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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 太祖 주원장. |
정도전이 활약하던 14세기 후반 동북아시아는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형성되는 전환기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13세기 후반부터 100여 년 동안 지속되던 몽골 중심의 세계질서는 14세기 후반부터 와해되기 시작했다.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몽골제국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원조(元朝)는 1350년대부터 중국 남부지방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한족(漢族)의 반란으로 인해 붕괴의 길로 들어섰다.
저물어가는 원과 떠오르는 명 사이에서 고려의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견지하면서 원이 쌍성총독부를 설치했던 함경도의 철령위(鐵嶺衛)를 되찾았다. 이러한 공민왕의 행보는 당시의 몽골제국 중심의 질서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374년 공민왕이 아직 그 세력이 소진되지 않은 친원세력에 의해 피살되면서 고려는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로 나뉘어 정치적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1368년 마침내 주원장(朱元璋)은 명을 건국하였으며, 원은 북쪽 몽골로 쫓겨나 북원(北元)을 세웠다. 통일정권을 구축한 명은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대외적으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추진하였다. 주원장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조공(朝貢)체제를 주변국에 요구, 고려는 아직 소멸하지 않은 북원과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명과의 틈바구니에서 갈등하는 가운데 국세가 기울면서 새로운 혁명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공민왕의 친명배원 외교노선을 주장해 친원파와 대립하였고, 1388년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이후에는 친명정책을 확고히 하였다. 1391년에는 북원도 멸망하면서 북방민족 몽골의 중원 지배는 끝나고 한족에 의한 중국 지배가 시작되었다. 마침내 1392년에는 고려도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창건되었다. 일본에서는 장기간 내란 상태였던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1336~1392)가 끝나고 통일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 모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한편 격변기였던 여말선초의 시기에 고려와 신흥 조선은 철령위와 요동(遼東), 그리고 여진족 문제를 둘러싸고 명의 압박이 계속되면서 양국 사이에는 외교적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명은 친 여진정책을 취함으로써 북원의 잔재세력과 조선을 견제하려고 하였고, 조선도 여진에 대한 회유정책을 썼는데, 이것이 명의 비위를 건드렸던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 초 정도전을 중심으로 국방력 강화와 요동정벌이 추진되면서 명과의 관계는 위기상황을 맞이하였고, 명 태조 주원장과 조선의 정도전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양국관계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역성혁명의 배경이 된 정도전의 유배 생활
정도전은 언제 어떻게 역성혁명을 구상하게 되었을까? 그는 당대 최고의 스승 목은 이색(李穡)의 문하로 비슷한 연배인 정몽주(鄭夢周), 김구용(金九容), 설장수(偰長壽), 그리고 연하의 하륜(河崙), 권근(權近) 등과 함께 수학하였는데 모두 신진 사대부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정도전은 성리학의 이념과 사상을 연구하면서 맹자의 성선설과 역성혁명론에도 관심을 보였다. 현실주의자였던 정도전은 부패한 고려 사회를 보면서 이상적인 성선설보다는 역성혁명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맹자》는 ‘군주는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며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먹인 다음 도덕을 교육해야 인간의 선한 품성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백성을 괴롭히는 불인한 군주는 쫓아내야 한다’는 역성혁명의 길도 열어놓았는데 정도전은 여기에 주목한 것이다.
이러한 역성혁명에 대한 그의 관심은 우선 동아시아의 시대적 변화에서 그 실마리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만 보이던 원 제국이 저물고 새로운 나라 명이 부상하는 변화를 목격하면서 그는 말기적 현상을 보이는 고려를 타파하고 명과 같은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야심 찬 혁명가의 꿈을 키워나갔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정치, 외교적 행보를 통해 보다 구체화되었다. 1375년 북원의 사신이 고려에 오자 이 사신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놓고 고려 조정에서 민감한 접전이 벌어졌다. 이때 정도전은 반원정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조정의 실세인 친원파 이인임(李仁任)은 그동안 정도전을 밉게 보고 있던 차에 이를 기회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정도전은 4년여의 유배와 유랑살이를 통하여 걸식하기도 하고 밭갈이도 하면서 민초의 참담한 밑바닥 생활을 체험한다. 유배기간 중에 ‘삼봉재(三峯齋)’를 짓고 학문과 교육에도 힘써 보았으나 권문세족들의 정도전에 대한 박해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가난한 백성들의 땅을 빼앗아 부를 누리는 권문세족의 횡포, 뇌물과 청탁의 줄서기로 벼슬이 오가는 부패한 정치, 국가 경영의 위기를 초래한 사원경제의 팽창, 망해가는 원을 섬기며 떠오르는 명을 배척하는 친원파의 어리석음, 노략질하는 왜구를 퇴치 못하는 한심한 국방력, 이 모든 것을 고려의 말기적 현상으로 진단했다.
