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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제 3 수행편 – 제 2장 정기훈련과 상시훈련
제 2절 상시 훈련법(常時訓練法)
2. 교당 내왕시 주의 사항 4~6조
I. 들어가며
오늘 상시 훈련법 다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대종사님은 대각을 하시고 나서 어떻게 고통 속에 사는 중생들을 낙원으로 인도할까? 하는 생각과 시대성을 바라보니 물질이 발달하는데 정신이 개벽되지 않으면 정말 노예 생활 하겠다는 생각이 드셨죠. 그 방법으로는 신앙이 있는데 사은사요 인과보응 신앙이고 수행 즉 훈련은 삼학팔조의 훈련으로 해야겠다. 그래서 일체 생령을 낙원의 세계로 행복의 세계로 안내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회상을 열으시고 고생을 하시고 그것을 위해서 제자들을 교육시키고 교당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풀어버리면 9개 강령으로 말하면 일상수행의 요법이다. 즉 삼학팔조 사은사요죠. 일상 수행의 요법 1,2,3조는 삼학이고 팔조가 4조 사은이 5조 사요가 6,7,8,9조 삼학팔조를 강령지어서 세우고 제거하고 돌리자. 실생활 속에서 연결이 되려면 반복훈련이 필요하다. 반복훈련을 통해서 실제로 기질 변화가 되고 체험이 되고 응용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관념이나 이론, 생각에 멈추지 않고 내 삶에 적용 시키려면 훈련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훈련법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정기훈련, 상시훈련입니다.
1. 정기훈련 - 삼학을 11과목 나눈 것. 法 저축 삼대력, 수양, 연구, 재료
과거 불교의 선 만 하는 훈련도 있고 강연 경전만 하는 염불만 하는 그런 것이 있는데
원불교는 삼학을 11과목으로 법의 훈련으로서 저축 삼대력으로서 정시훈련입니다. 수양연구가 주체입니다.
상시 - 自力
2. 상시훈련 -
(수행, 動, 活用, 취사) 교당 - 他力
상시훈련은 정기훈련을 도와주고 정기훈련의 재료가 됩니다. 상시훈련은 또 상시응용주의사항과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으로 나뉩니다.
훈련법 – 처음에 교당을 오게 되죠. 법명을 받고 입교식을 하고 계문을 받고 사종의무를 부여받아요. 그렇게 하다가 집에 가서 상시에 하나씩 실행 해보지만 잘 안 되죠. 그러면 교당 와서 다시 묻고 배우고 묻고 배우고 합니다. 그러다가 정기훈련장으로 가서 11과목의 법을 제대로 배웁니다. 정기훈련을 가면 - 교당에 와서는 있어봤자 두 세 시간이죠- 상시에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대개 나사가 많이 풀어져 생활하죠? 제가 공부방을 중간에 하는 줄 아십니까? 교당에도 정례법회와 공부방이 있습니다. 법회는 知情意三方面 지정의삼방면에 정과 의로서 한 주일을 반조해보고 동지 간에 의견교환하고 의심을 생활 속에서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知(지)즉 교리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하면 법회가 사교 모임이 됩니다. 나중에는 법회에 왔다갔다 주사 한방 맞고 가는, 근원적 내안의 삶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설법을 듣고 단순히 기분이 좋았다든지 힐링이 되는 정도라든지 법문을 잘하고 못하고를 평가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상대를 평가만 하는 간택심, 계교심을 내면서 다니면 귀만 여래부처님 입만 여래부처님이 됩니다. 내 마음속에 내 생활 속에 육근으로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상시와 교당내왕을 하다가 정기훈련을 가게 됩니다. 동, 하 정기훈련을 가는데 어떤 교도가 교무님 왜 훈련을 두 번이나 가세요? 다른 교당은 1박만 가는데 왜 교무님은 2박을 가세요? 이렇게 따지고 들기도 했습니다. 어떤 교도는 이를 거부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훈련을 나보니 제가 처음에 교무 되서는 종교는 자기 생활에 도움을 주어야 하니까 교도들 시간을 많이 뺏으면 안되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설법도 짧고 굵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교화를 하다 보니 묘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교당에 오는 시간이 짧은 사람일수록 강급하고 오는 시간이 많을수록 진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원남교당에 근무했을 때 서울대병원이 바로 뒤에 있어서 간호사가 교당에 다녔습니다. 김인진교우가 간호사였는데 교당에 정말 자주 왔습니다. 자다가 일어나서 교무님 선하겠지?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고 하고 교당 와서 묻기도 하고 시비이해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때는 청년이 많지 않아서 문답감정을 있는대로 다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친구 한 명이 소개 소개로 데리고 온 사람이 열 한명이었는데 간호사만 11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간호사 사정을 잘 압니다.(웃음) 거기서 가만히 보니까 자주 온 사람이 신심이나고 즐겁게 생활합디다. 그래서 제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사회학을 공부해보면 나옵니다. 삼성이 그렇게 유명한데 왜 자꾸 광고를 하냐하면 접하면 접할수록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기운이 통하고 정이통해서 친숙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회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 한 주 잘 살아 봐야지 때를 씻고 부처님 법으로 나도 성불제중 해보겠다, 가족들도 교화해보겠다, 하고 용기 있게 바로 가서 집에 가자마자 동생이랑 싸우고 그런답니다. 이게 약발이 며칠 안 가는 거에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은 법회를 보고 지정의삼방면에 대중이 모였을 때는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없어요. 법회 때는 쉽게 합니다. 처음 온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죠. 그렇다고 얕은 수준으로만 할 것인가. 그래서 지적으로 보완해 줘야 겠다 생각해서 공부방을 열게 된 것입니다. 주 중간에 넣은 것도 나사가 풀렸으니, 태엽이 조여지는 효과를 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원남에 첫 발령 받아서 공부방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서 26명 출가시켰습니다. 