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을 만난 한송사 터 석조보살(寒松寺址 石造菩薩坐像, 국보 제124호)
조성된 이후 수백 년이 지나 사찰도 쇠락하고 인적도 드물어진 강릉 한송사 터의 고요하고 쓸쓸한 밤을 상상해본다. 귀뚜라미 소리와 풀벌레 소리만 조용히 울리는 밤, 마치 땅에서 솟은 듯 석조보살상이 흙에 묻혀 있었다. 사막 같은 모래사장에서 오랜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는 소나무 사이로 달빛이 드리워지고,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보살상은 달빛에 모습을 드러낸다. 보살상의 표면은 달빛을 머금고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인다.
한송사 터 석조보살좌상, 고려 10세기 백대리석, 높이 56cm 보물,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 ⓒ 문화재청/
한송사 터 석조보살좌상, 고려 10세기 백대리석, 높이 92.4cm 국보, 신수1370
높은 보관을 쓰고 작은 연꽃가지를 쥐고 앉은 이 석조보살은 원래 바닷가 한 편,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강릉시 남한진동에 위치한 한송사 옛터에 자리했던 고려시대 보살상이다. 2023년 5월 25일, 상설전시실 2층에서 새로 단장한 ‘미소에 머물다 - 국보 한송사 터 석조보살’이 공개되었다. <한송사 터 석조보살>은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된 이래 많은 관람객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번 새 단장은 강원도의 국보 <한송사 터 석조보살>을 반드시 봐야 하는 전시품으로 각인시키고, 관람객에게 오감으로 몰입하는 감상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새로 단장한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江陵 寒松寺址 石造菩薩坐像, 국보)>을 제대로 관람하기 위해서는 이 보살상이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한송사는 통일신라 후반경에 세워진 사찰로 원래 문수사(文殊寺), 문수당(文殊堂) 등으로 불렸으며 고려시대에는 문인들이 이곳을 유람하고 시와 글을 남기기도 했다. 고려시대 문인 이곡(李穀, 1298-1351)은 문수당(한송사)을 관람하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두 석상이 여기 땅속에서 위로 솟아 나왔다.”라고 묘사했다. 국립춘천박물관의 석조보살상 외에도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에 한 구의 석조보살상이 더 있는데, 이 두 상이 바로 이곡이 남긴 기록 속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다.
강릉 한송사 터/ 한송사 터에 남아 있는 사자와 코끼리 대좌
한송사가 위치했던 현 강릉 공군비행장 안에는 두 보살상을 받치던 대좌가 남아 있다. 상당 부분이 파손되었지만 당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로 존명을 판별했던 것으로 보아 사자와 코끼리 모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송사는 조선시대까지 중수가 이루어지는 등 나름의 사세를 유지했지만 19세기경 황량한 터만 남긴 채 폐사되었다. 강릉 출신 유학자 권인규(權仁圭, 1843-1899) 는 1883~1884년 한송사의 황량한 모습을 시로 묘사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삼한의 고찰로 여겨졌던 한송사를 가득 메웠던 소나무와 전각은 사라졌고, 차가운 모래 위에 두 석불만 처량하게 책상다리하고 앉아 마모되고 있었다. 한송사의 쇠락만큼 보살상에게도 고난의 시간이 찾아왔다.
고요하고 쓸쓸하게 옛 절터를 지키던 석상 중 한 구는 어느 순간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채 인근 칠성암으로 옮겨졌다. 완전하지 않았음에도 상이 가진 아름다움에 반한 이들의 욕심 때문에 1912년 보살상은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1965년이 되어서야 한일협정에 따라 반환되어 국립춘천박물관에 자리하게 되었다. 보살상의 목 부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굴곡진 역사의 흔적이 보인다.
불교미술사에서 바라보았을 때 <한송사 터 석조보살상>은 고려 초 강원도 지역에서 유행했던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조각으로 꼽힌다. 보살이 쓴 높은 원통형 보관은 중국 요나라 불교조각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면서, 인근 강릉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江陵神福寺址石造菩薩坐像, 보물)>이나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平昌 月精寺 八角九層石塔, 국보)> 앞에 자리한 석조보살상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강릉 신복사 터 석조보살좌상, 고려 높이 121cm, 보물 ⓒ 문화재청/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고려 높이 180cm, 국보, 월정사 ⓒ 월정사성보박물관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江陵 神福寺址 石造菩薩坐像. 보물 제84호) 과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江陵 神福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87호) ⓒ 이영일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平昌 月精寺 石造菩薩坐像, 국보 제48-2호)은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平昌 月精寺 八角九層石塔, 국보 제48호)을 향해서 정중하게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다리를 세워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탑을 향해 무엇인가 공양을 올리는 자세를 갖추고 있는 점에서, 원래부터 탑과 공양보살상은 한 세트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높이 1.8m이다. ⓒ 고앵자
최순우(崔淳雨, 1916-1984)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 보살상이 가진 풍만한 얼굴과 이에 대비되는 조그마한 입 언저리에 풍기는 미소를 보고 이 시대 강릉 지역의 석조보살상이 지닌 공통적인 감각으로 설명했다.