군주의 부덕과 관료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는 일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새로운 체제의 도입과 새로운 나라의 건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유배생활이 정도전으로 하여금 역성혁명론을 정당화하는 기본적인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계를 찾아가 역성혁명을 교감하다
역성혁명을 작정한 정도전은 1383년 함흥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를 찾아간다.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성계를 직접 만나보려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30여 년간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맹장이었다.
당시 이성계는 이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고려 조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정도전은 부패를 척결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역성혁명을 해야겠는데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명성이 높고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는 이성계가 절실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의미로는 군사정변, 즉 쿠데타를 계획하고 이성계를 찾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으로 이성계를 만난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정예군대와 그의 뛰어난 지휘통솔에 감탄했고, 이성계는 정도전의 해박한 학문과 출중한 국가 경술을 높이 평가했다. 서로의 속내를 확인한 만남이었던 것이다.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제함영송수(題咸營松樹)〉 시 한 수를 지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면서 때가 되면 자신과 손잡고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적 과업을 이룰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은유적으로 드러냈고, 이성계도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에게 협력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이듬해 1384년 정도전은 개혁에 뜻을 함께하는 성절사(聖節使)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에 가서 양국 간 외교적 갈등을 해소하고, 우왕의 인준을 받아 귀국한 적이 있다. 이 정도전의 명 사행 행보는 그가 유배생활을 마치고 이성계의 후원으로 복직한 이듬해이기 때문에 이성계와의 혁명에 대한 교감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정도전은 외교사절로 명을 방문하는 기회에 새로운 나라 명의 건국과 국정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으며, 명의 대신들과도 교분을 쌓는 기회로 활용했을 것이다.
이후 정도전은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이 된다. 실제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이 짧은 시간에 수많은 국정체제에 관해 빈틈없는 방안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명의 건국 사례와 성균관에서의 성리학 연구가 그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375년 정도전이 귀양 가게 된 사연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게 되는데 친명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된다. 그는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의하면서 정몽주 등과 함께 명과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친원파 권문세족이 왕의 눈과 귀를 가린다며 비판했다. 공민왕이 홍륜 등 친원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는 이 사실을 명에 고할 것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의 실세 이인임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1375년 공민왕에 이어 우왕이 즉위하자 북원의 사신이 고려에 왔다. 사신 입국 문제를 놓고 조정에서는 신흥 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인임과 지윤 등 친원파는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 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인임 등은 북원 사신의 입국을 준비하면서 사신을 맞이할 영접사로 정도전을 지목했다. 정도전은 사신 영접을 완강히 거부했다. 강해지는 명나라를 버리고 쇠퇴해 가는 원나라와 가까이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러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고 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태조실록》 〈정도전 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북원의 사자(使者)가 국경에 이르니, 도전이 말하였다. “선왕(先王)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명나라를 섬겼으니, 지금 원나라 사자를 맞이함은 옳지 못합니다. 더구나 원나라 사자가 우리에게 죄명을 가하여 용서하고자 하니,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정도전은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 방침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이인임이 명에 사신을 보내면서 동시에 북원에서 보내온 사신을 맞이하려는 이중 외교정책에 대해 정몽주 등 10여 명과 함께 이인임을 탄핵하기도 했다. 이 일로 정도전은 이인임에 의해 나주로 유배된 것이다.
역성혁명의 단초는 위화도 회군
1387년에는 명이 철령위를 요구하였다. 철령 이북 땅이 원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원을 몰아낸 명의 소유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명은 고려 사신 설장수의 입국을 거부하였고, 귀국한 설장수는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한다”고 전하였다.
