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도 모르고 따라가는 기철을 데리고 경숙의 집에 도착한 어부 아저씨는 불문곡직하고 잠긴 문을 연장으로 딴다.
문이 따지자 경숙의 방으로 달려가 방문을 연 아저씨는 망연히 서 버린다.
아저씨를 따라 들어간 기철은 기절할 것 같이 놀란다.
이부자리 위에 반듯하게 누워있는 경숙의 입에서는 한 줄기 피가 흘려내려 있고 그 옆에는 마개가 열린 농약병이 빈 병인 체로 놓여있다.
경숙이 자살을 한 것이다.
기철이 뛰어 들어가 경숙을 안고 흔들며 몸부림을 치지만 경숙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경숙을 안고
“왜? 왜? 왜?”을 외치는 기철의 가슴은 무너져 메어지는 것 같다.
자기가 한 여자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생각에
자기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니 자기가 경숙에게 접근하지 않았다면
아니 자기가 경숙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후회가 해일처럼 달려든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어버린 것
기철은 회한의 눈물을 끝 질 줄을 모른다.
어부 아저씨가 달래어 겨우 진정한 기철은 경숙의 머리맡에 곱게 접어놓은 유서를 발견한다.
유서를 읽는 기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비 오듯 한다.
「죄송해요. 기철씨!」
유서는 그렇게 시작된다.
「다시 나타나지 않는 나를 찾아온 기철씨가 어쩜 이 편지를 보리라고 생각하고 몇 자 적습니다.
내 행동을 보고 또 이 글을 읽으며 황당해할 기철씨를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뿐이에요.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 방법뿐이 없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기철씨를 떠나갑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경숙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죽은 남편을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까지 사랑하고 원하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고 경숙은 생각해요.
그러나 너무나 가혹한 운명이었죠.
당신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한 가정에 가장이고 나는 남편을 잃은 과부!
누구나 말하기 좋아하는 우리는 불륜의 한 가운데죠
그래서 당신을 잊으려고 했지만, 당신을 떠나면 나는 또다시 혼자서 암흑 속을 헤매야 하고 당신 없는 그런 속에서 나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 당신을 떠나보내는 방법으로 이 방법을 택했어요.
당신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 당신의 차고 넘치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갑니다.
나를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그리고 이제 내가 당신의 우울증까지 가지고 갈 터이니 집으로 돌아가셔서 영희씨와 아이들에게 전보다 더 잘하시며 행복한 가정 이루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가게와 내게 남은 모든 재산은 정리하여 어부 아저씨께 전해주세요.
죽으면서까지 당신에게 짐을 드립니다.
안녕하고 부디 행복하세요.」
짧으면서 간결한 유서다.
유서를 다 읽고 기철은
“바보! 바보! 왜 당신이 죽어. 정말! 이 방법밖에 없었단 말이야?”
하며 울었다.
유서를 본 어부 아저씨도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다.
덧없이 죽어간 두 젊은 사람들, 특히 10여 년을 죽은 남편을 생각하며 수절하고 살던 막내 누이 같은 경숙이 못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불륜이라는 이유로 죽음을 택한 것이 너무나 애처로워서다.
기철은 경숙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
‘무엇 때문에 죽었는가?’
‘다른 사람들이 불륜이라고 흉보는 것이 무서워서 죽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처음부터 시작을 말아야 하지 않았는가?’
‘처음에는 감정의 흐름을 막지 못했다가 언제 정신 차려보니 자기의 입장이 변명할 수 없는 경우가 된 것이 무서웠었나?’
‘그렇다고 죽는단 말인가 나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아니면 나중에라도 내가 자기를 버리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나?’
‘말로는 서로에게 충실하자고 하고서는 경숙이 나를 믿지 못한 것인가?’
‘그렇게 나의 말과 행동에 신의가 없었나?’
‘이제 나는 어쩌란 말인가?’
말 없는 경숙의 영정을 보며 기철은 많은 생각이 뇌리를 지나간다.
그리고 허탈에 빠진다.
아니 그동안 거의 잊고 있던 우울증의 증상이 심해지며 모든 것이 귀찮고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 장례 예식장에 모여드는 사람도 피하게 된다.
어부 아저씨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장례를 치렀다.
어부 아저씨가 없었으면 장례도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기철이 모든 것이 하찮은 것 같고 그런 것을 해서 무엇 하나 하는 생각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대부분 넋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례는 초라했다.
이미 죽은 철수는 고아나 다름없었고 경숙의 부모도 딸 장례에 참석 못 했다.
경숙이 고향을 떠나온 후로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부모님께 떳떳해지기 전에는 소식을 전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던 관계로 전라도에 계신 부모님과 연락을 끊고 살아 경숙의 부모님에게는 경숙의 부음을 알릴 길이 없다.
아니 동네 사람들은 경숙이 고아인 줄 안다.
살았을 때 동네 사람들이 가끔 고향을 물으면 경숙은 씁쓸한 미소만 지었기 때문에 경숙에게 고향을 물어보는 것이 동네에서는 금기가 되었다.