한송사 터에 자리했던 보살상은 모두 두 점이지만, 지금까지 국립춘천박물관의 석조보살이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로 여겨졌다. 보살이 연꽃가지를 들고 있고 향좌측을 향해 몸이 살짝 틀어져 있기 때문이다. 중심을 향해 몸을 튼 모습이라고 본다면 이 보살상은 향우측에 봉안되어야 한다. 현재 한송사 터에 있는 대좌 중 한 대좌에는 동물 앞다리로 추정되는 부분이 일부 남아 있다. 이 다리도 정면에서 봤을 때 향좌측을 향하고 있다. 보살상과 대좌의 방향성으로 보아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된 석조보살은 부처의 향우측에 봉안되는 문수보살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보현보살이 연꽃을 드는 경우도 종종 있고 보살상 몸에 나타난 방향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석조보살이 문수보살이라도 완전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한송사 터 석조보살>은 한때 번잡한 사찰의 중앙에도 자리했었고, 모두가 떠나간 뒤 퍼석한 모래 위에서 바다의 파도소리와 솔바람 소리를 위안 삼으며 고요히 긴 시간을 지켰다. 조성될 때부터 간직했던 강원 특유의 인자한 미소는 바다 건너 외국에도 다녀왔고 다시 돌아와 마침내 강원의 공간에 머물게 되었다. 이 보살상이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맞다면, 보살이 머금은 인자한 미소는 지혜의 미소가 될 터이다. 새로 단장한 전시 공간에서는 <한송사 터 석조보살>이 가진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 관람객이 보살의 미소에 오래 머무르고 공감하고 싶도록 여러 요소가 활용되었다.
전시 공간의 핵심은 음향과 조명이다. 시각적 요소가 절제된 공간 속에서 작곡가 카입(Kayip)의 곡이 퍼지면 관람객은 국보 보살상의 뛰어난 조형성에 빠져들게 된다. 전시 공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가만히 듣다 보면 강릉 앞바다에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 소나무 사이로 바닷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따뜻한 봄 작은 새가 잠시 곁에 머무는 소리, 한여름 밤에 보살상을 적시는 빗소리, 가을밤 귀뚜라미와 풀벌레가 우는 소리, 고요한 겨울 저녁 소복소복 눈이 쌓이는 소리도 지나간다. 오랜 시간 보살상의 쓸쓸한 모습을 위로했던 자연의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음향을 듣다 보면 가슴 속에 묘한 울림이 일어난다.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안타까운 시간일 수 있으나 깨달음을 구하는 지혜의 보살에게는 그저 한순간일 뿐이다. 카입의 곡은 <한송사 터 석조보살>이 겪은 모든 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음악과 더불어 빛도 국보 <한송사 터 석조보살>을 새롭게 마주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관람객은 전시 공간에 머물며 마치 달빛을 머금은 것 같은 보살의 미소에 집중하게 된다. 보살을 비추는 조명의 방향과 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변화한다. 전시 공간에 구현된 빛의 변화는 보살상이 견뎠을 기나긴 밤의 시간에 착안해서 구현되었다. 비를 머금은 구름이 가득한 밤에는 습기 찬 노란 달빛만 보살상의 표면에 닿았을 것이다. 구름이 더욱 짙어져 달이 보이지 않게 된 날에는 보살상의 어깨에 흐릿한 빛 한 조각만 비쳤을 테다.
때때로 환한 보름달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날에는 보살상이 가진 흰 대리석이 더욱 반짝였을 것이다. 전시실에 구현된 빛의 변화로 인해 보살의 미소는 때로 온화해 보이고, 한편으로는 그 새하얀 달빛만큼 짙어진다. 빛과 음악, 오감으로 몰입하게 된 보살의 미소는 공간에 머무는 이들에게 새로운 감상 경험과 공감을 제공한다.
<한송사 터 석조보살>은 터에 남아 있는 대좌를 바탕으로 복원한 사자대좌의 연꽃 위에 앉아 있다. 이 보살상을 사랑하는 누군가 새로 단장한 전시 공간을 보고 말했다. 보살이 달빛을 머금어 모습을 드러냈고, 복원된 사자는 진실한 보살의 미소에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달빛 속에 숨었다고. 인자한 미소와 순백의 아름다움에 잠시 머물며 처음 상상 속에서 떠올린 달빛 가득한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미소에 머물다-한송사 터 석조보살
"반쯤 뜬 두 눈이 아래를 굽어보는
부드럽고도 다소곳한 표정...
조그마한 입 언저리에서 풍기는
미소짓는 인자한 모습"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1916-1984),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국립 춘천박물관 전시정보(상설전시실 - 2023.5.25.~), 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석조보살상에 조용하고 온화한 미소,
그에 얽힌 역사적 배경까지 잘 감상하고,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