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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이상적인 조형 형태, 벨베데레의 토르소
바티칸 미술관의 팔각형의 안뜰을 지나면 ‘뮤즈의 방(Sala Delle Muse)’이 등장한다. 이곳에 들어서면 전시실 중앙에 앉아 잇는 건장한 남성의 몸통이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티칸 박물관이 자랑하는 걸작 <벨베데레의 토르소>다. ‘토르소(Torso)’는 이탈리아어로 가지를 쳐낸 통나무나 통숯을 의미하다가 르네상스 시대를 기점으로 팔, 다리, 머리 등이 떨어져 나가고 몸통만 남은 조각이나 회화 작품을 일컫는 말로 발전했다. <벨베데레의 토르소>는 ‘토르소’가 하나의 미술 명칭으로 자리 잡게 만든 원작품이니 실로 미술사적 의미가 크다 하겠다. 좌대 위에 짐승 가죽을 깔고 앉은 나체 남성의 양쪽 상퇴부(上腿部)를 포함한 몸통(Torso)이 남아 있다. 바위 대좌에 ‘아테네인 네스토르의 아들 아폴로니오스 작(opera di Apollonio, figlio di Nestore, Ateniese)’의 글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기원전 3세기경에 청동으로 만들어졌던 것을 기원전 1세기경에 대리석으로 모사한 로마시대 리플리카(Reflica, 복제품)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가 1.59m이다.
토르소의 서명
이 작품의 가치는 후대의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증명되었다. 그 가치를 가장 먼저 발견한 미켈란젤로를 비롯하여, 바로크 시대의 천재 화가 루벤스의 <삼손과 데릴라>,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의 살롱 입선작인 <단테의 조각배>, 그리고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등에서 이 작품의 이미지가 재차 차용되었다. 이를 보건대 이 작품의 압도적인 조형성이 당대의 거장들을 얼마나 매료시켰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벨베데레의 토르소>는 고대 로마의 유적지안 카라칼라의 목욕탕(Baths of Caracalla)의 폐허에서 발견된 후 팔라초 코론나(Palazzo Colonna)에 머물다가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 재위 1523~34) 때 현재의 장소인 벨베데레의 뜰(Cortile del Belvedere)로 옮겨졌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보지마자 “아, 아버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토르소의 떨어져 나간 팔과 다리를 보강하라는 교황의 제의를 받고는 자신의 추가적인 작업이 작품의 예술성을 침해할 수 있고, 지금 작품 자체만으로도 가장 이상적인 조형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며 정중히 사양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더불어 자신의 다양한 작품에서 이 토르소의 포즈나 근육의 움직임을 차용하곤 했다. 독일 미술사학자 빙켈만(Winckelmann, 1717~1768)은 이 작품을 두고 “부침을 되풀이하며 흐르는 근육은 안개에 휩싸인 불안과 더불어 유희하는 파도를 감사 안고 저 홀로 들썩이는 하나의 바다”라고 멋지게 칭송했다. 그러고 보면 고대 조각 비평만큼은 빙켈만이 최고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팔과 다리가 없는 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작품의 주인공을 가리는 시비는 오랫동안 고고학계의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헤라클레스(Hercules)가 주인공이라는 설이 유력했는데, 작품 하단에 보이는 맹수의 가죽이 단서였다. 일반적으로 헤라클레스가 자신이 맨손으로 때려잡은 사자 가죽을 걸치고 몽둥이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던 탓이다.
그러다가 실제 주인공이 훗날 트로이 전쟁(Trojan war)의 영웅 아이아스(Aias)임이 밝혀졌다. 살라미스(Salamis)의 왕자 아이아스는 아킬레우스(Achilleus)가 파리스(Paris)의 독화살에 맞아 죽은 후 가장 용맹한 장수에게 물려주게 되어 있는 그의 유품인 갑옷을 두고 오디세우스(Odysseus)와 겨루어 패한다. 이에 너무나 분한 나머지 잠시 정신이 나가서 양떼를 그리스군으로 착각해 모두 베어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다. 얼마 후 제정신이 돌아온 그는 이 사실을 매우 부끄러워하며 전리품인 헥토르(Hektor)의 칼로 자살한다.