명의 철령위 요구는 명도 원과 마찬가지로 고려를 속국으로 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철령위 문제 이외에도 명은 고려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세공(歲貢)을 요구했다. 고려는 크게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 최영(崔瑩)을 중심으로 차제에 명의 전초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전쟁을 주장하는 최영 등 강경파에 대해 이성계와 정도전 등은 외교로 해결하자는 주장을 폈다. 명과 전쟁을 하기에는 고려가 역부족이라는 판단이었다.
여기서 잠시 요동 문제를 살펴보자. 요동은 남만주(南滿州) 요하(遼河)의 동쪽 지방으로 그간 한민족(韓民族)과 한족(漢族), 북방 민족 사이 치열한 쟁탈 지역이었다. 진(秦)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진의 영토가 되었다가 한조(漢朝)에서는 여기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했다. 402년에 광개토대왕에 의해 고구려의 영토가 되자 수양제(隋煬帝)와 당태종(唐太宗)이 공략하였으나 격퇴되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요동은 당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698년 발해가 요동을 경략하여 200여 년간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가 발해가 멸망하면서 거란(契丹)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후 금, 원이 지배하였다.
원-명 교체기에 명은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를 두어 요동을 포함한 만주 경략을 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려와 여러 가지 알력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고려 공민왕이 1356년 철령을 넘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가면서 요동은 명과의 외교 분쟁 지역으로 남게 된 것이다.
1388년 고려는 요동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위기 시 강경파의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우왕은 최영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최영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하여 요동으로 떠나게 하였다.
우왕이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처음 요동정벌 계획을 알리자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4불가론(四不可論)-를 들어 반대했다.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以小逆大) 2. (농번기인) 여름에 출병하는 것(夏月發兵) 3. 원정군이 나가면 왜구가 그 빈틈을 노릴 염려가 있는 것(擧國遠征, 倭乘其虛) 4. 장마철에는 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전염병 발생의 우려가 있는 것(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그러나 최영은 공격을 지시했다. 압록강까지 진군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조민수를 회유하여 전군을 회군시킨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이인임, 염흥방,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한 후 우왕을 내쫓고, 창왕을 세우면서 우왕의 측근인 최영 일파도 제거하였다. 회군은 사실상 역성혁명의 단초였다. 군사정변이 시작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결정에 정도전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이성계가 홀로 기획하여 회군을 결정했을까?
여기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당시 정도전은 외직인 남양부사로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미 혁명을 교감하고 준비해 온 정도전과 이성계가 국가 존망이 걸린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이 맞물린 상황에서 아무런 협의 없이 회군을 강행했다는 것은 더욱 믿기 어렵다. 이성계의 4대 불가론과 회군은 자타가 ‘해동 장량’이라고 했던 정도전이 기획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改革主義 정몽주와 開國主義 정도전의 인연과 악연
온건개혁파로 정도전과 대립한 정몽주. |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성공하자 정도전은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등과 함께 권문세족들에게 민감한 조세제와 토지제를 개혁해 나갔다. 이는 개인이 함부로 토지를 사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문세족들이 보유한 토지를 몰수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동문 정몽주 등과 의견이 달라지면서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서게 된다.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에서 특히 정몽주와 가까웠다. 정몽주는 고려 말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를 처음으로 시도해 불교와 유교의 사상적 차이를 지적해서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였다. 함께 성균관에서 반원개혁 분위기를 바탕으로 성리학 등 폭넓은 학문을 익히던 정도전은 정몽주의 학문적 성향을 계승해서 성리학의 이론적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정몽주는 권문세족과 외척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정도전의 생각에 동조했다. 이후 정몽주와는 오랜 친구로서 그리고 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했다. 외교적으로도 친명배원의 노선을 함께 견지하면서 원-명 교체기의 대외관계에 대처해 나갔다. 정몽주는 이성계에 대해서도 정치적 지지에 흔들림이 없었고 위화도 회군도 지지했다.
그러던 중 1389년 여주로 유배된 폐주 우왕이 이성계를 제거하려 음모한 사실이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정도전은 이성계를 설득해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의 구실을 내세워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한 후 최영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잡았다. 여기에서 개혁으로 고려를 되살려 보려고 하는 정몽주는 이성계와 정도전이 역성혁명을 꾀하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돌이킬 수 없는 정적(政敵)관계가 되고 만다.