공부방을 통해서 나왔습니다. 교화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교도님들이 참으로 좋아하십니다. 저도 참 좋습니다. 배우는 것이 가르치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이 배우는 것입니다. 원불교를 인연으로 다니는 사람 무늬로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공부하지 않은 교도는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알면 알수록 재미가 있어지고 진진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좋으면 출가 했겠습니까? 이렇게 좋은 것을 여러분께 권하지 않고 여러분은 출가로서 재미를 같이 느끼며 공부하자는 겁니다. 저는 제 목숨을 바칠 만큼 이 공부가 좋습니다. 그런데 어렵다 어쩌다 하면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공부방을 하면 다 좋아 할 줄 알았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인연 따라 다르고 관심이 다르고 성격, 습관, 업력 따라 다릅니다. 가지가지에요. 정기훈련을 한 번씩 가면 대종사님 당대에는 동, 하 3개월씩 했습니다. 그 당시 최대의 소원이 돈을 모아서 훈련을 가는 것이 제일 큰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 훈련을 못 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유일학림 1,2,3기를 보면 돈이 없는 사람은 1기생이 못되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가고 싶은데 못간 사람이 있다니까요. 지금은 가려고만 하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대종사님 당대에 정기훈련을 3개월 하고 나면 일자무식인 사람도 아침에는 수양시간을 갖고 점심에는 경전공부, 문답시간, 오후에는 작업하고 저녁에는 염불, 강연, 회화, 의두 이렇게 하다 보니 3개월이 지나면 일자무식인 사람도 성리가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3개월 훈련 나고 교무 발령이 바로 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해서 출가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대종사님 당대에 대종사님을 한 번 보고 출가 한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공부해서 출가자가 나온 것입니다. 공부해서 주인이 나온 것입니다. 3개월 하고 나면 기운이 달라지고 얼굴이 달라집니다. 일주일 출가여행을 가도 일주일 제대로만 하면 전부다 선의 진경, 단전호흡이 되고 이것이 진경인가? 하는 맛을 반 이상이 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정기훈련을 우리는 이틀 가는데 되려다 말아버립니다. 밥이 되려다 만 꼴입니다. 정기훈련은 가면 법의 훈련이라고 좌선을 하면서 ‘아 이런 거구나, 염불하고 이런 맛이 있었구나’, 법회를 본다는 것은 막상 보면 듣고 의견 교환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자기가 하다보면 의문이 생깁니다. 법회 때 이렇게 해보니까 의문이 생기네? 그러면 법회에 가져오면 문답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법의 깊이 있는 재미를 수양의 재미를 집에서 하면 좋지만 막상 집에서 잘 안합니다. 그러니까 정기훈련 때 법의 기초를 제대로 배워 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떤 식이 되었냐면 2박3일을 가니까 이런 맛보기구나 하는 정도 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3개월씩 하게 되니 맛을 아예 느끼는 것입니다. 기질이 바뀌어버립니다. 대종사님께서 직접 일기도 갑,을,병,정 점수 매겨 주시고 감정해주셨습니다. 원불교 훈련법은 서로서로 훈련법입니다. 혼자 100년 수행하는 것 보다 10명 몇 십 명이 함께 몇 년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함께하면서 성장하고 경계 속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절대 혼자 살아갈 수도 성장 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구나 현대 사회는 動시대라 더 그렇습니다. 교당에 법회만 오니 - 그것도 일 있으면 빠지죠- 그것도 제시간에 안 오고 늦게 오고 설렁설렁 다니니 상시에 적용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훈련을 가냐고 말합니다. 내 입장에서는 어떻게 훈련을 빠질 수있지? 이렇게 좋은 것을 왜 빠지냐는 것입니다. 정 반대죠.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그렇게 달라집니다.
지난주에 교당 내왕시 1,2,3조를 했는데 여기에 상시응용주의사항을 다시 보고가게 되면 상시응용주의사항 1조가 핵심인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할 것이니라.’ 이것을 도와주기위한 연구 2조 ‘미리연마’, ‘사리연구 기초를 형성하게 해주는 경전, 법규 연습’ 그리고 이것을 내 것화 하는 ‘의두 연마’, 다섯 번째 ‘수양으로서 내가 정리’하고 여섯 번째로 ‘일기를 통해 점검’ 하는 이 1,2,3,4,5조까지 한 것을 점검하는 것이 상시응용주의사항 6조입니다. 점검해서 결국 육조를 잘 하자는 것이고, 육조를 잘 하려면 결국 타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1조를 잘 하기 위해서는 다시 타력이 필요합니다. 즉 지난 시간에 했던 상시응용주의사항으로 공부하는 중 문답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수평적으로 문답하라는 것입니다. 동지 간에 묻고 단회 때 물어봐라. 정보교환도 하고 물어보려면 궁금한 것 한 주간 살면서 느꼈던 것을 가져와서 같이 해야 합니다. 그 다음, 2,3조는 수직적 구조입니다. 교무님께 스승님께 지도인에게 하는 것 단장 교무님 감정 해오 얻어가는 것입니다. 과거의 신앙은 수평적 구조가 없어요. 동지들 간에 없습니다. 불교 가보세요. 동지들 간에 서로 말 안합니다. 주로 법당에 묵언이라고 써있죠. 원불교는 1조부터 말해라, 문답해라 수평적으로, 2,3조는 수직적으로 보고하고 제출하고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4조는 전문적으로 정기훈련하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II. 교당 내왕시 주의 사항 4조
오늘 할 4조 읽어 봅시다.
4조. 매년 선기(禪期)에는 선비(禪費)를 미리 준비하여 가지고 선원에 입선하여 전문 공부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매년 선기 저희 교당은 선기가 언제 있느냐면 총 세 번 있습니다. 여름 훈련, 겨울 훈련, 1월 둘 째 주에 출가여행. 이것도 제가 다 연마해서 일정을 정해 놓은 것입니다.
