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十六. 이 사람과 사랑해도 될까요?
“아네고, 미안해. 이번 주도 힘들 것 같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목구멍까지 ‘민지 만나는 거야?’라는 질문이 차올라 왔기 때문이다.
정말 묻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왜 대답이 없어?”
“아… 미안해. 그럼 어쩔 수 없지.”
“… 무슨 일인지 안 물어봐?”
“물어도 대답… 해주지 않았잖아.”
“미안. 정말 미안해. 지금은 대답해 줄 수 없어.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줘.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 료 미안한데 지금 회의… 들어가야 해. 그럼… 다음 주에 보자.”
료가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난 그냥 핸드폰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담배를 가지고 사무실을 나갔다.
기다려 달라고? 뭘 기다려 달라는 거야? 민지와의 관계를 공표라도 할 셈인거야?
그럼 우린 이제 못 만나는 건가?
좋아한다고 내가 먼저 말해버릴까 생각했지만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
상처받고 힘들어하기엔 난 너무 지쳐버렸다고. 인생에도 사랑에도… 머리 속이 복잡했다.
그 때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누군지 확인하지 않고 그냥 폴더를 열어 귀에 가져다 댔다.
“이번 주말에 뭐 하고 싶어?”
다짜고짜 묻는 재민씨.
“글쎄.”
“5초 줄께. 5, 4, 3”
“부산영화제 가고 싶어요. 3년 전에 가고 못 가봤거든요.”
“좋아.”
“갑자기 그건 또 왜 묻고 그래요?”
“궁금해서.”
“회의 중?”
“응. 아침 8시부터 지금까지 릴레이야. 보고 싶어.”
“거짓말.”
“진짠데… 미안. 지금 다시 들어오래. 나중에 전화할께.”
뜬금없는 재민씨의 전화. 하지만 그의 이런 면 때문에 끌리는 것인지도…
토요일 아침. 핸드폰 진동이 시끄럽게 울렸다.
반쯤 뜬 눈으로 핸드폰을 보니 아침 7시다. 젠장! 이런 꼭두새벽에 누가 전화를…
재민씨다. 아~ 제발 토요일 아침만큼은 잠을 깨우지 말아달라고.
주말의 묘미는 뭐니 뭐니해도 늦은 기상인데 말이야.
거기다가 어제 현숙과 밤새 술 마셨더니 머리가 깨질 것 같다구.
핸드폰이 멈췄다. 아~ 다행이다. 다시 자야지.
눈을 감는 순간 다시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젠장!
“여보세요.”
“경주, 좋은 아침!”
“네.”
“빨리 옷 입고 30분까지 나와. 나 지금 자기 집 앞이야.”
“네?”
“부산 가고 싶댔잖아. 지금 빨리 가야 KTX 안 놓친다구.”
“아니…”
“그렇게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빨리 나와.”
이 무슨 날벼락! 침대에서 일어나니 머리가 ‘띵’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걸 참고 나는 화장실로 급히 들어갔다.
30분 뒤 나는 재민씨의 차에 탔다. 절대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지만 어쩔 수 없다.
쌩얼에 물기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 커다란 후드티, 헐렁한 청바지, 운동화…
“자, 출발이다!”
그가 차를 출발시켰다. 나는 안전 벨트를 매며 그에게 물었다.
“갑자기 왠 부산이에요?”
“자기가 가고 싶댔잖아. 그래서 어제 KTX도 예약하고 영화도 어렵게 몇 편 예매했다구.”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빨리 가야 할텐데.’라며 운전에 집중했다.
그러다가 나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자꾸 그렇게 쳐다보지마. 운전에 방해된다구.”
“기특하네.”
“엉?”
“감동 받았어요. 나 지금...”
“당연하지. 이걸로 대답 듣는 시간을 앞당길 수 있을래나?”
“뭐야? 이거 이거…”
“다른 생각 말고 끝까지 감동해주세요. 그리고 한 가지 더 감동할 거 있어.”
“뭔데요?”
“영화 ‘크레이지 스톤’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거 예매해뒀어.”
“그 영화 완전 매진인데…”
“아는 사람 중에 부산 영화제에서 일하는 분이 마침 있어서 부탁 부탁했지.”
“미안해요.”
“뭐가?”
“다”
“다?”
“응… 어제 술 마셔서 얼굴도 엉망이고 옷도 엉망이고…”
“그러게… 난 오늘 새벽에 들어가서 4시간만 자고 샤워하고 면도까지 하고 왔는데 말야.”
“다음엔 안 그럴께요.”
“괜찮아. 내 눈에 이뻐 보이니까.”
“닭살.”
“뭐야? 그럼 밉다고 그래?”
난 쑥스러운 듯 사이드 미러를 쳐다 보았다.
“나한테 고맙지?”
다시 그를 쳐다 보았다. 그러자 그의 얼굴을 내 쪽으로 약간 내밀며 말했다.
“볼에다 뽀뽀 해줘.”
“뭐야?”
“상 줘야지.”
