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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남북단일팀,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
←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전서 우승한 남북단일팀이 꽃다발을 흔들고 있다.
1991년 4월 29일 남북이 하나 되어 세계를 제패했다. 이날 일본 지바현(千葉縣) 닛폰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결승전. 최초의 남북 단일팀인 ‘코리아’가 7000만 동포의 관심 속에 녹색테이블의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대는 대회 9연패를 노리는 중국이었다. ‘마녀’ 덩야핑이 버티는 ‘철옹성’이었지만 출발은 상큼했다.
제1, 2단식에 나선 유순복과 현정화가 덩야핑과 가오준을 각각 꺾어 2-0으로 앞서 나갔다. 다음은 환상의 복식조 이분희-현정화. 남북 단일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믿었던 현-이 조는 덩야핑-가오준 조에 2-1로 역전패했다. 이어 현정화도 제4단식에서 패해 2-2로 승부는 원점. 마지막 단식에 나선 유순복의 어깨에 ‘코리아’의 우승여부가 걸렸다. 유순복은 변칙공격의 명수 가오준과의 첫 세트를 과감한 백드라이브로 21-19로 이겼다. 유순복은 2세트도 13-17로 끌려가던 경기를 21-19로 뒤집으며 승리, 코리아팀에 감격적인 우승을 안겼다.
단체전 우승은 1973년 사라예보 승전보 이후 18년 만이었다. 시상식서 한반도를 그린 ‘단일기’가 오르고, 단일팀 단가인 아리랑이 연주되자 1000여 응원단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코리아팀 우승은 남북이 하나되어 이룩한 쾌거였고, 남북청소년축구 단일팀 출전으로 이어져 한반도 화해무드 조성에 큰 몫을 했다./조선
[1951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사망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학과 언어 분석을 통해 난해하고 사변적인 전통 철학을 폐기하고자 한 이단아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이면서 이론과 개인적 삶 모든 측면에서 수수께끼와 신비로 가득찬 인물이었다. 그의 개인사는 일반인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가 많았다. 오스트리아 철강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점, 자신이 설계한 누나의 집이 오늘날 건축사 교과서에 소개될 정도로 건축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점, 음악가 집안의 자식답게 음악에도 전문가였던 점, 자신의 연구에 몰두할 때는 노르웨이와 아일랜드 등의 시골에 묻혀 은둔자로 보낸 점, 철학에 방해가 된다고 막대한 유산을 형과 누나에게 준 점, 그의 저서 ‘논리철학 소고’에서 모든 철학적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해 직업 철학자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오스트리아에 귀향해 6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생활한 점 등 어느 것 하나도 신비롭지 않은 삶이 없었다. 러셀은 철학적 능력에 대해 자신을 갖지 못했던 비트겐슈타인을 철학으로 인도하고 가르친 스승이었지만, 후에는 자신이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웠음을 고백할 정도로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 지성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독특한 철학자였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계를 떠났다가 두 번째이자 마지막 책인 ‘철학적 탐구’를 통하여 자신의 초기 이론을 비판하면서 영국 케임브리지로 되돌아 올 때 경제학자 케인즈는 "신이 도착했다"라고 환영할 정도였다. 단 두 권의 책으로 두 철학적 조류, 그것도 상충하는 두 조류를 구성했다. 전통적인 사변철학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이론 자체는 어느 철학적 이론보다도 난해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분명 20세기의 이단아였다./조선
[1932년] 윤봉길 의사, 상해 홍구공원서 일왕 생일 경축식에 투탄
← 윤봉길, 거사에 앞서 태극기 앞에서 맹세하는 모습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하이[上海] 훙커우 공원[虹口公園]에서 개최된 일본의 전승축하기념식에 참석한 일본군 수뇌부를 폭살(爆殺)했다.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이기도 한 이날 윤봉길은 상하이 병공창[上海兵工廠] 주임 김홍일이 준비한 물통과 도시락에 폭탄을 장착해 식장에 던졌다. 이 의거로 상하이 파견군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이 즉사했으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타[植田謙吉], 주중공사 시게마쓰[重光葵], 총영사 무라이[村井] 등이 중상을 입었다. 김구의 지휘 아래 계획된 이 거사 직후 윤봉길은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를 거쳐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이 의거는 중국인들에게 한국인들의 독립열망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 임시정부가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의 후원 아래 항일연합전선을 펼쳐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2004년] 윤봉길 의사 의거 72주년 맞아 미공개 사진 대거 공개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왕 생일(천장절) 기념식장에서 의거를 일으켰던 현장의 미공개 사진과 자료가 의거 72년을 맞은 29일 공개됐다.