청년들은 3월 개학하기 전주에 겨울 훈련을 합니다. 8월 첫 째주에 휴가를 가니까 둘 째주에 여름 훈련을 미리 예약해 놓습니다. 일반은 7월 마지막 주, 겨울 훈련은 3월 둘째 주에 합니다. 출가여행은 1월 둘째 주로 딱 정해져 있습니다. 현정교우를 예로 들었지만 현정교우가 직장에서 상사를 삶아서 ‘이때는 꼭 비워야 합니다’ 하고, 미리 확보를 해 놓습니다. 원불교를 만나서 여러 가지 행복이 있는데 그중에 행복이 훈련 나면서 느끼는 흐르는 눈물, 수양의 재미, 참회, 이 재미가 정말 말 할 수 없습니다. 제가 훈련 장소도 출가여행의 경우, 영산, 익산, 변산을 돌아가면서 하다가 제일 괜찮은 곳으로 변산을 정했습니다. 변산은 성리 법문도 많이 했던 곳이고 산도 좋고 외부 경계도 좋아서 계속 변산에서 하고 있습니다. 식사까지 다 조절해서 하고 있습니다. 출가여행을 선착순으로 하고 있습니다. 미리 신청한 사람들이 현재 20명 있습니다.
선비를 미리 준비하여가지고라는 부분이 있죠. 대종사님이 째째하게 돈 이야기를 해놓은 걸까요? 돈 안 낼까봐 써 놓으셨을까요? 미리준비 차원입니다. 선비를 미리 준비하라는 말은 훈련에 대한 준비를 미리 해라 비용도 준비를 해라 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어떤가요? 정말 신심이 없는 사람은 훈련비 없어서 못 간다는 소리를 많이 합니다. 요새는 시간이 없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선비를 미리 준비하여’라는 말은 시간도 확보 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선원에 입선하여 전문공부하기를 주의하라. 훈련 갔는데 토플 시험 본다고 합니다. 미리준비가 안 되어있다는 얘기죠. 법의 가치에 대해 잘 모르는 것입니다. 전문공부하라는 소리는 특별 정진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풀어진 나사를 다시 조이고 무뎌진 칼을 다시 갈아라. 하는 의미입니다. 훈련 끝나고 해제식 할 때 반수가 울었습니다. 그 울음이 뭐냐? 참회의 울음, 기쁨의 울음, 다짐의 울음입니다. 나도 많이 울었습니다. 참 기쁜 순간이거든요. 훈련 끝나고 나면 마음의 도심이 살아있습니다. 법회를 보고 나도 주인을 원망했던 사람이 사실은 본인을 되돌아봅니다. 훈련을 나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원망 생활 했던 사람이 원망 생활이 많이 줄어듭니다. 내가 객관화 됩니다. 내가 맑아지고 인과의 이치를 영생의 이치를 배웁니다. 업이 녹아나서 본심 도심이 살아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특별 정진 기간으로 한 번 씩은 깊이 있게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대산종사님께서도 원불교에서 제대로 훈련 난 한사람하고 타종교인 100명하고 안 바꾼다하셨습니다. 왜? 원불교 11과목으로 제대로 훈련나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때 감정을 자극하고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들은 11과목으로 훈련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11과목으로 훈련하는 교당이 많이 없습니다. 말은 훈련인데 MT인 경우도 있습니다. 전농에 있을 때는 법회 끝나고 나면 원남도 마찬가지였는데 법회 때 안 나타나고 법회 끝나고 술집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결혼 하고 직장 잡으면 원불교를 떠나는 구나 느꼈습니다. 그래서 공부방을 시작한 것입니다. 원불교는 많이 다녔는데 원불교 법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법회도 제대로 대종사님이 생각하는 법회로서 진행이 되어야 하고 집에서도 상시응용주의사항으로 생활해야 하고 훈련장에 가서는 11과목으로 해야 합니다. 저는 훈련 갈 때는 일원상과 스승님이 있는 곳으로 가고 엠티는 그렇게 안 합니다. 훈련은 훈련이고 MT가면 즐겁게 노는 것입니다. 어중간히 섞어서 죽도 밥도 아닌 그렇게 해서는 발전이 안 됩니다. 달걀 가만히 놔두면 부화 안됩니다. 부화기 넣어 놓든가 어미 닭이 품든가 그렇죠? 중생은 훈련을 나야 합니다. 마치 달걀이 부화기에 들어가고 어미 닭이 품어야 하듯이 훈련을 통해서 중생이 불보살이 됩니다.
훈련을 하고 나면 그 약발이 상당히 오래 갑니다. 저도 일주일 교무훈련을 가잖아요. 제일 행복한 시간입니다. 훈련 나고 나면 교당 오고 싶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교무만 이렇게 일주일간 좋은 시간을 가지면 되겠냐? 재가도 이런 기회를 주자, 그래서 출가 여행을 내 놓았습니다. 미리준비. 선할 시간과 비용을 미리준비 하는 것 이것이 주의할 사항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냐? 자기 원력이 있어야 합니다. 신심과 원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다 부담스런 소리밖에 안 됩니다. 돈 내라고? 저희들이 지금 어린이 훈련을 나면 반액을 지원해줍니다. 그러면 열 명만 가도 본인들은 반만 내면 되지만 교당에는 반액 전체 몇 십 만원입니다. 이 사람들이 커서 일반으로 올라가면 원불교 훈련비는 작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회에서는 2박 3일 나면 보통 20-30만원, 일주일 자리는 100만원 200만원입니다. 그런데 원불교 훈련 나면 훈련비 비싸다고 그럽니다. 문화가 잘못 형성 되었구나. 대종사님이 그런 문화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선비소리를 써 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새 오락문화라고 그럴까요? 휴식, 여가문화 이것이 원불교 교도로서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쉬는 것은 힐링은 환경도 있지만 과연 우리가 술 먹고 여행지 가고 자고 이렇게 하는 것만이 궁극적으로 내 행복의 길로 가는 것인가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 군의관들이 있습니다. 묘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 법조인들 인연이 있다보니까 군의관이나 법조인들이 전문직들이죠. 군의관 온 놈들 술 먹고 그렇게 합니다. 법조인들도 판결이 승소를 못했다 하면 폭탄주를 마시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훈련을 통해서 이 맛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 맛만 한번 봐도 기도 하게 되고 선의 맛만 한 번 봐도 선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훈련 맛이 너무 좋아서 훈련만 잘 나고 그것도 문제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상시응용주의사항 1조가 핵심입니다. -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 위해서 받쳐주고 타력을 입고 훈련을 나는 것입니다.
