야 하는 것 아인가?’
‘하지만 둑이 터지듯 쏟아져 버린 내 마음이 주저하게 하니 나는 바보가 아인가?’
‘나는 왜 이렇게 박복하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순식간에 경숙의 뇌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가며 경숙의 얼굴이 핏기를 잃는다.
경숙의 놀라는 행동과 경숙의 얼굴표정을 보고 경숙의 생각을 대강 짐작한 기철이 경숙의 두 손을 잡으며
“경숙씨! 오해하지 말아요. 그래서 말하기 전에 그렇게 오해하지 말라고 부탁한 거예요. 나도 지금 경숙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지금까지 나의 행동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경숙씨! 정말 오해하지 마세요. 경숙씨를 만난 후 지금까지 나는 내가 우울증 환자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고 또 지금까지 내가 경숙씨에게 한 것은 모두가 진심이었어요. 믿어 주세요.”
그러나 경숙은 말이 없다.
그런 경숙을 이해시키려 기철은 열심이다.
“경숙씨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내가 경숙씨 남편을 닮았다는 말에 그 남편이 바다에서 죽었다는 말에 호기심과 동지 같은 상련이 생겨서 경숙씨를 찾은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 우리를 가깝게 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경숙씨를 대하는 나의 마음은 진실이에요.”
“알았어요. 나도 기철씨가 말을 하기 전에는 기철씨에게 그런 병이 있는지 몰랐어요.”
기철의 말이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한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경숙의 대답이다.
“경숙씨! 내가 우울증에서 벗어나 삶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갖게 해 준 것에 대해 경숙씨에게 감사해요. 이제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모두 다 잊고 경숙씨와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어요.”
아직도 미심적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경숙의 표정이 기철에게 이런 말을 하게 했는지 모르지만, 이 말을 하며 기철은 정말 그렇게 하기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어째서 불가능해요?”
“기철씨는 가정이 있어요. 기철씨를 기다리는 가정이.”
“그래요. 나에게는 가정이 있었지요. 그러나 내가 알던 세상과 결별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 가정을 버렸어요. 그리고 그 가정은 내가 없어도 되지만 경숙씨는 혼자에요. 내가 돌보아 주어야 하고 또 돌보아 주고 싶은.”
“기철씨는 지금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에요?”
“아니, 네! 어쩜 강릉으로 오는 도중 신분증을 모두 버리며 지금까지 알던 세상과 결별 하고 싶다고 할 때 죽음을 생각했었는지 모르죠. 아니 생각했어요. 그러나 지금 경숙이 앞에 있는 나는 우울증을 고치고 경숙씨와 새로운 삶을 하고 싶은 남자예요.”
기철의 그 말에 경숙은 고마운 생각보다 조금은 당황했다.
자기와 만남이 얼마나 되었다고 가정을 가진 사람이 그 가정을 버리고 자기와 같이 살겠다고 하다니. 하다가 그럼 그런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 나는 무언가 하는 생각에 도리를 쳤다.
“아니에요. 우리 그렇게 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렇지 않아요. 이런 생각은 빠를수록 좋은 거예요.”
“아니에요. 우리 지금은 그런 생각은 말아요. 다만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르지만, 같이 있는 시간만 충실히 지내기로 해요.”
“그래요. 그렇지만 나는 경숙씨가 나를 밀어내지 않는 이상 아니 경숙씨가 나를 밀어내도 나는 절대로 경숙씨 곁을 떠나지 않아요.”
“그런 말씀 마세요. 기철씨가 돌아가지 않으면 집에서 찾을 텐데.”
“집에서는 안 찾을 거예요. 아니 못 찾을 거예요. 찾는다 해도 아마 외국에서 실종된 것으로 알게 되겠죠.”
“하여간 그런 말은 더 이상 하지 말아요. 무서워요.”
갑자기 왜 경숙이 순간적으로 무서운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기철의 단호한 말에 기쁨보다는 무서운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혹 어떤 전조를 느꼈기 때문인가?