다큐멘터리 감독 김광만(더채널 대표)씨가 최근 일본 도쿄 국회도서관과 신문사 등을 찾아 발굴한 이들 자료 중에는 당일 던지지 못했던 도시락형 폭탄을 찍은 사진과 거사 직전 단상의 일본측 요인들 모습, 당시 일본 신문에 실린 윤 의사 가족 사진, 일본 내무성 보안과에서 작성한 의거 현장 상황도 등이 포함됐다.
윤 의사는 거사 당일 김홍일(金弘壹·전 외무부장관)이 마련해준 물통형 폭탄과 도시락형 폭탄 등 2개를 준비했다. 의심받지 않고 행사장에 지참할 수 있는 물건이 도시락과 물통뿐이었기 때문이다. 윤 의사는 물통형 폭탄을 먼저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 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河端貞次) 등을 사망케 했고, 도시락형 폭탄은 미처 던지지 못한 상태에서 체포되어 그해 12월 일본 가나자와 육군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사진 속 도시락형 폭탄은 보자기에 쌌던 것으로 보이며 뚜껑이 벗겨져 뒹구는 모습이 의거 당시의 긴박감을 전해준다.
이번에 발견된 사진들은 서울 양재동 시민의 숲 안에 있는 매헌기념관이나 윤 의사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세워진 충의사, 독립기념관 등이 소장하지 않은 것들로 의거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한편 29일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와 매헌장학재단은 서울 매헌기념관에서 김우전 광복회장, 안주섭 국가보훈처장, 김덕룡 기념사업회장 등이 참가한 가운데 기념식을 열고 윤 의사의 순국 의지를 기렸다. 상하이 루쉰 공원(옛 훙커우 공원)에 있는 기념관 매원과 충남 예산 충의사에서도 기념식이 있었다. 유석재기자 중앙일보 2004-04-29
[2004년] 윤봉길 의사 의거 72주년 맞아 자작한시(漢詩) 번역서 출간
← 1932년 거사 직후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됐을 당시의 윤봉길 의사. 검거보고서에 붙어있던 사진이다.
매헌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일왕 생일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진 의거가 72주년을 맞는 2004년 4월 28일 윤 의사가 자작한 한시(漢詩) 번역서가 출간됐다.
윤 의사가 의거 하루 전인 1932년 4월 28일 의거 장소를 사전답사하고 지은 한글시 ‘훙커우 공원을 답청(踏靑)하며’는 그 같은 대사를 앞둔 스물네 살 청년의 놀랍도록 침착한 모습에 더해 서정이 가득하다.
“처처(凄凄)한 방초(芳草)여/ 명년에 춘색(春色)이 이르거든 왕손(王孫)으로 더불어 같이 오세// 청청(靑靑)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강산에도 다녀가오// 다정한 방초여/ 금년 4월 29일에/ 방포일성(放砲一聲)으로 맹세하세. ”
‘시인 윤봉길과 지인(知人)의 서정시 340수’(역사공간, 진영미·김승일 역)가 의거 기념일을 맞아 출간돼 서정 시인으로서의 윤 의사의 면모를 드러냈다. 이 번역서는 보물 568호로 지정돼 충남 예산의 윤 의사 생가인 충의사에 전시 중인 시문집 다섯 편 중 ‘명추(鳴椎)’ ‘임추(壬椎)’ ‘옥타(玉唾)’ ‘한시집(漢詩集)’에 수록된 한문 시들을 처음 우리 말로 번역한 것들이다.