제가 교무훈련을 하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방학을 하면 산에 간다든가 한 학기를 정리 합니다. 그러고 보면 안 써도 될 것에다 에너지를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무엇 하러 에너지를 썼던지 점검해야 할 것들 점검하고 나면 계획 잡은 것을 얼마나 했는지, 수정할 것은 무엇인지, 유무념을 통해 다시 수정해 나갑니다. 훈련을 하고 나면 내가 내 서원을 재정립하고 내 유무념도 재정리가 되죠. 건강에 대해서도 공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스스로가 정리하게 됩니다. 그러실 겁니다.
III. 교당내왕시 주의사항 5조
5조. 매 예회(例會)날에는 모든 일을 미리 처결하여 놓고 그 날은 교당에 와서 공부에만 전심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매 예회 날이 좀 특이 한 말이죠. 예라는 말은 정이 생략되어 있어서 ‘정례’라는 말입니다. 회는 앞에 법이 생략되어 있어서 법회입니다. 예회는 定例法會 줄임말 입니다. 예전에 보면 법회가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있습니다.
632쪽에 보면, 법회는, 법을 강론하며 법을 훈련하며 기타 신앙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하는 법의 모임을 통칭하는 것이니, 법회에는 정례 법회가 있고 수시 법회가 있으며, 정례 법회에는 월례 법회와 연례 법회가 있고, 월례 법회에는 예회와 야회(예.수요공부방)가 있고, 연례 법회는 훈련으로, 동선·하선과 특별 강습회가 있으며, 수시 법회는 형편에 따라 적당한 시기에 개회 하는 것이니, 그 회기 중에는, 세간의 모든 번잡한 일을 쉬고 오직 신성한 생각과 청정한 마음으로 참예하여, 모든 절차에 법의 감명을 받으며 법의 실력을 얻으며 법으로써 행사하자는 것이니라.
구타원님, 대산종사님 젊은 시절 강사로 많이 활동하셨습니다. 옛날에 공타원 조정권선진님이 부산 강연 날 그날 강연후에 입교자가 50명이었다고 합니다. 공타원님은 설통하셨다고해요. 조송광 선진 따님이시죠. 기독교 목사가 되려고 전주 기전학교에 다니다 마귀에 빠진 아버지를 구하려 익산에 찾아왔죠. 그런데 본인도 마귀에 빠져 (웃음) 정말 멋진 교무가 되셨죠.
그 분이 그렇게 법회를 보시면 선진 문집에 있습니다. 그 분의 특징 중에 하나는 생활 속의 법회 메모를 잘 하셨다고 합니다. 누가 말하면 다 메모해서 법회 때 대종사님 법으로 대소유무의 법칙 으로 풀어서 이야기 하시면 맞다, 맞다 하면서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법회를 한 번 볼 때 여러분 공부방 한 번 하면 제가 가만히 있다 나와서 하는 거 같죠? 오늘 하는 것 대중 앞에 한 10번 했을 거예요. 삼삼회에서도 11년째 하고 있어요. 원남, 전농에서도 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나는 수요일 날만 되면 왠지 무기력하고 방청소를 더 하고 싶고, 신문을 더 보고 싶어요. 대중 앞에 선다는 것 이 한시간 강의하려면 강의자는 최소한 10시간 100시간 10배이상 투자 하지 않은 사람이 앞에 선다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습니다. 깨달으신 대종사님도 정산종사님도 대산종사님도 법문 한번 그냥 나온 적이 없습니다. 적어 놓고 연마하시고 연마하시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다가 일어나서 연마하시고 수정하시고 그렇게 해서 법문 하나씩 나옵니다. 듣기 좋을수록 반대 입장의 사람은 고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회 날에는 어떻게 하라고요? 안 바쁠 때 가고 싶을 때 가라고 하셨나요? 피곤하면 가지 말고 결혼식 있으면 가지 말고 그렇게 보이는데요? (웃음) 대종사님은 정전에다가 연필로 쓰실 때 썼다 지웠다하셨죠. 여기에 보면 당신이 앞으로 수만대 세월이 흘러갈 때 이 경전이 어떻게 생활 종교로서 대중을 낙원으로 인도할까 고민하며 연필로 썼다 지웠다 하면서 모든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떻게 모든 일이에요? 말이 안될 것 같지 않아요? 모든 일을 받쳐주는 말로 ‘미리처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리처결이라는 말이 없으면 생활 종교로서 모든 일을 할 수가 없죠. 모든 일에서 예외되는 것 세가지를 말씀드리면 천재지변, 생사문제, 기필코 제생의세 구제할 일이 있다. 나머지는 모든일에서 제외된다는 것입니다. 돌잔치, 결혼식, 아버지 생신은 얼마든지 조정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30여년 간 무 결석하셨습니다. 서울에 오시면 역촌교당을 찾아갑니다. 예화를 들 사람이 몇 명 있는데 원남에 있을 때 그 분이 19년간 무결석하신 분이 있는데 자식이 둘 셋이 있고, 남편이 사업했습니다. 당신은 가정주부이면서 봉공회 회장까지 하시며 19년간 무결석을 해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징그럽네 어떻게 무결석 하세요? 집안에 별일 없었나요? 자식이나 본인 아픈 적도 없었어요? 친척 결혼식도 안했어요?’ 그랬더니 교무님 제가 비결을 알려드릴까요? 합디다. 무엇입니까? 교무님 저는 사회생활을 더 잘 합니다. 어떻게요? 그분이 청주 사람인데 청주에 집안 결혼식이 있다면, 토요일에 내려간대요. 