이 작품은 아이아스가 자살하기에 앞서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라고 한다. 떨어져 나간 팔다리를 조합한 원래의 모습이 다른 고대 유물에서 발견된 아이아스의 모습과 같았기 때문이다. 카피톨리노의 일리카 석판(Tabula Iliaca Capitolina)에 그려진 앉아 있는 인물을 "미친 아이아스(Crazed Ajax)"로 기록된 것이 있다.
(윤운중, 2013)
벨베데레 토르소(Belvedere Torso)
토르소(torso)는 원래 이탈리아어에서 잔가지를 쳐낸 통나무, 과일의 씨앗, 통숯 같은 것을 가리키던 말이다. 그러다가 르네상스 시대부터 머리나 팔 다리가 분질러져 나간 고대 조각을 토르소라고 지칭하기 시작하는데, 몸통만 덩그러니 토막이 났다고 그렇게 부른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말할 때 다른 설명을 달지 않고 그냥 ‘토르소’라고 부르면, 고대 조각을 좀 아는 학자나 전문가 사이에서는 바티칸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Museo Pio Clementino)에 전시된 <벨베데레의 토르소>로 통했다.
<벨베데레의 토르소>. 벨베데레 조각정원(Cortile del Belvedere)에 전시된 토르소란 뜻이다. ‘벨베데레’는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Ⅱ, 재위 1503~1513)가 로마의 시성(詩聖)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 70~ BC 19년)가 쓴 <아이네이스(Aineis)>를 읽은 뒤, 고대 유물을 가지고 옛 서사시를 복원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품고 조성한 정원 이름이다. 이곳의 가장 소중한 보물 두 가지를 꼽으라면 단연 1506년 발굴된 라오콘 군상(Gruppo del Laocoonte)과 더불어 토르소를 뺄 수 없다.
그 후 북구의 동판화가들이 앞다투어 토르소를 베껴서 유럽 전역 미술시장에 유통시켰고, 미켈란젤로와 루벤스와 로댕의 예술은 오래 전에 떨어져나간 토르소의 사지(四肢)를 영감의 실로 꿰매 붙여서 고대의 부활을 도모하기도 했다. 예컨대 피렌체 산 로렌초 교회(Church of San Lorenzo) 부속 메디치 예배당의 <로렌초>의 상체 자세나 낮의 알레고리 <일 조르노(Il Giorno)>의 등짝 모습을 보면 벨베데레의 토르소한테서 핏줄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벨베데레의 토르소는 뛰어난 예술가뿐 아니라 한다하는 글쟁이들한테도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군도(Die Räuber)>로 유명한 극작가 실러(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는 토르소를 보고 “그리스의 아름다운 예술이 지구 땅덩어리 전체를 누르고 거둔 승리”라고 단정했고, 고고학의 아버지 빙켈만(Winckelmann, Johann Joachim, 1717~1768)은 “부침을 되풀이하며 흐르는 근육들은…안개에 휩싸인 불안과 더불어 유희하는 파도를 감싸 안고 저 홀로 들썩이는 하나의 바다”라고 고백했다.
토르소에 대한 첫 기록은 안코나의 퀴리아쿠스(Cyriacus)가 남겼다. 1432∼1434년에 로마에 머물렀던 그는 벨베데레의 토르소를 관찰하다가 조각가의 서명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한다. “네스토르의 아들 아테네 출신의 아폴로니오스가 제작했다”라고 씌어 있었는데 그가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빼어난 수작(singularissima figura)’인 이런 대리석을 고전 문헌에 한 차례도 안 나오는 조각가가 완성했다는 게 도무지 납득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루벤스, 벨베데레 토르소, Red chalk, 1601~02년
이 문제는 오랫동안 고고학계의 논란거리였다가 서명 글자체가 로마 제정 초기의 서체로 밝혀지면서 마침내 아폴로니오스는 모각 조각가였던 걸로 결론이 내려졌다. 전성기 헬레니즘 조형을 착실하게 반영한 토르소하고는 양식사적으로 200년이나 떨어져 있으니 도무지 원작자로 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토르소가 누구 솜씨인지는 지금까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해결 안 된 문제가 있었다.