국민대 국사학과 장석흥 교수는 “많은 시들이 서정적인 인간애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윤 의사가 펼친 의열투쟁의 본질이 테러리즘이 아닌 인도주의에 바탕을 둔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평가했다./조선
[1854년] 푸앵카레 (Jules-)Henri Poincaré 출생
1854년 4월 29일 태어남 / 1912년 7월 17일 죽음
푸앵카레는 수학 분야 전반에 걸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과학철학자이다. 청소년기 때부터 수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눈이 나빠 칠판 글씨를 똑똑히 볼 수 없었으나 기억력이 비상해서 한번 읽은 것이나 들은 것은 거의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동형 함수 개념을 발전시키고, 무한차 행렬식의 수렴 문제와 미분방정식의 해에서 점근전개와 적분불변식의 새로운 수학 기술을 발견하는 등 수학분야에 대단히 중요한 기여를 했다. 또한 차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와 확률론의 기본법칙 도출도 시작했으며, 수학자로 명성을 얻은 뒤에는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과학과 수학의 의미와 중요성을 일반대중에게 설명하는 데 활용했다. 저서로는 <과학과 가설 La Science et l'hypothése>(1903)·<과학의 가치 La Valeur de la science>(1905)·<과학과 방법 Science et méthode>(1908) 등이 있다. 1906년 과학 아카데미, 1908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과학자가 자연을 연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용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연을 좋아하기 때문이며,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자연이 아름답지 않다면 연구할 가치가 없을 것이며, 자연이 연구할 가치가 없다면 삶 또한 가치가 없을 것이다."- 앙리 푸앵카레
[1978년] 고리원자력발전 1호기 상업운전 시작
1978년 4월 29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고리에 한국 최초 최대 규모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원자력발전소가 준공되었다. 가압경수형 원자로(PWR) 4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총시설용량은 313만 7,000kW이다. 두 차례의 석유파동 이후 에너지원의 다원화 정책의 성과로 1호기(58만 7,000kW)가 1971년 3월에 착공해 1978년 4월 29일에 준공했으며, 2호기(65만kW)는 1977년 3월에 착공해 1983년 7월에, 3·4호기(각 95만kW)는 1979년 4월부터 본공사에 착공해 3호기가 1985년 9월에, 4호기가 1986년 4월에 각각 준공함으로써 이 발전소는 국내 최대의 원자력발전단지가 되었다.
[1996년] 해운항만청, 독도 접안시설 건설공사 본격 착수
독도 방위와 물자수송을 위한 독도 접안시설 공사가 착공 1년11개월 만에 끝나 (1997년 11월) 6일 준공됐다. 그러나 준공식은 장소와 규모를 둘러싼 외무부와 해양부 사이의 의견대립으로, 독도가 아닌 울릉도 독도박물관 앞에서 열려 아쉬움을 남겼다. 이날 조정제 해양수산부 장관은 외무부의 반대에도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포항까지 내려왔다가 청와대의 긴급 불참 지시로 발길을 돌리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이날 오후 열린 준공식은 조 장관 대신 장승우 해양부 차관과, 김태식 국회 농림 해양수산위원장, 시공업체 대표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히 치러졌다. 독도 접안시설은 지난 95년 12월 독도를 방위하고 물자수송의 불편을 덜기 위한 목적으로 착공됐으며, 500t급 배를 댈 수 있도록 길이 80m의 물량장과 진입통로 100m, 간이 접안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이날 준공식과 관련해 주무부처인 해양수산부 관계자들은 준공식을 독도에서 치르지 못한데다 준공식 참석을 위해 포항까지 내려갔던 장관이 귀경하자 “독도가 우리땅 맞느냐”면서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이에 대해 외무부 쪽은 “독도 접안시설 준공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될 경우 독도가 우리 땅임을 대외적으로 시위하는 효과가 있으나, 국제사회에는 오히려 독도가 영토분쟁지역이라는 사실만 재확인시켜주는 꼴이 된다”고.
[1980년] 영국 출생의 미국 영화감독 히치콕(Hitchcock, Alfred, 1899~1980) 사망
영화 감독 앨프리드 히치콕이 1980년 4월 29일, 81세로 미국에서 타계했다. 히치콕은 독창적 영상기법으로 현대인들의 불안·공포 심리를 세련되게 다뤄온 영상의 마술사다. 몇 가지 점만 유념하면 대번에 그의 영화임을 알 수 있는 것도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다. 카메오(cameo)와 맥거핀(Macguffin) 기법, 게다가 미남배우와 금발의 여배우가 주연을 맡고 흑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100% 히치콕 작(作)이다. 히치콕은 150kg의 거구이면서도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는 것을 즐겼고, 줄거리를 좇는 관객들이 헛다리를 짚도록 속임수를 쓰는 맥거핀 기법도 보편화시켰다. 그는 배우에 대한 거침없는 독설로도 유명하다. 1925년 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1976년 마지막 영화를 찍을 때까지 52년간 53편의 장편 극영화를 남겼다. 무성에서 유성영화로, 흑백에서 컬러영화로 20세기 영화계를 풍미한 당대 최고의 감독이었다.
[1968년] 미국, 흑인들의 ‘빈자(貧者)의 행진’ 시작
'빈자(貧者)들의 행진'은 1967년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남부기독교지도자컨퍼런스(SCLC)의 지도부가 인권법 제정 등 투쟁전략(전술)로 시작한 캠페인이다. 이듬해 킹 목사가 암살 될 때까지 캠페인은 시작되지 않았고 킹의 리더십을 잃은 캠페인은 큰 성과를 얻지 못한 채 그해 6월 끝나고 말았다.