봉투를 가지고 가서 내가 내일 중요한 일-원불교에 관심이 있으면 원불교 간다고 이야기 하고 원불교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다른 선약이라고 이야기 하고- 내가 내일 못 와서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결혼식 당일 날 가서 바쁘게 인사하고 밥먹는 것보다 미리 가면 더 할 말도 많아지고 더 고마워 하더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렇게 무결석 하더군요. 이 안에 교당 내왕시 주의 사항의 무시선법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유념공부가 들어있습니다. 모든 일을 미리처결한다는 말은 토, 일에는 법회가 있고, 수요일엔 공부방이 있습니다. 이 때 미리처결한다는 것은 상시응용주의사항 3조 허송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말합니다. 바쁘다 바쁘다 하지만 허송시간은 주로 안 자도 될 시간 안 봐도 될 티비 보는 시간, 계문 안 지키는 걸로 인해 발생하는 사고 등 이런 것이다. 계문을 잘 지키다보면 이 시간들이 다 줄어들게 되어있습니다. 그대로 무시선 공부가 되는 겁니다. 공부방 오냐 법회를 오냐의 문제 이전에 낭비 시간을 줄이게끔 다 이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라고 하셨어요. 대종사님 당대에 수행편에 있던 이야기입니다. 1932년도에 대종사님이 하신 법문입니다.
대종사 선원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영광(靈光)의 교도 한 사람은 품삯 얼마를 벌기 위하여 예회(例會)날 교당 근처에서 일을 하고 있더라 하니 그대들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 제자 사뢰기를 [그 사람이 돈만 알고 공부에 등한한 것은 잘못이오나 만일 그 날 하루의 먹을 것이 없어서 부모 처자가 주리게 되었다 하오면, 하루의 예회에 빠지고라도 식구들의 기한(飢寒)을 면하게 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말이 그럴 듯하나 예회는 날마다 있는 것이 아니니 만일 공부에 참 발심이 있고 법의 가치를 중히 아는 사람이라면 그 동안에 무엇을 하여서라도 예회 날 하루 먹을 것은 준비하여 둘 것이어늘, 예회 날을 당하여 비로소 먹을 것을 찾는 것은 벌써 공부에 등한하고 법에 성의 없는 것이라, 그러므로 "교당 내왕시 주의 사항"에도 미리 말하여 둔 바가 있는 것이며, 또는 혹 미리 노력을 하였으되 먹을 것이 넉넉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 가운데 일호의 사심이 없이 공부한다면 자연 먹을 것이 생기는 이치도 있나니, 예를 들어 말하자면 어린 아이가 그 어머니의 배 밖에만 나오면 안 나던 젖이 나와져서 그 천록(天祿)을 먹고 자라나는 것과 같나니라.]
대종사 선원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영광(靈光)의 교도 한 사람은 품삯 얼마를 벌기 위하여 예회(例會)날 교당 근처에서 일을 하고 있더라 하니 그대들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문정규선진님 한 제자 사뢰기를 [그 사람이 돈만 알고 공부에 등한한 것은 잘못이오나 만일 그 날 하루의 먹을 것이 없어서 부모 처자가 주리게 되었다 하오면, 하루의 예회에 빠지고라도 식구들의 기한(飢寒)을 면하게 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오리까.]
일리가 있는 말이죠. 이것은 품삵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원불교를 다니는 것이 내 사회 생활에 도움이 되냐 안 되느냐 생각 볼 문제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웃으시면서 누구든 대답해 보아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탕원 이공주 선진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목적하는 바는 영원한 사업이며 더욱이 하루의 고통은 능히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하루의 고통을 잊기 위하여 밥 두그릇과 돈 15전에 끌리어 영원한 공부를 놓아 버리는 것은 목적으로나 이해로나 타당할 수 없는 일이요 또는 법보다도 돈 15전이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로 제 생각으로는 참으로 법을 존중히 아는 사람이라면 하루 뿐 아니라 이틀을 굶는다 하여도 15전 말고 몇십원이 생긴다 하여도 예회는 꼭 참여해야 하는 줄로 압니다.
대종사님이 또 구타원 이공주 선진님의 말을 듣고 또 어떠한지 대중의 의견을 물으셨다.
문정규선진님이 감탄을 하시며 백발을 휘날리며 참으로 그 말이 옳습니다 하고 자기 의견을 접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이공주 선진님께 절을 합니다. 그러면서 제 생각과 같습니다 하고 바꾸셨습니다.
그러자 대종사님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규가 공주의 말을 듣고 옳다고 절을 한 것을 본 즉 참으로 법을 존중히 아는 사람이다.’ 라고 문정규 선진님까지 칭찬하셨습니다. 그러고는 한 말씀 더 해주십니다. 이것이 수행품 7장 법문입니다.