“무서워 말아요. 내가 어떤 경우라도 경숙씨 곁에서 경숙씨를 지켜줄 태니.”
하며 기철이 경숙을 살며시 껴안는다.
“고마워요.” 안기며 하는 경숙의 말이다.
기철의 참되고 진정 어린 말이 지금까지 앞에서 느꼈던 의혹에서 경숙을 풀려나게 한 것이다.
그날은 강릉으로 돌아와 기철은 경숙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자기의 모텔로 돌아왔다.
모텔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기철은 자기가 생각을 해도 경숙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어째서 내가 30여 년이 넘도록 지켜온 가족을 버리고 경숙을 돌보아 주겠다고 생각한 것인가?’
‘정말, 서울을 떠날 때 이미 지금의 가족은 버린 것인가?’
‘사실 서울을 떠날 때 가족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근히 만약 자기가 무슨 일이 생기면 가족이 찾아주고 슬퍼 해주기를 바라지 않았는가?
그런데 갑자기 생각이 바뀐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강릉으로 오는 도중 휴게소에서 신분증을 모두 버릴 때부터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인가?
‘그렇지는 않았다. 그때는 경숙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도 못 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내가 경숙을 사랑하는가?’
‘혼자인 경숙의 처지가 측은해서 그런 것인가?’
“동정과 사랑은 다르지 않은가?”
‘경숙을 사랑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인가?’
‘그렇다. 동기야 어찌 되었든 내가 지금 경숙을 사랑하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꼭 그렇게 할 것이다. 서울의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에게는 서로 돌보아 줄 식구가 있지만, 경숙에게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내가 우울증을 벗어난 것은 경숙이 때문이다.’
집에 온 경숙도 생각이 많기는 마찬가지이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죽은 남편과 닮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철과 이렇게 가까워질 수가 있을까?
‘그동안 혼자 지내며 나도 모르게 남자를 그리워했던 것인가?’
‘그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에게 접근하는 그 많은 남자을 뿌리치고 모른 체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의 성격상 이렇게 기철과의 관계가 급진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것이 운명이란 것인가?’
‘운명이라면 내가 기철씨를 사랑하는 것이 운명이라면 순순히 받아들이자. 결과야 어떻게 되던.’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아니 어떤 결과가 되던 후회는 들 것이다. 다만 결과를 받아드릴 수 있는 준비를 하자.’
다음날 둘은 같이 만나서 설악산을 올랐다.
권금성으로 울산바위로, 권금성은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것이라 별로 힘든 줄 몰랐는데 눈 덮인 울산바위는 오르는 데는 좀 힘이 들었지만 두 사람이 서로 밀고 당기며 그렇게 산을 올랐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졌다.
경숙은 처음으로 설악산 구경을 했다.
설악산이 가까운 강릉에 살면서도 철수가 살아 있을 때는 생활이 쫓기어 철수가 죽은 후에는 생에 대한 회의로 어디로 놀러간다는 것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경숙의 음식점은 기철을 만나기 전엔 365일 쉬지 않고 거의 문을 열었다. 마음에 일어나는 이런저런 번놔을 잊기 위해.
기철도 설악산에 몇 번 왔었지만, 겨울에 울산바위를 오른 것은 처음이다.
힘은 들었지만, 소녀와 같이 좋아하는 경숙을 보며 기철도 즐거웠다.
눈 덮인 설악산, 눈꽃이 활짝 핀 설악산의 경치도 두 사람의 즐거운 마음에 한 몫을 단단히 한다.
설악산을 구경하고 내려온 두 사람은 저녁 식사 후 자연스럽게 속초에 있는 호텔에 방을 잡았다.
호텔 지하에 있는 바에서 술을 한잔하고 조금 늦게 방으로 올라온 두 사람은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와 같은 착각을 했다.
첫댓글 즐~~~~감!
무혈님!
감사합니다.
이제 끝장을 향해 달려가는 데
일이 생겨 늦어졌습니다.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