'빈자들의 캠페인' 구상은 킹이 2차 인권투쟁 기간 완성한 것이다. 이른바 1차투쟁의 전술과 2차투쟁의 목표를 결합한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 문제를 해결할 취지였다. 이 캠페인은 흑인들만의 투쟁에서 피부색을 넘는 연대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킹 목사는 이에 대해 "이 캠페인은 흑인들만을 위한 게 아니다"며 "미국에 사는 모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싸움"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미본토 원주민,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사람들, 멕시코 출신 주민들, 그리고 차별대우로 가난에 찌는 백인들과도 함께합니다."
SCLC는 빈자캠페인을 사상유래 없는 대중적 시민불복종 캠페인으로 만들겠다고 기획했다. 1차적으로 1만5천명의 시위대를 워싱턴디시로 모으는 것이었다. 의회와 정부기관에 경제인권을 로비하고자 했다. 특별히 빈곤해결을 위한 3백억달러 재정을 요구키로 했다. 고용확대, 최저생계비 확보, 빈곤층 주택문제 해결 등에 사용할 돈이었다.
하지만 캠페인을 시작하기도 전인 4월 4일 킹 목사가 멤피스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킹의 가족과 SCLC 지도부는 킹의 명예를 위해 이 캠페인을 그해 5월 12일 벌였다. 첫 시위대가 워싱턴디시에 모였다. 그리고 일주일 뒤 워싱턴몰에 시위자들을 위한 텐트와 임시천막이 등장했다. 매일 정부부처와 의회에 메시지를 전달했다.
킹 목사의 뒤를 이어 랄프 에버내티가 SCLC 의장자리를 이어받았으나 지도력은 크게 약화됐다. 게다가 저질 상업언론의 악의적 보도,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등으로 이어지며 캠페인은 당국의 확답을 끌어내지 못한 채 그해 6월 19일 막을 내리고 말았다.
[2004년] 애국지사 장봉숙 선생 별세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1935년 2월에 일본학생들이 한국학생들을 멸시하고 차별하는데 울분을 느끼고 강렬한 민족의식과 한국의 독립을 열망하게 되었다.
1941년 11월 경북 울진(蔚珍)에서 창유계(暢幽계)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부산(釜山)에서 동지들에게 ‘만주독립군(滿洲獨立軍)과 함께 조선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자’·‘일본이 미(美)·영(英)과 개전하고 조선은 독립이 된다’는 등의 항일발언을 유포하며 활동하다가 1943년 12월 11일에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1944년 7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1999년] 여성산악인 지현옥, 안나푸르나봉 등정후 하산중 실종
← 1997년 가셔브룸1봉 정상에 선 지현옥씨
지난 1999년 4월 29일 안나푸르나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여성산악인 지현옥씨가 우리 곁을 떠난 지 5주년이 됐다. 지현옥이라는 이름 석자를 떠올리면 지금도 콧날이 시큰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녀의 산악활동을 곁에서 지켜본 김세준(중앙일보 기자)씨가 지현옥을 다시 생각하며 5주기 추모글을 보내왔다.
한국인 가운데 에베레스트를 처음으로 등정한 산악인은 누구일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고상돈씨를 떠올린다.
그러나 한국 여성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자를 묻는 질문에는 말문이 막히기 마련이다.
영원한 히말라야의 산처녀 지현옥. 그녀는 신들의 거처인 히말라야의 꼭지점을 국내 처음, 그리고 세계에서 열여섯 번째로 등정했던 이 시대의 ‘원더우먼’이었다. 지현옥은 에베레스트 등정을 비롯해 남자들이 주축을 이룬 원정대 대장, 세계 최초로 가셔브럼Ⅱ봉(8035m) 무산소 단독 등반 등 역사가 일천한 한국 여성산악계에 수많은 기록을 남겼던 인물이다.
이제 고인이 된 지 벌써 다섯 성상(星霜)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산악인들 가슴에 깊이 각인됐던 그녀의 강렬했던 모습은 지워지질 않는다. 길지 않은 40평생 중 절반인 20년간을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산을 잡고 몸부림치게 만들었는가.
산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구도자의 모습으로 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던 산악인 지현옥의 발자취를 이 자리를 빌어 잠시 되새겨 본다.