1390년에는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며 명을 공격하려 한다고 명 태조에게 밀고하는 소위 윤이(尹彞)-이초(李初) 사건이 발생했다. 정도전은 외교사절로 명에 가서 윤-이의 주장이 무고임을 밝히고 귀국한 후, 윤-이의 배후인 스승 이색 등을 처단하자고 했다. 이 사건으로 정몽주와의 정치적 대립은 더욱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역성혁명파가 ‘이씨(李氏)가 나라를 얻는다(木子得國)’는 노래와 말을 시중에 확산시키자 정몽주의 반격은 더욱 치열해진다. 정몽주는 정도전을 제거할 목적으로 그가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하여 봉화로 유배시킨 후 그를 처형해야 된다고 강력 주장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후광으로 정도전은 1392년 귀양에서 풀려났다.
이때 명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드러눕게 되자 정몽주는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 의해 실패하게 되고 정몽주는 결국 선죽교에서 이방원에 의해 타살되고 만다. 정몽주와 정도전의 인연과 악연은 제3의 인물 이방원에 의해서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된 것이다.
위화도 회군과 역성혁명으로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정도전과 이에 맞서 고려 수호의 절개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비운의 인물 정몽주, 이들은 서로 정치적 적대관계였지만 고려를 고집했던 정몽주의 성리학 세계가 고려를 타도하고 조선을 개국했던 정도전 사상의 한 부분을 이뤘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의 백년대계를 설계한 群鷄一鶴의 재상
1392년 정도전은 새 왕조 창건을 위한 정지 작업을 단행했다. 공양왕을 끌어내리고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 조선을 창건했다.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국정을 전적으로 정도전에게 맡겼다.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되어 조선의 국정을 설계했다. 조선이 갖춰야 할 정부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 제도의 바탕을 만들고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또한 정도전은 수도 이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개경은 새 왕조의 정착에 부정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고려의 중추적 역할을 해온 귀족 계급을 허물어야 조선의 앞날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새 왕조의 도읍지로 한양이 결정된 것은 물론, 경복궁 자리와 설계에도 모두 정도전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5부 49개방(方), 경복궁의 전각, 4대문과 4소문의 이름들을 모두 그가 작명한 바 있다.
불교개혁을 통한 사회 정화도 그가 추구하는 문명개혁의 중심축이었다. 불교의 종교적 순기능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종교가 지나치게 세속화하여 국가 재정과 민생에 미치는 역기능을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대신 유교를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조세수급의 안정을 통하여 국가 재정의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입각한 과전법(科田法)을 단행하는 등 일소에 혁신하였다. 그러나 급진적이고, 일방적인 정도전의 개혁정책에 대해 점차 반발하는 세력도 늘어 갔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는 즉위 후, “중앙정부나 지방 관서, 고급 관리나 하급 관리, 그 어떤 것을 막론하고 고려 왕조에서 임명한 사람들은 하나도 파면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새 왕조의 관리로 유임시켰으며, 동시에 국호를 전대로 고려라 하고 국가의 모든 법령과 제도도 고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물론 민심의 안정을 꾀할 뿐만 아니라, 외교정책에 있어서도 전조의 사대교린 정책을 유지하여 명에 대한 외교를 신중히 다루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태조의 즉위를 알리려고 명에 갔던 조선 사신이 가지고 온 명의 문서에는 국호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 정해 회보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중국에서는 역성혁명이 일어나면 국호를 개정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고 조공국의 새 왕조 국명은 명의 승인이 필요했다. 조정의 대신들이 모여 ‘조선’과 ‘화령’이라는 두 명칭으로 국호를 압축했다. 조선은 민족사의 맥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화령은 이성계의 출생지였다.
명은 조선을 선택했는데 조선이라는 국호 결정과 관련하여 조선과 명의 생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역사와 문화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도였지만, 명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명은 단군조선이 아닌 기자조선을 의식하고 조선을 동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논어(論語)》에 등장하는 은나라의 현인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하여 백성을 교화시켰으며, 이에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하였다는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명은 조선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제후국임을 뜻한다고 인식하고 조선에 동의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은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한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論)’에 기초하고 있다.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대일통(大一統)의 중국사관이다. 명이 조선 국호를 동의할 때에도 같은 맥락의 사관에 기초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러한 중국사관이 이고위금(以古爲今)으로 ‘현재의 필요에 따라 역사를 재단’하는 현재적 편의사관이라고 지적하고, 구시대적인 역사관임을 비판하고 있다.
