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수군절도사, 전라병마 절도사, 경상좌도병마사, 삼척영장
철비 명문풀이
병사의 치적이 남쪽 천하에 드러나니
굶주림과 병든 것은 모두 되살아 나네
병사로서 법대로 임무를 다하니
그 은혜는 세상에 높이 솟았구나
풀이 이희득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필경(弼卿), 호는 운암(雲巖)이다. (1656~1724) 묘비는 1725년에 세웠다.
철비를 조사 하던 중에 알게 된 장한상 장군은 숙종때의 무장이었다. 고향은 의성 비안 출신이며,한량으로 무재가 있어
벼슬길에 나아 갔는데 무관직으로 전국의 요처에서 근무를 하였다.
장한상의 철비는 강진 병영성에 있는데 남아 있는 유일한 장한상의 선정비이다.
다른 곳에서도 있을 수 있으나 현재까지는 찾지 못 하였다.
장한상은 경상좌병영이 있는 울산에서도 좌병사로 벼슬살이를 하였기에 자료 조사차 의성에 있는 무덤을 찾아
가기로 하였으나 검색에는 보이지 않아 의성문화원장께 부탁을 드렸더니 순천장씨 문중의 어르신과 사무국장 그리고
의성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이신 김정중 선생과 함께 찾아 보시라 하여서 12월12일날 의성 비안면에서 합류하여서
장한상 병사의 묘를 찾아 갔다.
장한상의 묘를 아시는 분은 한 분이지만 연세가 있어서 기억이 흐려진 탓에 조금 헤매긴 했지만 찾았다.
묘역은 넓고 경사는 약간이고 아래에는 조그마한 웅덩이가 있다
묘 봉분은 둘레석이 보이지만 약간 무너져 내렸으며 정면에는 묘비가 있고 그 앞 좌우에는 아름다운 망주석이 2기가 있다.
묘비는 앞뒤로 운문으로 되어 있고 비양과 비음에는 많은 글이 있지만 이끼로 인해 비음은 흐리고 비양은 글이 뚜렷하다.
장한상의 업적은 무장으로 많은 치적을 남겼지만 울릉도에 관한 기록이 최고로 여겨진다.
삼척영장으로 재임시 일주일 간 울릉도를 가서 조사를 하여 정부에 보고 하였는데 안용복 사건이후 1년이 후에
보고된 것이지만 국가차원에서 울릉도를 조사한 것은 처음이고 고종 때 어명으로 이유원이 울릉도를 조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으로 사료된다.
비양에는 비면에 좁은데 비해 많은 글을 새겼다. 보존 차원에서 옮기고 새로 하였으면 한다.
여기서 주목 할 것은 장한상이 울릉도를 가서 조사 한 것은 국가에 보고하고 그이 문집에도 기록을 남겼다.
장한상이 직접 쓴 문집에는 울릉도에 관한 글 에는
독도를 언급한 글이 보여 지금 한일 간 독도 문제를 두고 많은 이야기 나오고 있는데 독도가 우리 땅임을 알리는 자료로 충분하다고 보아진다.
책은 그를 모시는 경덕사에 있었는데 현재는 조문국 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으며 조선 중후기의 깊이 있는 자료가 많이 있는 것으로 알려 졌다.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정부 차원에서 기록된 것과 개인 문집에 언급된 내용이 있기에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연구를 거듭하고
많이 알려 지기를 바란다.
장한상은 경상도 좌병사를 지냈기에 필자가 묘소를 찾아가고 철비를 조사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인물이지만
게속 파고 들 수록 많은 정보를 알게 되고 장한상의 부친 또한 병마사를 지냈기에 대표적 무인 집안 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인물은 많은 홍보를 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러한 유명 인물의 묘소가 덜 알려졌는데 지금이라도 평가를 높이 하고 기념관이나
묘소로 가는 안내판을 만들고 묘비를 탁본하여 글자가 마모가 되어도 알 수 있게 하였으면 한다.
조선 중 후기에는 많은 무인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왜구들이 평가한 말은 장한상 같은 인물이 3명만
더 있으면 대국(중국) 함부로 넘보지 않았을 터이다 라는 말이 나돌 정도이니 국내의 평가보다 나라 밖에서
더 알아주던 인물이기에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12일날 장한상 묘 찾는데 함께 하신 분께 감사의 글을 전하며
우리가 몰랐던 장한상에 대하여 많은 자료를 발굴하고 이름대로 장한 賞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2020년 12월12일 토 길 떠나는 답사 객
옥산 이 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