1961년 충남 논산군 연산면에서 태어난 지현옥은 히말라야를 올랐다고는 믿지 못할 정도의 자그마한 체격과 가냘픈 몸매의 평범한 여성이었다. 청주사범대학(서원대 전신)에 입학하기 전만 하더라도 산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산악부가 독특한 서클”이라는 고등학교 선배의 말에 이끌려 산악부에 가입했다. 암벽등반을 하면서 산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됐고 대학 3학년 시절 남자 동기생 두 명이 군입대와 고시공부로 산을 멀리 하게 되자 자연스레 산악부장을 맡게 됐다. 이런 그녀에게 해외원정의 기회는 졸업 후 5년이 지난 뒤 찾아왔다.
1988년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6194m)를 등정했다. 여섯 명의 여성 클라이머로 구성된 매킨리 원정대에서 지현옥은 심한 고소증세를 느끼면서도 이를 극복하고 대원 중 가장 먼저 정상을 밟았다. 1993년 교보생명 사보 3월호에 실렸던 지현옥의 수기에는 당시의 고통스러웠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60㎏의 짐을 나르면서 들개처럼 헐떡거렸고 목에서는 피가 넘어왔다. 계속되는 구토는 막창의 그 무엇인가까지도 끌어 올리듯 지독하게 이어졌다.
희박한 산소로 인한 고소증세는 두개골이 빠개지는 듯한 고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이것이 등반이란 말인가?
이것이 인간이 할 짓인가?’하는 갈등 때문에 여기서 포기하고 그토록 우습게 여기던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투처럼 치러진 첫 원정에서 나는 내 자신에 보란 듯이 승리했다.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그것은 산 정상에 올랐다기보다는 내 자신의 가슴속에 존재하는 산에 올랐고 하얀 산은 그 전투의 장을 마련해 주었을 뿐이다.”
이후 89년과 90년에는 안나푸르나(8091m)와 캉첸중가(8586m)를 등반했다.
그리고 91년 서원대 산악부를 이끌고 중국 곤륜산맥의 무즈타그아타(7546m)로 원정을 떠나 7000m대에서 비박을 하고 후배 대원 한 명과 함께 등정하는 쾌거를 이뤘다.
여기서 지현옥은 고산 등반가로서의 자질과 대장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면서 이러한 경험은 2년 뒤 ‘93한국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로 이어지게 된다.
에베레스트 원정대원에 선발돼 현지 정찰 겸 적응훈련을 위해 92년 히말라야의 로부제(6183m)와 임자체(6119m)를 올랐다. 그리고 이듬해 32살의 나이에 13명의 대원을 이끌고 에베레스트 원정에 나서 5월 10일 오전 10시45분(한국 시간 오후 2시) 최오순(당시 26세), 김순주(25세)와 함께 정상을 밟았다.
그렇게 황금 같은 젊은 시절을 산에서 보내고 꿈에도 그리던 에베레스트를 등정했건만 이러한 영광은 그녀에게 한 순간의 꿈처럼 다가왔다 사라졌다.
자부심을 안고 귀국한 지현옥의 앞에는 영광과 찬사가 아니라 갖가지 험담과 시기·질투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모든 것이 잘못 알려진 것으로 판명됐지만 당시 지현옥에게는 치욕이자 좌절이었고 그녀는 “오랜 번민 끝에 등정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며 “가을에는 캉첸중가에 도전하겠다”고 밝혔었다.
프랑스 산악인 가스통 레뷔파는 “산은 하나의 다른 세계다. 그것은 지구의 일부라기보다는 동떨어져 독립된 신비의 왕국이다.
이 왕국에 들어서기 위한 유일한 무기는 의지와 애정뿐이다”라고 말했다. 삶의 의지와 히말라야에 대한 애정으로 철저히 무장한 그녀는 여성들만의 K2원정대를 꾸리는 것을 인생의 마지막 목표로 잡았던 것이다.
미국의 여성 산악인인 난다데비 언솔드는 “산은 우리를 태어나게 하고 다시 우리를 거두어들인다.
어차피 우리의 삶이란 신이 허락한 짧은 숨결이다”라고 말했다. 지현옥도 안나푸르나 원정에서 “1982년 한국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등반에 나섰고 하고픈 등반활동을 끊임없이 해왔으며 대자연 속에서 격렬하게 몸부림치다 대자연의 품에 안겼던 J모 선배가 몹시도 그리웠다”고 말했다.
등반기술을 가르칠 때는 사정없이 매서워 시어머니라고 불리지만 평소에는 후배들에게 자상한 선배로 인기만점의 지현옥. 매사에 치밀하고 완벽함을 추구하지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짙은 눈썹과 서글서글한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그리운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인간이 이상이라고 여기는-이루려고 해도 이루지 못하는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그녀의 열정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의 시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대신한다.
