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숙은 술 먹은 얼굴이 더 붉어지고 기철도 쑥스러워 경숙을 정면으로 보지 못한다.
경숙의 권유로 기철이 먼저 샤워를 하고 나오고 경숙이 샤워를 하러 들어간다.
경숙은 새신부가 새신랑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차근차근 샤워하며 철수와 보냈던 첫날밤을 기억해 본다.
어쩌면 지금이 그때보다 더 가슴이 뛰는 것 같다.
그때는 아직 철모르는 시절이었으니까.
침대에서 경숙을 기다리는 기철도 가슴이 뛰기는 마찬가지다.
많은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며 다른 여자를 품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도 삼갔던 기철로서, 영희 외에는 다른 여자를 모르던 기철로서도 여간 긴장되고 흥분되는 것이 아니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나온 경숙이 침대로 들어올 때 기철은 자리를 비워주며 황홀한 눈으로 경숙을 쳐다본다.
경숙은 그런 기철의 품 안으로 안기어 오며 살포시 눈을 감는다.
이제 막 샤워를 하고 씻은 경숙의 머리에서 향긋하게 풍기는 비누 냄새가 기철의 코를 간질인다.
경숙도 오랜만에 정말로 오랜만에 남자의 넓은 품에 안기며 가벼운 흥분과 은은히 풍기는 남자의 냄새에 도취된다.
그리고 길고 짜릿하고 황홀한 삼매에 두 사람은 같이 깊이 빠진다.
그렇게 달콤한 밤을 지내고
그다음 날부터 둘이는 경포대, 낙산사, 통일 전망대 등 강릉 근처에 관광지를 돌며 즐거운 날을 보냈다.
철수가 죽은 후 거의 나가보지 않았던 해변도 찬바람을 맞으며 걸어보고.
경숙으로는 철수가 죽은 후 10년여 만에 가져보는 그런 날들이었다.
광주에서 증권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는 철수와 자주 여행했지만, 증권 사태가 터지고 강릉으로 와서는 생활 때문에, 철수는 뱃일과 가리비양식장 일로 경숙은 음식점 일로 철수와 많은 시간을 즐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즐거운 날을 보내던 어느 날 경숙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자기들의 행위가 소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불륜이라고
자기들은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항변해도 아니 어쩌면 항변할 수조차 없는지도 모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불륜일 수밖에 없다고.
벌써 주위의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수군거리는 것 같다.
‘더욱이 기철의 처 영희가 알면 얼마나 황당하고 허망할까?’
‘30여 년이 넘도록 외도 한 번 안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외국 여행한다고 떠난 사람이 외국 여행은 떠나지 않고 강릉에 와서 다른 여자와 놀아났다고 하면 영희의 심정은 어떨까?’
‘왜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아니 생각했지만 나와 기철만 생각하느라 무시했던 것이다.’
‘기철이 연락을 하지 않으면 당장은 영희가 모르겠지만 기철이 기한 내에 돌아가지 않으면 경찰에 의뢰하여 기철이 비행기를 타지 않은 것을 알게 되고 국내를 수소문하여 언젠가는 알려지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때의 기철의 처지나 자기 입장은 무엇이 될까? 영희는 얼마나 애타고 복장이 터지고 허망하고.’
‘정말로 이 세상에서는 모르고 끝난다고 하더라도 죽은 후 저 세상에서 나의 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유부남을 꾀었다는 죄를. 그리고 철수를 무슨낮 으로 볼 것인가?’
기철도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하는지 무슨 생각에 빠져 멍하게 있다가 경숙이 불으면 당황한 빛을 보이는 때가 있다.
경숙은 아무래도 우리의 관계를 청산하여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기철을 떠나서 다시 혼자가 되어 살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자기들도 불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철과 경숙의 관계와 같이 만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비난과 수모 등의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헤어지지를 못하는 것인가 보다.
경숙은 고민에 빠진다.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하는데 헤어져서는 못 살 것 같다.
어쩌면 좋은가?
이렇게 그냥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낼 것인가.
즐거운 가운데도 불쑥불쑥 불안이 몰려드는 그런 날들이 지나간다.
이렇게 보내다가는 정말로 기철의 곁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기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경숙에게 정성을 다 한다.
자기가 우울증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경숙을 만났다는 것을 말하고 나서 경숙을 만나 우울증이 거의 나았고 자기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표하기 위해서인가 보다.
그러니까 경숙도 점점 더 기철에게 빠져든다.