“됐어요. 부산 가서 내가 밥 쏠께.”
“어… 갑자기 차 속도가 줄어드네.”
거짓말인 줄 알았지만 정말로 그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그는 뒤에 차가 따라오든 말든 내가 안 해주면 길 한복판에 차를 세울 셈이었다.
“이러다가 늦어요.”
“상 줘.”
“아니… 애도 아니고…”
“남자는 다 애야.”
“아니… 사회적 체면도 있고 나이도 있는 분이 이러시면 안되죠.”
“남자는 나이가 들어도 어린애 같은 면이 있다구. 빨리 해줄 꺼야, 말꺼야? 이러다가 우리 KTX 놓쳐.”
그는 얄밉게도 다시 내게 볼을 내밀었다. 그에게 이런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 있다니…
때로는 로맨티스트 신사처럼, 때로는 옆 집 털털한 총각처럼, 때로는 이렇게 떼쟁이 아이처럼…
그가 좋다. 료가 없었다면 온 마음을 다해 그를 사랑할 수 있었을텐데…
나는 그의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는 나를 힐끔 보고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차의 속도를 다시 올렸다.
“날아가야겠다.”
“늦어도 안전 운전.”
“아니, 내 기분이 좋아서…”
“유치해.”
“엉. 원래 사랑도, 사랑하는 사람도 유치한 거야.”
나는 아무런 대답없이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떠나기 직전의 부산행 KTX를 올라탔다. 우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재민씨도 못하는 게… 있네요. 그렇게… 못 달려서야.”
“좌석이…”
그는 짐짓 못 들은 척 하며 티켓을 보고는 기차 내부로 들어갔다.
주차장에서 내려 뛰는데 어찌나 느린지… 나는 그의 손을 낚아채서 있는 힘껏 달렸던 것이다.
좌석을 찾았는지 저기서 그가 날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리에 앉고 나니 문을 밀고 들어오는 간식거리 파는 철도 직원이 보였다.
“아침 안 먹었지? 뭐 먹을래?”
“아뇨. 어제 술을 좀 마셨더니… 영…”
그는 물을 내게 건네고 자신은 캔커피를 마셨다. 내가 물을 한 모금 마셨을 때 그가 물었다.
“경주는 생일이 언제야?”
“12월 20일. 재민씨는 10월 24일?”
“아니. 4월 13일.”
“어… 근데 아파트 비밀번호가…”
“요즘 누가 생일로 비밀번호 만드나?”
“그런가? 731024… 꼭 생일 같아서 선물을 뭘로 할까 생각하는 중이었어요. 그런데 생일은 왜요?”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혹시 이번 광고가 별자리 관련해서 만드는 거 아니예요?”
“엇! 어떻게 알았지?”
“이거 이거… 괜히 생일 챙겨주는 척하면서 일 이야기를 꺼내다니…”
“실은 말이야. 이번에 만드는 광고가 20대 초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거라서 별자리로…”
고개가 아래로 툭하고 떨어졌다. 나는 깜짝 놀라 깼다.
그가 잠이 든 것을 보고 나도 눈이나 붙일까 하던 것이 그의 어깨에 기대어 깊이 잠들었던 모양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 그의 손과 내 손이 깍지 껴있었다.
그는 꽤 피곤했던지 내가 약간 움직였는데도 불구하고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참동안 자신이 맡은 광고에 대해,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받은 선물에 대해 떠들 듯 신나게 이야기하는 그.
그런 그의 열정이 좋았다.
나의 잃어버렸던 열정을 일깨워주는 듯 해서 좋았다.
뜬금없이 전화해서 엉뚱한 질문을 퍼붓는 그, 재즈와 와인과 케잌을 좋아하는 그,
낭만적인 분위기를 즐길 줄 아는 그, 아내를 잃었지만 여전히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그,
그리고 엉뚱한 이벤트로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그… 나는 그런 그가 좋았다.
그래, 결정해야 해. 이렇게 좋은 사람을 더 이상 힘들게 할 순 없어.
난 영화 ‘글루미 썬데이’의 여주인공 일루나가 아니잖아.
두 사람을 모두 사랑할 순 있지만 두 사람 모두를 선택할 순 없어. 모두에게 상처를 주게 되니까.
첫댓글 재민이 너무 귀여운것 같네요......그리고 광고 비밀번호가 별짜리 였네요.....여기서 러브모드 들가면 좋겠는데...ㅋㅋㅋ..다음편 기대~~
그렇죠? 쓰면서도 재민에게 폭~ 하지만 료가 있으니... 다음 편 열심히 써서 올리겠습니다.
재민이보단...료를...훠얼씬... 좋아하는거 같은데... 사랑은 맘으로 하는거잖아요.... 료랑 어이 사랑하게 해주세요^^
재민과 료, 과연 경주는 누굴 선택할까요~
그래도 저는 재민이요... 료하고는 좀...
맨날 티격태격이죠. 그리고 상처도 많이 받고~ 하지만 결과는 아직 저도 모르는 일!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