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고, 고맙다
곽 흥 렬
보컬 그룹 공일오비(015B, 空一烏飛)의 <수필과 자동차>를 듣는다. 발라드풍의 경쾌한 레게 리듬에 나도 모르게 발장단이 맞춰지면서 어깨가 들썩거린다. 알 만한 사람은 익히 알다시피 공일오비라면 ’90년대 우리 가요계를 풍미했던 뮤지션 아닌가. 그 인기가수들이 부르는 노래이니, 내 비록 생의 저물녘으로 향해 가는 세대이지만 자연스레 관심이 쏠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리라.
동화풍의 감성적인 언어로 꾸며진 재미난 노랫말도 노랫말이려니와, 무엇보다 흔하게 만날 수 없는 독특한 제목에 낚아 채이듯 와락 마음이 빨려든다. 명색이 작가라는 이름을 달고서 오랜 세월 수필전도사 노릇을 자처해 온 나이기에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내면의식의 작용일 터이다. 수필과 자동차, 얼핏 서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둘 사이의 조합이 한편으론 낯설면서도 한편으론 묘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호소하고 싶어 이런 생뚱맞은 제목으로 노래를 만든 것일까.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해 가며 작사가의 창작 의도를 짚어 본다. 그러고 있노라니, 가치 전도 현상이 판치는 오늘의 세태를 음악이라는 형식에 담아서 풍자하려 한 색다른 발상에 연신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영화를 보곤 가난한 연인/사랑 얘기에 눈물 흘리고/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되고파 할 때도 있었지/이젠 그 사람의 자동차가/무엇인지 더 궁금하고/어느 곳에 사는지 더/중요하게 여기네 <중략>
버스정류장 그 아이의/한 번 눈길에 잠을 설치고/여류작가의 수필 한 편에/설레어 할 때도 있었지/이젠 그 사람의 아버지가/누구인지 더 궁금하고/해외여행 가봤는지/중요하게 여기네
공일오비의 멤버이기도 하면서 직접 가사를 쓰고 거기다 곡까지 붙인 정석원, 노랫말에 불려나온 낱말들이 그가 평소 문학을, 아니 수필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는 음악가임을 확연히 말해 준다. <수필과 자동차>에서 ‘수필’하고 ‘자동차’가 각기 무슨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앞뒤 맥락으로 헤아려 보건대, 수필이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표상한다면 자동차는 형이하학적인 가치를 표상하는 알레고리로 읽힌다.
여기서 그 이면에 숨은 하나의 유의미한 현상을 도출해 낸다. 세상사와 문학의 대비 구도를 설정할 경우 항용 수필 대신 시를 갖고 오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 관행이 시나브로 깨어지고 있는 게다. 시가 독점해 왔던 그 자리를 이제 수필도 당당히 차지하고 들어앉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방점이 찍힌다. 인생의 절반이 넘는 세월 동안 고집스레 수필 하나만을 붙들고 씨름해 온 사람으로서 여간 생광이 아닐 수 없다.
불현듯 스무 해도 훨씬 전 어느 날, 금융기관을 찾았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수성교 근처의 한 외국계 은행 지점에서였다. 그때 무슨 볼일로 거기를 들렀었는지는 지금은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져 있다. 다만,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던 여자 행원의 말 한마디가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뀔 만한 시간이 흐른 오늘 이 순간까지도 마치 어제 일처럼 잊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상담실로 안내한 뒤 차를 권하면서 나더러 “실례지만 뭐 하시는 분이세요?” 하고 조심스레 물어왔었다. 나는 그녀에게, 대답 대신 무슨 일 하는 사람으로 보이느냐며 되물었다. 내가 글 동네를 기웃거리고 있다고 하자, 그녀는 눈웃음 머금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그럼 혹시 수필가 아니신가요?”라며 반색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전 같았으면, 글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면 으레 “시인 아니신가요?”라는 말로 친근감을 표현했을 터이다.