어떤 결단이 필요하다.
어떤 결단을 해야 하는가?
이제 기철과 헤어져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심정에서 슬프고 막막하다.
죽은 사람은 죽었다는 것으로 잊고 살 수 있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을 잊고는 못 살 것 같다.
살아 있는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러던 경숙은 생각과 생각을 거듭한 끝에 어떤 결심을 한다.
앞으로 며칠 동안은 아무 생각 말고 기철과 마음껏 사랑하기로
기철과의 사랑을 마지막 불태우는 것처럼 한 시간이라도 뜻있는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기로 마음먹는다.
낮에는 더욱 기철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밤에 작업도 경숙이 기철보다 더 열성을 가지고 유도하며 한 시간도 기철을 떠나지 않는다.
기철은 변화된 경숙의 행동이 자기의 행동과 말에 대한 신뢰와 대답인 줄 알고 그도 또한 경숙을 끝까지 사랑하고 책임지겠다는 생각으로 경숙의 사랑에 보답한다.
두 사람의 열정적이고 화려한 생활이 한 달 하고 보름쯤 물같이 지나갔다.
호텔 베란다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자기의 결심을 실천에 옮기려는 경숙은 마음이 착잡하고 자기의 생각에 몰두하느라 기철이 다가오는 것도 모른다.
그런 경숙의 표정을 보고 기철이
“당신 어디 아파?”하고 묻는다.
“아니에요. 바다가 너무 아름다워서요.”
기철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경숙은 자기가 너무 자기 생각에 빠져있어 기철이 자기의 생각을 눈치챌까 봐 어른 표정을 바꾼다.
“그렇게 바다를 미워하더니 이제 바다가 아름다워져?”
“그래요, 당신을 만나고 다시 바다가 아름다워졌어요.”
“정말 다행이군. 이제 우리 앞에는 아름다운 세상만 있을 거야.”
기철의 그 말을 들은 경숙이 갑자기 두 눈에 눈물을 흘린다.
“고마웠어요. 기철씨.”
“고마웠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고맙다고요. 말이 잘 못 나왔어요.”하며 경숙이 기철의 품으로 쓰러진다.
그리곤 다음날 집에 볼일이 있어 잠깐 다녀오겠다고 하고 집으로 갔다.
그런 경숙이 저녁 때가 되어도 그다음 날도 되어도 오지 않는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기다리던 기철이 경숙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경숙의 집에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 후 몇 번 더 전화해도 전화를 받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한 기철이 무슨 일인가 하여 경숙의 집으로 달려가 보았다.
경숙의 집은 안으로 잠겨 있다.
문을 뚜드렸다.
아무리 문을 뚜드려도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문을 안으로 잠그고 어디를 갔단 말인가 가게로 들어가는 문 말고 다른 문이 있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다른 문이 없다.
이웃 사람들에게 경숙을 못 보았느냐고 물었지만 모두 이 한 달이 넘도록 어디를 갔는지 문은 잠겨 있고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동안 경숙이 기철과 호텔에 있었기 때문인가 보다.
집에 다녀온다고 하고 온 것이 어제인데 그럼 이 사람이 어디를 갔단 말인가?
더욱이 문을 안으로 잠가 놓고
혹 안에서 잠을 자고 있다고 해도 기철이 그렇게 문을 뚜드렸으니 잠이 깨었을 텐데, 이상하게 생각하다 혹시 어부 아저씨는 사정을 알까 하고 어부 아저씨네로 가 보았다.
기철을 본 어부 아저씨는 오랜만이라고 반기다가 기철이 혹 경숙이 여기에 오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안 왔다고 대답하는 어부 아저씨의 얼굴이 뜨악해지며 왜 기철이 경숙이를 찾아다니는가 하고 물었다.
기철은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어차피 어부 아저씨도 알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동안의 일을 대강 설명하고 경숙을 찾는 까닭을 말했다.
기철이 말을 맞혔을 때 어제 아침나절 헤어져 집에 다녀온다고 한 후 연락이 안 되고 집은 문이 안으로 잠겨 있다는 말을 듣자, 어부 아저씨는 후닥닥 일어나더니 연장을 찾아들고 빨리 따라오라며 달린다.
그동안 경숙을 옆에서 지켜보아 경숙의 성격을 잘 아는 어부 아저씨는 기철과 지내며 경숙이 겪었을 마음에 갈등과 고통을 짐작되고 마음에 짐작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