表箋文 사건
건국 후 정도전은 조선의 안보와 관련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국방의 기본 틀을 세우고 군사제도와 병법의 개혁을 단행해 국방력을 강화해 나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병을 공병화해 나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 말에는 정규군이 거의 없어 각 귀족과 왕족들의 사병화된 군사들이 주를 이뤘는데 정도전은 이를 국가의 정규군으로 개편시켜 나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도전이 사병혁파를 단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개국 초부터 요동정벌을 계획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1396년 조선은 명과의 외교적 분쟁에 휘말렸다. 명 태조 주원장은 조선에서 보낸 외교문서에 명을 비하하는 문구가 들어 있다고 트집 잡아 그 문서를 작성한 사람으로 정도전을 지목하여 명으로 압송하도록 요구했다. 이른바 표전문(表箋文)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표전문이란 사대교린 체제에서 소국이 대국에 올리는 예문(禮文)을 말한다. 그런데 사실 표전문은 정탁이 쓰고 정도전이 감수한 것인데 왜 명의 주원장은 정도전을 지목했을까?
조선 초 정치권력 투쟁에서 정도전과 반대 입장에 있던 이방원에게는 하륜이라는 뛰어난 책략가가 있었다. 그들은 요동정벌을 내세워 사병을 혁파하려는 정도전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로 명과 조선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자신들에게 유리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러한 와중에서 명으로 오가는 반 정도전 사신들이 정도전이 국방력을 강화해 요동정벌을 획책하려 한다고 은밀히 명 측에 전달했다.
명은 여진족의 송환 문제와 관련해 조선이 명의 요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고려 말부터 명과 원을 오가며 요동을 경략하려 했고, 조선 건국 후에는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계획하면서 국방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첩보에 접하면서 차제에 이러한 문제들을 확실히 해결하려고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명은 표전문 시비로 외교마찰을 일으켜 조선의 실권자로 부상한 정도전을 명에 압송해 붙잡아 놓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하륜과 이방원에게는 표전문 사건이 정도전의 질주를 막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결국 정도전을 명으로 보내자는 조정 여론으로 나타나면서 하륜은 정도전의 송환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정도전은 수세에 몰렸으나 조준 등의 반대로 겨우 무산되었지만 정치적 타격을 입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명의 시비는 그 다음해에도 계속되었다.
1397년 명의 사은사가 가지고 온 문서에는 정도전을 ‘조선의 화(禍)의 근원’이라고 지적하고 정도전을 해임하고 요동정벌을 중단하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태조는 정도전이 병에 걸렸다거나 나이가 많다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명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고 한때 정도전은 공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또 다른 문서를 꼬투리 잡아 조선 사신을 억류한 것이다. 여기에 조선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세공까지 명에서 압박하자 이제는 조선 내에서 강한 반명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대신들도 통렬하게 명을 규탄하고 나섰다. 정도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요동정벌을 정식으로 상주하여 태조의 허락을 받아내 강력한 군권을 쥐고, 자신이 창안한 오진도(五陣圖)와 수수도(蒐狩圖)를 바탕으로 맹훈련을 전개했다.
여기서 정도전이 개국 후 실제로 요동정벌을 계획한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정도전은 살펴본 바와 같이 일관되게 친명배원의 외교노선을 견지해 왔고, 철령위 문제에 관해서도 명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있었으며, 조선 건국과 태조의 인준을 얻기 위해 명에 대한 외교력에 집중하고 있었던 개국 초기에 정도전이 무슨 이유로 요동정벌을 계획했는지 의구심을 가질 만하다.
요동정벌 계획의 실상과 허상
오히려 국내 정치적 차원에서 자신의 신권정치에 반대하는 이방원을 비롯한 왕권파 구신들의 사병을 혁파하여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 요동수복과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등에 나타나는 요동정벌 계획에 관해서는 이 실록의 기록이 후술하는 바와 같이 태종 이방원의 지시로 하륜 등에 의해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그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된다.