저기 모든 경계가 끝나고
길들이 사라지는 곳
침묵이 시작되는 그 곳으로
나는 천천히 다가간다.
그리고 밤을 밝힌다.
별들로, 이야기로,
멀리서 나를 기다리는
물결의 숨소리로,
새벽이 시작되는 그 곳
고 지현옥 약력
◎ 1961년 충남 논산 출생
◎ 충북 서원대학교 졸업
◎ 체육훈장 기린장(1993)
◎ ‘올해의 산악인 상’ 수상(1999)
◎ 매킨리 등정 (1988)
◎ 안나푸르나 등반 (1989)
◎ 캉첸중가 등반 (1990)
◎ 무즈타그아타 등정 (1991)
◎ 로부제, 임자체 등정 (이상 1992)
◎ 에베레스트 등정 (1993)
◎ 가셔브룸1봉 등정 (1997)
◎ 가셔브룸2봉 등정 (1998)
◎ 안나푸르나 등정 (1999) 후 하산길에 실종.(“가람과뫼”님 블로그에서 퍼옴)
[1901년] 일본 왕 히로히토(裕仁, 1901~1989) 출생
칭호 미치노미야[迪宮]이고, 다이쇼[大正] 일본 왕의 장자이며, 1916년 입태자의 의식, 1919년 성년의 예식을 거쳐, 1921년 다이쇼 일본 왕의 섭정이 되었고, 1924년 나가코 왕녀[良子王女]와 결혼, 1926년 12월 왕위에 올랐다.
중일전쟁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등 일본의 팽창주의 역사를 체험하였고, 1946년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서의 신격(神格)을 부정하는 ‘인간선언’을 발표하여 일본국 헌법제정과 함께 상징적인 국가원수가 되었다. 생물학을 연구하여 《사가미만[相模灣] 후새류도보(後鰓類圖譜)》 《나스[那須]의 식물》 등을 저술하였다.
[1879년] 영국의 지휘자 비첨( Beecham, Thomas, 1879~1961) 출생
세인트 헬렌스 출생.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했으나, 음악은 독학으로 하였다. 우연히 명지휘자 한스 리히터(Hans Richter)의 대역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음악계에 투신, 1905년 런던에서 지휘자로 데뷔하였다. 이듬해 자비로 뉴심포니오케스트라를 조직하고 그후로도 1908년 비첨교향악단, 1932년에 런던필하모니관현악단을 조직하고, 1946년에 로열필하모니관현악단을 재건하였다.
1910년 이후는 구미 여러 곳에서 교향악과 오페라를 지휘하면서 영국의 작품을 해외에 소개하고, 또 해외 작품을 영국에 소개하는 등, 영국음악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말년에는 미국 휴스턴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를 지냈다. 1916년 기사작위를 받았고, 같은 해 아버지의 사망에 의해 준남작(准男爵)에 습작되었다. 20세기의 세계적 명지휘자의 한 사람으로 세계 음악계에 공헌한 바 크다.
토마스 비첨은 1879년 4월 29일 영국 리버풀 근교의 세인트헬렌즈에서 태어나서 1961년 3월8일 런던에서 타계했다. 부친은 유명한 '비첨즈 피르스(환약)'의 사장으로서 음악 애호가인 부호였다. 토머스도 부친을 닮아 나면서부터 음악을 좋아하여 옥스퍼드 대학 재학 동안에는 학교를 빼먹고 독일까지 가서 오페라를 듣곤 하였다고 한다.
자식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싶다고 열망한 부친은 당시의 영국인답게 음악가로서 나서려는 자식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1898년의 일로, 부친이 음악 스폰서가 되어 할레 관현악단을 고향에 초청하였는데, 막 개막하기 직전에 명지휘자 한스 리히터가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대역을 협의하다가 한 사람의 단원이 "조지프 경, 아드님에게 시키면 어떨까요."라고 권유하였다. 단원의 일부에서 반대도 있었으나 배짱이 두툼했던 부친이 "좋아요. 해보게 하지요. 싫은 자는 나오지 않아도 좋소."하고 단언하였다. 이렇게 하여 토머스 비첨은 19세 때에 처음으로 정식 공연을 지휘했던 것이다.
