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어른을 만나다.
눈물 꽃 소년 - 내 어린 날의 이야기 (박노해/ 느린걸음)을 읽고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활동가 유선화 )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어질 때는 참 좋은 책을 만났을 때입니다. 올 해 제가 주변에 선물을 하는 책은 박노해 시인의 첫 자전수필 ‘눈물 꽃 소년- 내 어린 날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저는 박노해 시인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지만, 그 분의 시를 읽어 보지는 못한 상태에서 이 수필을 만났습니다. 총 33편의 짧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데,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아름답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물어물어 찾아간 길’을 읽으면서부터 눈물이 스미어 올라왔습니다. 할머니 허리쯤 닿는 작은 꼬마일 때, 할머니께서 시키신 심부름을 수행하던 어린 기평이 나옵니다. 가본 적이 없어서 길을 모르겠다는 기평에게 할머니는 “몰라도 사람이 안 있냐아. 물어물어 댕겨오니라.”라고 하십니다. 타박타박 걸어가는 기평에게 만나는 사람들은 길이 되어 주고 격려자가 되어줍니다.
“잘했다, 잘혔어. 그려 그려, 잘 몰라도 괜찮다. 사람이 길인께.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듣는 사람이 빛나고, 안다 하는 사람보다 잘 묻는 사람이 귀인이니께. 잘 물어물어 가면은 다아 잘 되니께.”
라고 말씀하시는 할머니를 보며,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남겨두기를’에서는 추수한 곡식을 말리는 과정 중에 달려드는 새를 열심히 쫓는 기평에게 어머니께서는 잘했다고 하지 않고 놀면서 새들도 먹게 두지 그랬냐고 하십니다. 토라져있는 기평에게 어머니는 삼중기도를 마치고
“평아, 오늘 애썼는데 서운했냐아. 근디 말이다... 열심이 지나치면 욕심이 되지야. 새들도 묵어야 사니께 곡식은 좀 남겨두는 거란다. 갯벌에 꼬막도 저수지에 새뱅이도 씨 마를까 남겨두는 거제이. 머루도 개암도 산짐승들 먹게 남겨두는 거고. 동네 잔치 음식도 길손들 먹고 동냥치도 먹게 남겨두는 것이제. 아깝고 좋은 것일수록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평아, 사람이 말이다. 할 말 다 하고 사는 거 아니란다. 억울함도 분함도 좀 남겨두는 거제. 잘한 일도 선한 일도 다 인정받길 바라믄 안 되제. 하늘이 하실 일도 남겨두는 것이제. 하늘은 말없이 다 지켜보고 계시니께.”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한 구절 한 구절 글을 읽어나갈 때마다 마음을 울리는 부분은 자꾸만 늘어만 갑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빼곡히 포스트잇이 붙었습니다. 일일이 말할 수 없어 이 책은 말로 설명할 것 없이 소장하고 한 구절씩 곱씹어 읽어야 한다며 친구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몇 시간이면 다 읽을 거 같다고 말하던 친구가 후루룩 읽으면 안 되는 정말 값진 책이라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매일 하나씩 아까워하며 읽는다며 자기도 주변에 선물하겠다고 합니다.
시인이었기에 시처럼 아름다운 수필이 나온 걸까요?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었기에 아픈 기억까지도 아련하고 따뜻하게 풀어낼 수 있었던 걸까요? 그가 시대의 아픔을 시로 표현하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도 눈물 가득했던 꽃 같은 소년의 때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자신의 이름인 박기평이 아닌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이라는 뜻의 필명 ‘박노해’로 살았던 시인 박노해. 1984년 27살에 쓴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은 금서였는데도 100만 부가 발간되었다고 합니다. ‘얼굴 없는 시인’으로 살던 그가 1991년 군부정권 하에서 사형을 구형 받아 무기수로 7년 6개월 간 독방에 갇혔다는 사실을 많은 분들은 알고 계셨겠지요? 석방이 된 후에 민주화운동가로 복권되어 국가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도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거부했다고 합니다. 저라면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달라고 했을 텐데 말이죠. 그 이후에 그가 살아온 삶에 저는 참 어른을 만난 거 같아 기뻤습니다. 수월하고 편한 길을 택할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박기평이 아닌 박노해로 살고 있었습니다. 비영리단체 ‘나눔문화’를 설립해 ‘생명 평화 나눔’의 삶을 살고 계시더군요. 전쟁터와 난민촌을 찾아가 가난하고 힘든 아이들을 돕는 그의 행보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펜심으로 누군가를 찾아가 본 적이 없던 제가 시인 박노해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시집 ‘노동의 새벽’을 함께 읽게 되고 그의 사진전 ‘올리브 나무아래’를 보러 가기도 했습니다. 이 땅에 이런 어른들로 가득하면 전쟁도 미움도 없을 것만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기평에게 훈장님께서 하신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의 이름은 말이다. 저마다 깨끗한 비원이 담긴 것이고 이름을 부르면서 그 뜻을 일러주는 것이제. 네 이름대로 네 길을 걸어가면 이미 유명한 사람 아니냐. 다른 사람 이름 가리지 말고, 제 이름 더럽히지 말고, 자기 이름대로 살면 그게 유명한 사람 아니냐. 알겄느냐. 평아, 이 유명한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