그래서 이웃 사람 몇 명이 자리를 같이하는 아주 간소한 장례가 됐다.
동네 사람들은 남편이 사망한 후 10년을 혼자 살던 여자가 갑자기 죽고 생판 모르는 어떤 남자가 나타나 장례를 치르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 어떻게 된 것이냐 하고 쑤군거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부 아저씨 같은 사람은 진심으로 경숙의 죽음을 슬퍼했다.
장례를 치르고 어부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경숙의 유언대로 재산을 정리하여 어부 아저씨에게 주었지만, 어부 아저씨는 ‘내가 그 불쌍한 여자의 돈을 어떻게 받느냐 내가 그 돈을 받으면 나는 천벌을 받는다.’라고 하며 완강히 거부한다.
그래서 다시 어부 아저씨와 상의하여 강릉에 어느 고등학교에 경숙의 이름으로 장학금으로 기증했다.
그것이 중앙일간지에 미담으로 소개되며 후일에 경숙의 부모가 경숙을 찾는 빌미가 된다.
경숙의 장례를 다 치르고 난 후 그 충격으로 기철의 우울증은 급속도로 나빠지며 다시 00도로 건설현장 사고 시 사망한 사람들의 환영이 어른거린다.
경숙이 죽음으로 다시 마음이 허해진 까닭이다.
그러면서 깊어지는 우울증
어부 아저씨의 도움으로 어렵게 강릉에서 할 일을 모두 끝내고 “자네가 지금 여기를 떠나면 어디로 갈텐가?”하며 붙잡는 어부 아저씨의 손을 뿌리치고 강릉을 떠난 기철은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을 한다.
수중에는 아직 얼마간의 돈이 있다.
경숙이 호텔에서 죽음을 결심하고 집으로 가던 날 그동안의 호텔 비용을 모두 계산하고 가서 기철이 첵크아웃 할 때는 돈이 별로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간의 돈이 있다는 것이 아직 죽음을 결심을 늦추는 동기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치사량의 수면제를 사기 위해 시간이 연장되는 것인지 기철은 그 사유를 인식하지 못하며 방랑 생활을 한다.
그렇게 다니다가 영월에서 우연한 기회에 얼음골에 한적한 절이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사람들이 거의 없는 한적한 곳이라는 말보다 얼음골이라는 단어가 기철에게 매력으로 다가온다.
한겨울에 얼음골은 어쩐지 자기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얼음골을 찾아 들었다.
듣던 대로 한적한 곳이다
주지승과 스님 하나 불목하니 한 사람 세 사람이 전부인 절이 마음에 들어 10여 일간 머문다.
얼음골에 머물며 자기의 한평생을 돌아본다.
누구나 영욕이 같이 하는 한 세월
기철은 자기의 한평생이 영보다는 욕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즐거웠던 생각은 안 나고 자기를 우울증으로 몰아간 사건들만 선명하게 뇌리에 남기 때문이다.
떠돌이 생활을 하며 가끔 영희와 자식들 생각을 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영희에게 연락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영희에게 외국 여행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강릉으로 와서 경숙과 그런 사랑을 하고 나서 영희에게로 돌아갈 용기도 없고 그런 염치없는 짓도 하기 싫고 또한 영희에 알리면 자기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고 그러면 자기를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행적이 알려져 까심 꺼리가 될 뿐, 그렇게 되면 가족들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내가 강릉으로 오면서 휴게소에서 나의 모든 신분증을 버렸을 때 이미 나는 나의 가족을 내가 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낮으로 하는 생각도 떠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기철의 생각은 한 곳으로만 흐른다.
경숙을 그리는 생각
얼음골에서 있는 동안 짧은 기간 자기를 뜨겁게 사랑하고 자기로 인해 세상을 하직한 경숙이 생각에 짙게 묻힌다.
그녀의 눈, 코, 입, 귀,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떠오른다.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져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는다.
빈 공간만 만져지는 허공에, 하지만 기철은 정말 환하게 웃고 있는 경숙을 만지고 쓰다듬고 있다고 느끼고 때로는 보듬고 있는 자기를 느낀다. 그러다 보면 점점 더 경숙이 그립고 경숙이 하늘나라에서 자기를 부르며 기다리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든다.
점점 더 많은 경숙의 환상을 보며 점점 더 깊은 죽음에 유혹에 빠지다 마침내 경숙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산사를 나와 눈 덮인 뒷산으로 올라가 적당한 곳을 골라 자리를 잡고 그동안 사 모은 수면제를 다 털어 넣고 눈앞에 아롱거리는 경숙의 모습을 따라 한 많은 세상과 하직을 한 것이다.
참으로 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전장에서 기철은 승리한 것인가 패배한 것인가?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성공하고 행복한 가정도 가져보고 진한 사랑도 하여 보았으니 성공한 것인가?
결과적으로 범죄자가 되고 우울증을 앓고 그로 인해 가정을 버리고 자살을 택하였으니 패배한 것인가?
- 끝 -
그동안 졸작을 애독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혹 기회가 되면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