그 후 부친과 화해한 비첨은 막대한 부친의 재산을 음악에 쏟아 넣게 되었다. 1910∼1916년, 비첨은 R.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처음으로 영국에 소개하는 등 오페라의 지휘를 중심으로 콘서트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1914년 '나이트'에 서위되었고, 한편 준남작의 위를 세습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콘서트 활동을 주축으로 하였고, 1947년에 스스로 창립한 로열 필하모니 외에도 자주 해외에 객원 연주하여 절대적인 명성과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비첨의 예술 스타일은 평생 '아마추어'가 가지는 음악에 대한 순수한 애정으로 일관되고 있었다. 만년에는 완전히 천의무봉 경지에 도달하여 악계의 '명물'로서 존경받고 사랑을 받았다. 토머스 경의 어프로치는 언제나 신선하였고, 세련된 프레이징, 음의 맑고 깨끗한 밸런스, 흐르는 듯한 음악의 선으로써 알려져 있었다.
하이든, 모짜르트를 즐겨 연주한 경의 <카르멘>전곡은 가장 엘레건트한 <카르멘>이다. 비제의 <교향곡 C장조>를 세상에 낸 것도 경이었다. 평생 딜리어스의 옹호자였던 경의 <딜리어스 명연집>(모두 에인절)은 세기말 유미주의의 극치이다. 어떤 곡이라도 음악적인 기쁨을 솟아나게 하는 것도 경의 특징의 하나였다.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하여 상당한 수의 복각 음반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딜리어스의 음악.(에인절)과 그 제2집(영국 EMI)은 불멸의 다큐멘트로서 빛나고 있다.
영국의 지휘자인 토머스 비첨과 맬콤 사전트는 사이가 나쁘다. 어느날 이 두 사람과 여러 사람이 모임을 가졌는데 사전트 경이 중근동 지방을 연주 여행했을 때 드릴을 겪은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하이파란 곳에서 예루살렘까지 자동차로 달릴 때 유목 민족인 베드윈족 들이 느닷없이 총을 쏘는 바람에 죽는 줄 알고 혼났읍니다"라고 말하자, 비첨 경은 매우 빈정대는 말투로, "베드윈족이 그처럼 음악에 이해가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는걸!"하고 말했다. 이 말은 곤 "베드윈족들이 그래도 사전트를 알아 주는군"하는 뜻이었다. 그러나 언뜻 비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전트는 한참 생각하다가 그제서야 자기를 비꼬는 줄 알고, 비첨에게 "아마 당신이 나처럼 당했더라면 까무라쳤을거요!" 라고 되쏘았다. 아무튼 이 두 지휘자는 서로 남의 말을 깍아내리지 않으면 못 배겼다고 한다.
[1429년] 잔 다르크(Jeanne d'Arc) 오를레앙(Orleans) 입성
← 잔 다르크, 필사본 〈La Vie des femmes celebres〉(1505)에 나오는 세밀화, 프랑스 낭트에 있는 Musee Archeologique Thomas Dobree 소장
전국(戰局)의 초점은 1429년 루아르강 중류의 오를레앙시 공방(攻防)에 있었다. 영국은 이곳을 함락하면 점령지 노르망디와 귀엔을 연결시킬 수가 있었다. 한편 황태자로서는 이곳을 빼앗기면 루아르강 유역으로부터 훨씬 남쪽으로 후퇴해야 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존망의 위기에 선 황태자 앞에, 그를 구하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다는 소녀가 나타났다. 황태자는 잔 다르크의 뜻을 받아들여 오를레앙수비대에 참가시켰다. 신앙의 열정이 넘치고 관행에 얽매임 없이 전투를 지휘하는 잔 다르크는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잔 다르크가 이끄는 창소대(槍小隊)는 날이 저물어도 전투를 계속하여 마침내 영국군의 요새 하나를 함락시켰다. 이것이 전세를 크게 바꾸어 그해 5월초, 영국군은 오를레앙에서 물러갔다. 오를레앙전투가 끝난 뒤에 잔 다르크는 랭스에서 거행된 샤를 7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북프랑스의 모든 도시를 차례로 방문하는 <왕의 순행>에, 발루아왕가의 <신의 증인>으로서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동행하였다.
[1961년] 충주비료공장 준공
← 충주비료공장 전경
1961년 4월 29일 충주비료공장이 착공 5년8개월 만에 준공됐다. 정부수립 이후 비료공장을 건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는 지난 1955년 5월 13일 미국 맥크로 하이드로 가본회사와 ICA(미국국제협력기구)차관자금 1천9백55만달러와 내자 15억환을 들여 한해에 요소비료 8만5천t을 생산하는 공장을 짓기로 계약을 체결했으나 완공하는데 든 건설비는 외자3천1백54만3천달러와 내자 27억5천만환이다.