수행품 7장은 당대에 법문 했던 것들이 많이 생략 되어 있습니다. 핵심은 법의 가치를 알고 법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법회와 법회사이에 돈을 벌 것입니다. 놀다가 나태하다가 법회 날 당해서 법회 날 갑자기 숙제도 하고 싶고 청소하고 싶고 착한 마음이 나죠. 법회 없을 때 준비 없이 놀다가 예회날 당해서 먹을 것을 찾는 것은 벌써 공부에 등한하고 법에 무성의한 증거가 아닌가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법회가 아닌 시간에 노력했는데도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에 일호의 사심이 없이 공부에만 전력할 생각이 있다면 자연 먹을 것이 생기는 이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천록이 있습니다. 그 예를 들기를 철없는 아이가 출생하면 엄마의 천록이 가슴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래 놓고 법문 하시기를 돈 버는 방식을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이 수행품 8장입니다.
대종사 예회에서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오늘은 그대들에게 돈 버는 방식을 일러 주려 하노니 잘 들어서 각각 넉넉한 생활들을 하여보라. 그 방식이라 하는 것은 밖으로 무슨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각자의 마음 쓰는 법을 이름이니, 우리의 교법이 곧 돈을 버는 방식이 되나니라. 보라! 세상 사람들의 보통 생활에는 주색이나 잡기로 소모되는 금전이 얼마이며, 허영이나 외화로 낭비되는 물질이 얼마이며, 나태나 신용 없는 것으로 상실되는 재산이 또한 그 얼마인가. 생활의 표준이 없이 되는 대로 지내던 그 사람이 예회에 나와서 모든 법을 배우는 동시에 하라는 일과 말라는 일을 다만 몇 가지만 실행할지라도 공연히 허비하던 돈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아니하고 근검과 신용으로 얻는 재산이 안에서 불어날 것이니, 이것이 곧 돈을 버는 방식이니라. 그러하거늘, 세상 사람들은 공부하는 것이 돈 버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줄로 알고 돈이 없으니 공부를 못 한다 하며 돈을 벌자니 예회에 못 간다 하나니, 그 어찌 한 편만 보는 생각이 아니리요. 그러므로,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돈이 없으니 공부를 더 잘 하고 돈을 벌자니 예회에 더 잘 나와야 하겠다는 신념을 얻어서 공부와 생활이 같이 향상의 길을 얻게 되리라.]
대종사님 말씀이 부왕부왕한 건 아닌지 잘 들어 보세요.
한 번은 법회에 딱 나오셔서 ‘내가 너희들한테 돈을 주겠다’ 하고선, ‘내가 여러분 재주대로 이 돈을 받아다 밥도 해먹고 옷도 입고 집도 지어서 어디 쓰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써보아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해 놓고는 내가 이렇게 말해 놓고도 혹 돈 한푼도 안 주고서 무엇을 마음대로 쓰라는 것이냐 하고 거짓말 같이 부왕하게 알겠다? 하고 귀신같이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각 있는 사람이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이 말이 조금도 거짓말이 아님을 이해할 것이다. 예를 들겠다. 술, 술을 일년이면 50원어치 먹고 살던 사람이 오늘 예회에 와서 술 먹지 말라는 계문을 듣고 크게 깨달음이 있어서 먹던 술을 참았다고 해보자. 그런다면 일년을 참으면 50원이 모이고 10년을 참으면 500원이 모이고 평생을 참으면 몇 백원, 몇 천원이 모일 수 있을 것이니 곧 계문을 설한 사람이 그 사람에게 몇 백원 몇 천원을 준 셈이 아니냐.’ 라고 하셨습니다. ‘또 잡기 (요새는 게임, 쇼핑)를 하던 사람이 오늘 이곳에 와서 잡기를 하지 말며 계문 해석을 듣고 깨달음이 있어 항상 하던 잡기를 참기로 결심하고 얌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보자. 그런다면 전답을 팔아 먹던 사람이 전답을 장만하게 되고 남의 빚을 쓰던 사람이 도리어 저금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니 그 법을 설한 사람이 그만한 돈을 준 것이 아니냐’
‘만일 이와 같이 술 잘 먹고 잡기 잘 하는 사람이 일평생에 그와 같이 필요한 법설을 듣지 못하고 자행자지로 지내 봐라. 그야말로 기구할 것은 의심할 수도 없는 사실이다. 실로 위태한 세상이 될 것이다. 또한, 농촌에서 본래 자기 재주로는 한 두락에 한 곡출 밖에 못낸 사람이 농사법을 아는 사람에게 배워서 두배 세배 곡출을 내게 된다면 그 알게 해준 사람이 돈 벌게 해 준 것이 아니냐. 그래서 법회 사회를 보는 사람은 법회를 보러 온 사람에게 돈을 벌러 온다고 생각하고 사회는 연사를 소개할 때 이렇게 해라. 이참에는 어느 분이 무슨 말을 한다고 하지 말고 이참에 어느 분이 나오셔서 돈을 줄테니 받을 그릇을 준비 하였다가 많이 담아 가도록 하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학교를 다녀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월급이 다른 사람의 몇 배다. 그런데 저 시골 농촌의 부녀들을 보아라. 종일 죽도록 남의 일을 해주고 품삵이 겨우 조금이다. 남자는 힘이 세다고 조금 더 받고 여자는 기운이 약하다고 조금 덜 받는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 생활에 필요한 것을 교당에 와서 배운다면 그 사람은 그 만큼 그만한 대우를 받을 것이고 만약 못 듣는 다면 그만한 천대를 받을 것이 아니냐. 그래서 천대받는 그런 사람들에게 대종사님 법으로 인도정의의 법을 가르치고 천대 받지 않도록 이 법을 열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은 알지 못하고 심한 사람은 법회를 보는 것을 비방하고 가난한 자는 돈이 없어서 못한다. 빚 있는 자는 빚 때문에 못 한다. 부모있는 자는 부모 모시느라 못 한다. 하니 어찌 애닳지 않겠느냐. 실은 돈이 없으니 이 법을 더 배워야 하고 빚이 있으니 이 법을 더 배워야 하고 부모가 계시니 이 법을 더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그것 때문에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될 말인가.’