벨베데레의 토르소의 주인공은 도대체 누구일까? 말 그대로 토르소이니까 얼굴 표정은 고사하고 팔과 다리의 자세가 어떠했는지, 무슨 상징물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지, 또 다른 인물과 군상을 이루고 있었는지 딱 부러지게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다만 엉덩이 아래 바윗덩어리 하나, 그리고 왼쪽 허벅지 위에 맹수 털가죽 한 장이 걸쳐 있는 게 유일한 단서였다. 고고학자들은 입을 모아 헤라클레스(Hercules)가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무엇보다 상체와 하체의 근육이 장난이 아닌데다 사자가죽까지 걸쳤으니 더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분질러진 두 팔은 큰 몽둥이를 붙들고 있거나 헤베(Hēbē)나 아우게(Auge)의 아름다운 알몸을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상체를 크게 뒤튼 자세가 간단히 이해되었다. 적어도 19세기 말까지 헤라클레스임을 의심한 사람은 없었다.
1887년 브레슬라우 출신의 해부학자 카를 헤세(Carl Hermann Hesse)는 토르소를 뜯어보다가 토르소 왼쪽 무릎에 걸친 맹수 가죽이 네메아(Némĕa) 에서 때려잡은 사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수놈 사자치고는 머리통이 너무 작았다. 게다가 백수의 왕의 심벌이랄 수 있는 머리 갈기털이 하나도 없었다. 또 꼬리 끝에도 솔기가 없었다. 헤세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표범이 분명했다. 이 사실이 발표되자 토르소 논쟁이 다시 끓어올랐다.
들라크루아,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1822년, 189×246cm,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일리아스>를 보면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맨땅에 주저앉는 법이 없이 반드시 맹수 가죽을 깔고 엉덩이를 붙인다. 잘 때도 그랬고, 말을 탈 때도 그랬다. 가죽도 천차만별이어서 무슨 가죽을 깔고 앉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분과 영향력을 가늠하는 게 보통이었다. 이렇게 되자 갑자기 해석의 범위가 넓어졌다. 남성 영웅이라면 누구라도 토르소의 주인공으로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단 사자 가죽을 깔거나 걸치고 다니는 헤라클레스만 제외하고.
먼저 토르소의 새로운 후보로 덩치 좋은 괴물 폴뤼페무스(Polyphémus) 가 물망에 올랐다. 머리가 달아났으니 외눈인지 두 눈인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고, 벼랑에 주저앉아서 헤엄을 치고 있는 갈라테아(Galatéa)의 사랑스러운 자태를 보고 있다가 인사나 하려고 엉거주춤 일어나는 자세로 보면 그런대로 무리가 없다.
1894년 고고학자 자우어와 1901년 프라이저가 그렇게 보았다. 다른 해석도 쏟아져 나왔다. 1900년 고고학자 로베르트는 프로메테우스가 제 손으로 빚은 첫 인간을 쓰다듬고 있다고 생각했고, 1907년 말름베르크는 전설적인 비티니아(Bithynia)의 왕 아뮈코스(Amycus)가 앉아 있다고 믿었다.
1907년 고고학자 카를 하다체크가 토르소에 관한 새로운 관찰을 발표했다. 등짝을 보면 척추를 따라 내려가다가 맨 아래에 구멍이 하나 나 있는데, 그게 바로 꼬리를 붙였던 자국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건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 아니라 반인반수 사티로스(Satyros)가 된다. 헬레니즘 시대엔 사티로스나 판(Pan)을 테세우스(Theseus)처럼 근사한 체구로 재현한 사례가 제법 있으니까 꽤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엉치뼈 부근에 난 구멍은 논란 끝에 꼬리 부착 용도가 아니라는 걸로 결론이 났다.
