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 일본이 장구한 문화 교류를 이어올 수 있었던 주요한 매개는 한자였다. 한자의 종주국으로서 중국은 이러한 동아시아 문화 교류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었고 문화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동아시아의 패권은 그 전쟁의 승자인 일본으로 넘어가고 동아시아 근대 어휘의 운명 역시 이때 결정지어진다. 일본의 신조어들(‘일본어 신명사’)이 중국어에 역유입되었고, ‘일어 차용어’가 서양의 근대 사상과 개념을 담고 새로운 문물을 가리키는 지시어가 된 것이다.
’혁 명’, ‘공화’, ‘자유’, ‘사회’, ‘경제’, ‘관계’, ‘영향’ 등 중국 고전에 있던 단어들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으며, ‘추상’, ‘주관’, ‘철학’, ‘명제’, ‘긍정’, ‘부정’, ‘과학’, ‘미술’, ‘부동산’ 같은 말들이 일본 메이지 초기에 번역어로 새로 고안되었다. 서양 근대 문명을 계기로 이루어진 어휘 교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끝나게 되는데, 이 시기 이후 일본과 중국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청일전쟁 전후의 시기에 중국에 유입된 일어 차용어들의 실태와 유입 경로를 서지학에 기반해 실증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아울러 현대 중국어 중에서 표기는 동일하지만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 번역어’가 분명한 것을 추출해 그 형태 및 의미 출전 확인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문화사와 사상사 연구뿐만 아니라 어휘 연구 분야 자체에서도 필요한 기초 작업이다. 특히 102개 단어의 역사를 서지학적으로 기술한‘어지편’에 소개되고 있는 ‘개인’, ‘아령’, ‘마분지’, ‘정서’, ‘체계’, ‘시민’과 같은 102개 단어들의 면면을 통해 근대 중일 간의어휘 교류에 투영되어 있는 동아시아 근대화의 여정이 어디로 향하게 되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