또 예를 드셨습니다. ‘신용 없지 말며 계문 하나만 배워 지킨다 해도 그것이 몇 천 만원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일평생을 두고 써도 유익되고 남을 것이다. 오히려 쓰고도 남는다. 그런 것을 심상히 가볍게 여겨 배우려는 생각도 아니 내며 우선 눈에 보이는 돈에만 욕심이 나서 소위 교도가 돼서 15전이나 20전 푼돈에 팔려 예회에 번번이 불참하는 자도 그 수가 많다.’ 그러면서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인생 생활에 필요한 법을 설하여 줄테니 오라 하면 잘 안온다. 만약 여자는 품삯 얼마 남자는 얼마 해서 한 번 법회 보면 얼마 주겠다. 그러면 아마 줄 설 것이다. 그 모양을 생각해 볼 때 참 한심하다. 그 마음을 정돈할 줄을 모르고 또 법회를 온다고 하더라도 온 사람이 앉아서 졸고 있든가 왔다 갔다 한다든지 그런 사람한테는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봤자 소용이 없다. 마치 박람회에 출품한 로봇같은 사람 즉 거짓사람과 같을 것이다. 즉 실속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 되지 말고 건성으로 듣지 말고 정신차려서 선악간 나의 보감을 삼아 매사에 활용하라. 가난하던 사람이 부자가 될 것이고 무식하던 사람이 유식한 사람이 되고 고통이 많은 사람은 고통이 적어지고 낙은 많아 질 것이다.’
법회를 보는 것은 오히려 그런 사람 이 더 와서 들어야 한다는 것을 대종사님께서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설해주셨습니다.
미리처결하여 놓고 그 날은 교당에 와서라고 하셨지요
법훈편 1장에 보면, 정신생활 원업 직장생활 부업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교당이 원업인 사람은 와서가 되고 교당이 부업인 사람은 가서가 됩니다. 대종사님은 와서라고 표현 하셨습니다. 공부에만 이라고 표현했다. 공부에만 전심해라. 청법의 도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을 듣는 것 임신한 사람이 법회를 본다면 부처님과 인연이 되는 것이죠. 태교에도 도움이 됩니다. 제가 오늘 신문을 봤는데요. 미국에 유명한 사람이 이 사람이 10살 때 교회를 엄마 손잡고 갔다고 합니다. 그 때 목사님이 해주신 말씀이 자기 인생에 커다란 지침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지금 할머니 할아버지도 중요하지만 젊은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젊은사람보다 어린이가 더 중요합니다. 어린이 보다 뱃속에 있는 아이가 더 중요하고 태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도입니다. 같이 맞물려 순환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을 접해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법문을 들을 때는 갈망하는 마음으로 들으라고 했습니다. 공력을 들여서 대중있게 착의 없이, 계교하지 말고 실생활에 활용할 마음으로 법회 보다가 조는 것은 꿈속에서 떡을 먹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배 안부릅니다.
제가 공부를 잘 못시킨 것 같습니다. 예회날에는 모든일을 미리처결하라고 했으니, 토요일날 늦게까지 티비보는 것이 아니라 일찍 자야겠죠. 그런데 그 마음이 별로 없죠. 늦게 자고 아침에 정신 없습니다. 법회가 원업인 사람은 교당올 때 챙길 것이 많습니다. 한주일간 산 것, 일기, 상시일기, 정기일기, 헌공금, 문답할 것, 교전, 단원들, 교화할 사람 챙기고 옛날 군산 오철환 선진님은 일요일 날 아침에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며, ‘법회 봅시다.’ 그렇게 소리치고 다니셨습니다. 군산 시내를 다 돌면서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재가로 출가위에 오르셨습니다.
그 분이 그렇게 원불교에 그렇게 열심히 해서 회사가 몇 배 커버렸습니다. 여러분이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교당을 다니다 보니까 사회생활 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처럼 느낍니다. 작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생을 바라보고 시공간을 넘어선 공부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우주보다 더 큰 것입니다. 그 마음을 공부하는 우리는 크게 잡아야 합니다. 당장 현실적으로 보면 법회 안 오고 공부한 놈이 앞서 갈 수 있습니다. 이치를 모르면 그럴 수 있습니다. 전농에 있을 때 어떤 교도님이 일요일 날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교당에 나온다고 했습니다. 죽는 일 보다 급한 일 이 없지 않습니까? 그만한 가치를 법회에 부여했습니다. 그분도 나중에 자녀, 사위, 손녀까지 교당 다 나왔습니다.
내가 성불제중하는 날이에요. 마음을 정해 버리셔야 합니다. 믿음은 정의 원동력입니다. 교당 내왕시 “주의사항”이라고 했습니다. 주의는 불공이고 선입니다. 왜? 유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유념을 정 해 버려라, 법회나 공부방은 딱 정해버리면 다른 시간은 조정이 됩니다. 정하지 않으니 계속 흔들립니다.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는데 정하지 않으니 자꾸 더 요란해집니다. 정해지면 고요합니다, 신심 없는 사람일수록 자주 아프고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혼자 몸이 안 좋고 일 제일 많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당에는 한가해서 건강해서 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다 미리처결 조절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죠. 교당일 때문에 바쁘다고. 수많은 시간은 여러분 가정 직장에서 보냅니다. 그 기준자체가 잘못 잡아진 사람은 교당에 시간을 뺏긴 거 같습니다. 사실은 불과 몇 시간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는 풀어진 태엽을 다시 조여주고 닳아진 기름을 다시 충전하고 먼지 쌓여진 방을 청소함과 같이 그런 것을 새로운 마음으로 자기를 관리해 나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서로 4,5조는 함께 공부이고 단을 통해서 하라는 겁니다. 법회를 볼 때는 교전도 가지고 오시고 법회노트도 가지고 오셔야합니다. 인간의 기억력이 그렇게 좋지가 않습니다. 다시 봐야 합니다. 신문을 보니 회사 인턴으로 들어간 직원이, 다른 사람 퇴근하고 간 후 자기는 30분간 하루 일한 거 정리하고 30분간 있다가 갔답니다. 그러니까 사장이나 다른 직원이 보고 어떻겠어요. 교당에만 잘 다니는 것이 아니라 교당에 다님으로써 회사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죠. 왜? 그런 원리를 배우잖아요.