일국의 창건을 주도한 그가 아직 새 왕조의 자리가 잡히기도 전에 요동정벌을 추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뒤의 사정을 고려할 때 이방원 등 왕권정치 세력이 국내 정치적 동기에서 명과 정도전의 갈등을 촉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와중에서 1398년 명의 표전문 압박 시 조선 조정대신들의 반명 기류가 현저하게 높아지자 정도전이 이러한 분위기 반전을 기회로 삼아 사병혁파를 위해 내세웠던 요동정벌의 명분(허상)을 실제로 요동경략을 추진(실상)하여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고 미진했던 이방원 등의 사병혁파를 단행하기 위해 태조에게 건의해 요동정벌을 가시화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정도전은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한 고조 유방과 그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면서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게 아니라 거꾸로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했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이 말은 자신이 태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것이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가 곧 자신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새 왕조를 건설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이방원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역성혁명의 과정에서 이성계는 호방한 기상과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재능을 갖춘 이방원을 총애했었다. 하지만 방원이 정몽주를 격살하자 실망한 이성계는 방원을 멀리하기 시작했고, 끝내 방원은 혁혁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공신의 대열에서 소외되었다. 이런 차에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내세워 재상들에 이어 왕족들의 사병까지 혁파하려 하자 왕권에 야심이 있는 이방원은 배수진을 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더 큰 문제는 세자 책봉 문제였다. 당초에 조정에서는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이 제시되었으나, 신덕왕후 강씨의 소망과 정도전의 후원으로 태조 이성계는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결국 세자 자리를 이복동생 방석에게 빼앗긴 방원은 정도전을 제거하고 자신이 권좌를 차지하겠다고 결심했다.
무인년(戊寅年·1398) 마침내 이방원은 거사했다. 남은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정도전을 찾아내 방원은 기어이 그를 살해했다. 조정을 장악한 방원은 장남 방우가 이미 사망했으므로 둘째 방과를 세자로 세웠다.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은 살해되었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제1차 왕자의 난’ ‘이방원의 난’ ‘정도전의 난’ ‘무인정사’ 등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각자의 입장에 따른 엇갈린 해석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정도전 생애의 明과 暗
조선의 개국은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정도전이 실천에 옮긴 역성혁명론의 결정체였다. 개국 초기 정도전은 신료의 권한을 강화하고 토지를 정부가 직접 관장, 배분하는 토지 공개념, 군주의 권한을 일부 축소하는 분권론에 기초한 신권정치, 각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통제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 등 기존의 정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정도전의 이러한 구상은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하여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에 기초하고 있어 근대 입헌군주제를 연상케 하는 정치체제로 ‘시대를 앞서간’ 신선한 발상이었다. 이 체제는 태종 이방원 집권 후 폐지되었다가 문종 때 부활되어 의정부 서사제(議政府 署事制)가 된다.
정도전은 당대 군계일학의 지식인이자 행동하는 혁명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인으로서 그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과 위상에 비해 인간적인 성품은 그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
《태조실록》 〈정도전 졸기〉는 “(그는)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소 왜곡된 점도 없지 않으나 그의 성격과 인간 정도전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태종 이방원은 즉위 후 정도전을 폄하하면서 의도적으로 정몽주를 높이 치켜세웠다. 또한 태종의 아들 세종은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인이었고, 세조 때 사림파가 관직에 진출하면서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은 평가 절하되고 후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 또는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되기도 했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도 정도전을 일컬어 ‘죽을 만한 일을 한 위인’이라고 비판했고, 정도전과 같은 이상을 견지했던 송시열(宋時烈)마저도 정도전 이름 앞에 ‘간신’이라는 말을 붙였다고 한다. 정도전의 위상이 그나마 복권된 것은 1865년 고종 때에 이르러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준 것이 고작이다.
이렇게 조선에서 낮은 평가를 받아오던 정도전이 오늘날 재조명되고 있다. 정도전이 여말선초의 격변기에 대단히 출중한 인물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정도전은 성정이 과격하고 온후함이 없어 빼어난 재주에 비해 덕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반골적인 기질과 단도직입적인 언행은 늘 주변과 반목, 대립했다.
그가 현실에서 추구했던 신권정치는 ‘일인지상 만인지하(一人之上 萬人之下)’의 재상을 의미했다. 그는 주변과 권력을 나누거나 화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 협력했던 정치적 동지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반목하는 관계가 되었다. 인간 정도전의 독주가 공인 정도전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두 얼굴의 정도전과 그의 생애를 반추해 보면서, ‘두 얼굴의 정치’-정치의 순기능과 역기능-는 오늘날에 와서도 하나가 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대표·前 스위스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