참 의외다 싶었다. 그 한마디가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면서 나를 흥분시켰다. 우리 수필가의 이미지가 어느새 일반인들에게 이처럼 인식되고 있었구나. 이런 생각과 함께 마음속으로 흔흔한 기쁨에 젖어들었었다. 오늘 공일오비의 ’90년대 히트곡 <수필과 자동차>를 들으면서 서른 해 가까이 전 그날의 기분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인 일일까.
‘수필’이라는 말만 나오면 나는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제 자식이 밖에 나가서 남의 자식한테 지고 들어오면 용납이 되지 않는 부모 마음처럼, 어쩌다 수필이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홀대를 받게 될 때면 나는 끓어오르는 심사를 억누르기가 힘들다. 그만큼 수필을 많이 아끼고 사랑한다는 반증일 게다. “왜 하필 수필인가?” 하고 누가 내게 물어올라치면, 나는 어느 유행가 가사의 구절을 빌려와 “무조건, 무조건”이라고 대답해 준다. 좋아함에 있어 무슨 구구한 사설이 필요할 것인가. 그냥 무조건 좋을 뿐이다.
‘수필과 자동차’, 이 심장深長한 노랫말로 세상 사람들에게 수필의 존재 가치를 일깨워 준 작사가가 고맙다. 감칠맛 나는 곡조로 음악 애호가들에게 수필 사랑의 마음을 심어 준 가수들이 고맙다.
(《수필세계》2019년 겨울호 '권두 에세이')
첫댓글 산뜻함
글 속에는 공일오비( 空一烏飛)의 <수필과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로 고맙다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 속에는 다 말 못하는 유의미적 해석이 들어 있지요.
노랫말 속의 뜻처럼,
-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 되고파 할 때도 있었지
이젠 그 사람의 자동차가 무엇인지 더 궁금하고
어느 곳에 사는지 더 중요하게 여기네-
대중화된 문화는 편하게 익히고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것이고
내면세계는 적당한 뒷자리로
물러나 앉았지요.
이런 것이 요즘의 세상이고
문화입니다.
곽흥렬님, 오늘도 뜻깊은 글에
감사합니다.
형이하학이 형이상학을 압도하는 세상에서 조금은 굼뜨고 구식인 아날로그적인 것들도 나름대로는 가치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시지요.
경자년 새해에 콩꽃님의 건승과 행복을 빕니다,
@곽흥렬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뼈속 깊이 베여 있는
사회풍토입니다.
좋아함에 있어 무슨 구구한
사설이 필요할 것인가?
좋으면
그냥 무조건 좋을 뿐이지요.
그렇습니다.좋은 건 그냥
좋은거죠..
015B 한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더 큰 것을 바래도
많은 꿈 마져 잊고 살고..
세월이 흘러 갈수록
소중한 것을 잊고 산다는..
이젠 그런 나이가 되버린거죠..
정석원과 장호일..
오랜만에 오셔서 반가운
글 올려주시고 감사합니다.
곽흥렬선생님의 글도
노래의 제목도 노랫말도
그냥 무조건 좋으네요.ㅎ
핸드폰 집중 하다가
기차 놓칠뻔 3분 남겨두고
후다다다다닥 초인적 힘
발휘 기차 탔습니다.^^
흠~아직은 달리기 자신 있네요.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시나브로 봄이 우리 곁으로..^^
미지 선생님, 설 잘 쇠셨습니까.
저의 글이 무조건 좋으시다는 말씀에 고개 숙입니다.
새해에는 부디 좋은 날들 가득하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지금 세상은
잃어버려서는 안 될
본질적인 것들은 소홀히 하고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할
비본질적인 것들을
찾아 헤메고 있지요.
정말 우리에게 소중한 것들은...
당장 우리가 소유해야 만 하는
그 어떤 유형을 가진 것들이 아니라
우리를 참 인간으로서 존재케 할
무형의 그 무엇이라는 것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군요. 감사합니다.
매화인 선생님, 별호만으로도 선생님의 내면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판을 치고 있는 요즘 세상에서, 그래도 글 쓰고 읽기를 좋아하는 우리가 있기에 서로 위로 받으면서 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자년 새해에 부디 건승건필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