IV. 교당내왕시 주의 사항 6조
6조. 교당에 다녀갈 때에는 어떠한 감각이 되었는지 어떠한 의심이 밝아졌는지 소득 유무를 반조하여 본 후에 반드시 실생활에 활용하기를 주의할 것이니라.
교당에 다녀갈 때에는 법회 좋았다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되었는지 어떤 의심이 밝아졌는지 소득유무를 반조해야 합니다. 언제 반조할까요? 법회 끝나고 나서 1차로 반조 하셔야 한다. 교무님 설교 끝나면 노래 하면서 잠깐 마음 속에 전체 정리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집에 가면서 서로 이야기 하고 참회하고 사과할 일 있으면 하고, 저녁에 일기 할 때 소득 유무 적습니다. 소득유무를 적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득유무를 한 주간 유무념으로 삼아 공부하는 것입니다. 교무님 설교는 이렇게 했는데 자기는 또 따로다. 기본 유무념에다가 한 주일간 배운 유무념으로 생활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제가 일반 법회 사무량심에 대해서 했습니다. 자비희사 한주일간 생활 속에서 응용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다 보면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의심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의심나는 것을 교당에 들고 와서 질문하는 겁니다. 서로 맞물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교무는 일원상 단상 밑에서 대중에게 대종사님이 밝혀준 법으로 전달해 포커스를 쐈는데 이를 본인이 받아들이지 않고, 평가하고, 스스로가 아니라 남이 들었으면 좋겠다하면 서로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focus 가 틀려 버립니다.
청법이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대조하는 것입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을 그냥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한 주일 간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대조하는 것입니다. 법회를 다가올 때는 어떤 소득유무, 의문 ,업 을 가지고 와서 법당 문을 열고 문답하는 것입니다. 사은의 은혜 속에서 얼마나 나는 저축을 했으며 대종사님 법으로 얼마나 은혜롭게 생활 했는가를 생각하며 저축합니다. 현실적으로 저축, 진리적으로 저축하는 것이다. 사실 헌공은 매주하게 되어있죠. 매주 사은의 은혜 속에서 법을 실천한 것이 무엇인가, 얼마나 고마운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월급쟁이 월급 받을 때 딱 한번 하고 그건 이치에 맞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사은의 은혜 속에서 삽니다. 우리가 내가 법문을 듣고 좋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장 학교에서 실행 해 볼 것인가 유무념 잡고 해봅니다. 그래야 실생활에 활용이 됩니다. 관념의 종교, 생활과 연결되지 않는 종교가 아니라 실생활에 활용 돼서 재미가 있으면서 비로소 불법시 생활 생활시 불법으로 연결 됩니다. 이것이 대종사님의 교당 내왕시 주의 사항입니다.
우리가 교당에 와서는 타력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법당이라고 안합니다. 대각전. 크게 깨닫는 전당이라고 합니다. 한주일간 상시응용 주의사항으로 했고 직장 집안 학교에서 했던걸 가지고 와서 단원들하고 법회 보면서 지도자에게 단장 선배들에게 문답을 해서 얻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단회를 참석 하셔야 합니다. 실생활에 활용하는 것 이것이 결국 제일 중요합니다.
제가 교당 내왕시 주의 사항이 학생에게는 학교 내왕시 주의 사항이라고 했죠. 직장생활 하는 사람들은 직장 내왕시 주의 사항입니다. 100프로 적용은 안 되도 가져다 써 보세요.
V. 질문
지민정 교우님: 학사 생활하고 법회 듣고서 생각해보니 예전에는 잘못된 습관, 말투인 줄 몰랐는데 이제는 알게 되고 자신에게 보여 지고 느껴지게 되니 죄책감으로 힘들고 마음이 슬플 때가 많다. 이런 부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답 : 법회를 보지 않았다면 계속 악순환이 될 것입니다. 나만 악순환이 아니라, 나는 기쁜 것 같은데 주위 사람은 나를 예뻐하지 않고 내 스스로는 그것이 고쳐지지도 않고 악 습관 누적되죠. 그것보다 내가 법회를 통해서 나를 객관적으로 봐지게 되면서 법회를 보고 나면 참회가 됩니다. 법회를 보다 보면 어떤 사람은 가슴이 찢어진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법문을 잘 들은 것입니다. 내가 잘 살았다고 칭찬 들으러 법회 오는 것 아니잖아요? 내가 조금 더 업그레이드되기 위해서 오는 거잖아요. 여러분이 법문을 듣다보면 ‘청법삼매’라는 말이 있어요. 법문을 듣다보면 가슴에서 미쳐버리도록 좋은 느낌이 있다. 법열이라고 합니다. 법열이 있어져야 합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아까 괴롭다고 했는데 그 괴로움이 정당한 괴로움이고 나를 기쁘게 할 괴로움이죠. 대개 법문을 들을 때 편집해서 자기가 들을 것만 듣습니다. 그건 잘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믿음이 바탕 해서 들어야 하는 데 잘하나 못 하나 하며 보는 것은 은혜가 하나도 안 됩니다. 진급하고 있는 소리입니다. 문제인지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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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의 교우님 감사해요~ ^^
^^ 늦게 보내드렸눈데 ㅜㅜ 이렇게 잘 올려주시다니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