다른 대리석 사티로스들을 보면 꼬리를 붙일 때 작은 구멍 하나를 뚫고 박아 넣는 법이 없다. 엉덩이 상당부분을 크게 절개해서 꼬리가 마치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솟는 게 보통인데, 이건 기술적으로 너무 달랐다. 또 구멍 주변이 미끈하게 마무리가 되었고 부근에 녹물 스민 흔적도 없어서 금속 이음장치를 박아 넣었다고 보기엔 곤란했다. 자세히 살펴보니까 꼬리를 붙였다는 구멍의 위치가 척추뼈의 흐름에서 얼마간 옆으로 벗어나 있었다. 따라서 사티로스는 후보에 오르자마자 곧장 퇴출.
그 후 토르소 논쟁은 도상학 연구와 병행되면서 다시 불길이 당겨졌다. 오디세우스 주제를 다룬 은제 술잔 부조와 보석 조각에서 벨베데레의 토르소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남성 나신의 유형이 주목받았다. 그것은 바로 렘노스 (Lemnos) 섬에 버려진 필록테테스(Philoctetes)였다. 그는 트로이로 가는 뱃길에서 물을 길어오려고 잠시 섬에 올랐다가 독뱀한테 물렸는데,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동료들에게 버림받은 불운한 용사였다. 혼자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필록테테스의 자세는 1990년대 중반까지도 다수 고고학계의 인정을 받으면서 거의 정설로 굳어졌다.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자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면서 기우뚱하게 상체가 기울었다는 것이다.
현재 출간된 대부분 관련 문헌에서도 벨베데레의 토르소를 필록테테스로 본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불거졌다. 왼쪽 허벅지 바깥과 오른쪽 허벅지 안쪽에 나 있는 사각형 이음새 구멍이 영 골칫거리였다. 두 팔로 지팡이를 지탱하는 자세로는 양쪽 허벅지의 구멍 두 개를 설명할 수 없었다. 무릎 위에 활이나 활통을 올려놓는다 쳐도 이음새 구멍하고는 위치가 안 맞으니 제아무리 상상력 하나로 밥 먹고사는 고고학자들도 용빼는 재주가 없었다.
1998년 새로운 제안이 나왔다. 주인공은 아이아스(Aias). 꾀쟁이 오디세우스(Odysseus)한테 친구 아킬레우스(Achilleus)의 방패와 무구를 빼앗긴 인물이다. 눈이 뒤집힌 아이아스는 오디세우스의 손을 들어준 동료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칼을 마구 휘둘렀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려 보니 소떼와 양떼가 몰살해 있었다고 한다.
벨베데레 토르소 복원 예상도
<일리아스>에서는 아이아스가 수치와 죄책감을 못 이기고 자신에게 칼을 겨누어 자살했다고 하는데, 토르소가 바로 죽음을 앞둔 그의 자세라는 것이다. 게다가 칼집을 왼손에 칼을 오른손에 쥐어주니까 양쪽 허벅지에 난 이음새 구멍하고 신기하게 위치가 맞아 떨어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고대 주화, 유리 공예, 테라코타 등잔 부조에서 벨베데레의 토르소 하고 똑같은 자세를 취한 아이아스가 뒤늦게 우르르 발견되었다. 한마디로 신화 도상학의 개가였다. 헬레니즘 최고의 골칫거리 수수께끼를 보란 듯이 해결했다. 머리와 팔과 다리가 모두 떨어져나가고 토르소로 남아 있던 아이아스가 제 이름을 찾게 되었다.
<고전미술과 천 번의 입맞춤 - 노성두의 그림 읽기>에서 인용
* 우리에게는 남산 삼릉계의 파괴된 불상이 '벨베데레의 토르소'보다 더 소중하다.
첫댓글 경주문화연구교사모임에서 경주문화에 대한 안목을, 우리문화에 대한 시야를 더욱 넓히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다른 나라의 문화재나 미술품을 소개합니다. 이해와 격려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