이는 계약 당시보다 외자 56%, 내자 54%가 늘어난 것이다. 이밖에도 30개월을 기한으로 한 기술용역 계약체결로 인건비 2백만달러를 포함한 계약상의 경비 5백13만5천달러가 더 들었다. 이 때문에 요소비료 t당 생산비가 시가 7만9천환을 훨씬웃돈 13만2천환으로 올랐다.
이같이 추가자금이 많이 들어간 것은 고정보수와 실비청산제 계약을 적용, 맥크로회사 측이 계약당시보다 자재와 포장비, 운임이 크게 올랐다는 이유로 외자 91만4천달러와 내자 8억8백50만환의 추가자금을 요구한데다 그후 자금추가조치가 8개월이나 지연됐다는 이유를 내세워 다시 경비조로 2백78만달러 등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국제계약 체결에 미숙해서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조선
[1975년] 주월(駐越) 한국대사관 사이공 철수
← 베트남 난민들이 미 대사관 옥상에서 헬기에 오르고 있다.
1975년 3월 월맹군이 베트남에 대해 총공세를 감행한다. 티우 대통령이 하야(4월21일)하고 베트남 전역이 무법천지로 돌변하면서 주월(駐越) 한국대사관도 철수준비를 서두른다.
4월26일, 한국에서 파견한 2척의 LST함에 교민들을 실려보내 1차 고비는 넘겼지만 상황이 급박해지자 4월28일, 한국 대사관은 전원철수를 결정한다. 국기를 내리고 통신기기와 비밀서류를 소각했다. 100여명이 탄손누트 공항을 통해 빠져나갔다는 소식이 전해져 희망을 주었으나 곧 공항도 파괴돼 의지할 것이라곤 미군 헬기 뿐이었다.
29일 날이 밝았다. 집결지는 미 대사관 후문 헬기장. 이미 3000여명의 각국 난민들로 통제불능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다행히 오후 4시부터 미군 헬기가 난민들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것이 목격됐다. 교민탈출을 위해 미국측과 만반의 준비를 다 갖췄다고 판단한 김영관 대사 일행은 오후 6시경, 헬기를 타고 미 대사관을 떠났다.
월남 패망일인 4월30일 새벽 4시15분, 밤샘한 일부 교민이 헬기로 미 대사관을 벗어나고 마지막 남은 9명의 공관원과 165명의 교민들이 마음을 조아리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4시30분, 이륙하는 헬기만 보일 뿐 착륙하는 헬기는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생명선이 끊긴 것이다. 사이공에 내버려진 교민들은 1년 안에 모두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들의 철수를 도왔던 이대용 공사와 서병호ㆍ안희완 영사 세 사람은 현지 감옥에서 5년간을 더 보내야 했다. 1980년 4월12일, 마침내 그리던 조국 땅을 밟았다./조선
그밖에
2004년 박태영 전남지사 투신자살
2004년 다목적 실용위성 ‘아리랑 2호’ 본체 핵심부품 국산화 작업에 성공, 세계 최고 수준의 고정밀 관측 가능
2003년 근무중 얼굴흉터 남녀보상 똑같도록 국무회의 시행령 개정
2003년 ‘제2건국위원회’ 4년 6개월 만에 해체
1997년 화학무기 금지협약(CWC) 발효
1992년 LA 흑인폭동으로 58명 사망, 2천383명 부상
1989년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세르지오 레오네 사망
1987년 시화지구 간척사업 착공
1986년 고리원자력발전 4호기 최초 발전
1985년 서울서 태평양경제협력회의 개막
1982년 폴란드, 구속자 1천명 석방
1981년 언론중재위원회 업무 개시
1980년 부산 동국제강 종업원 1000여명 임금, 상여금 인상 요구 농성 끝에 방화, 파괴
1980년 동양 최대의 대웅전 ‘설법보전’ 충북 단양 구인사에 세워져 낙성
1979년 서울서 제8회 세계여자농구대회 개막
1972년 남북직통전화 비공식 개통
1969년 나시루딘 말레이시아 국왕 내한
1965년 도미니카의 쿠데타, 내란으로 발전
1964년 한국-인도 무역협정 조인
1956년 프랑스군, 인도차이나서 완전 철수
1950년 국립극장(서울특별시의회 의사당)에 창설
1944년 포루투갈의 대통령(1915~1917, 1925~1926) 마샤두 사망
1908년 광무 신문지법 개정
1899년 빅 밴드 재즈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미국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듀크 엘링턴 출생
1886년 미국-일본 범인인도조약 조인
1864년 캐나다 열차 탈선 사고로 60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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