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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8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13주)
믿음의 사람-빵을 먹는 사람들(3)
잠9:1~6; 엡5:15~20; 요6:51~58
우리는 오늘 오랜 만에 구약 말씀으로 잠언을 읽었습니다. 잠언은 구약의 대표적인 지혜문서로, 지혜롭게 사는 길을 다룬 책입니다. 여러분,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한동안 소위 처세술이나 자기계발에 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카네기의 처세술이나 탈무드의 처세술 등 소위 처세술의 법칙을 모아 만든 책들이 팔리고 있고, 유명한 자기계발서들은 베스트셀러 그룹에 속해 있을 것입니다. 처세술에 관한 책과 자기계발서가 동급으로 취급받아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책들은 인간과 인간과 인간관계를 너무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해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사전에 보면 “처세술”이라는 말은 “세상일 또는 사람들의 관계를 풀어가는 수단이나 방법”이라고 풀어놓고 있는데, 그렇다면, 처세술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영어로 풀이해 놓은 것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 뜻이 더 확 다가옵니다. “the secret of success in life”, 그러니까 “인생의 성공 비결”이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그렇게 보면 잠언을 처세술에 관한 책이나 자기계발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지혜라는 것이 잠언이 말하는 처세술과 같은 것인가? 그렇다고 할수도 있고 아니라도 할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를 그렇게 하나의 층으로만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지혜문서에 속하는 책들은, 잠언을 비롯해서 전도서와 욥기, 그리고 아가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에도 지혜시편이 여럿 있고, 신명기도 지혜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정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외경에는 집회서와 지혜서라는 아주 중요한 지혜문서가 들어 있습니다. 가톨릭 성경에는 이 두 책을 포함시켰지요.
사실 지혜문서는 구약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당시 이집트와 중동 지방에는 유명한 지혜문서들이 많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가령 바빌론의 지혜서라든가 이집트의 지혜서는 매우 유명했지요. 당시 지혜로운 사람이란, 당시의 인문학, 사회학, 심지어 자연과학을 탐구한 결과, 인생과 세상의 질서를 알고 자신의 삶을 거기 맞추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지혜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훈”을 총칭해서 부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지혜는 학교를 통해서, 혹은 스승을 통해서 전수되는 일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들은 어떤 지역이나 민족 혹은 종교에 상관없이 전해져 내려왔겠지요. 그리고 이런 지혜들은 지역, 민족, 혹은 종교를 넘어 서로 교환되었습니다. 국제 교류가 일어난 것이지요. 그래서 지혜문서는 당시 이집트와 중동에서 서로 교류하여 보편적이고 국제적이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특정한 종교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거지요.
따라서 우리 잠언에도 보면, 이집트의 유명한 지혜서인 “아멘엠호페의 교훈”이라는, 이집트 지혜스승의 지혜서가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새번역 잠언22:22절 이하를 보면 1번부터 30번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는 것을 보게 될텐데, 이 부분은 바로 이집트의 “아멘엠호페의 교훈”에서 가져왔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지혜는 잠언에 주로 나오는 인과응보적인 일종의 처세훈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혜가 발전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처음에는 대중적인 속담 등으로 민간에서 단순히 구전으로 전달되다가, 이것이 왕궁(솔로몬 왕)을 중심으로 교육되고, 나중에 바빌론 포로기 이후가 되면, 지혜는 점점 더 체계화되면서 지혜란, 숨어서 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뜻과 원리를 바로 아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지혜는 의인화되어 하나님의 아들 혹은 딸과 같은 존재로 인격화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잠언에는 이런 발단 단계가 모두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잠언은 한 시대의 지혜가 아니라, 여러 시대의 지혜들이 모여져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오늘 읽은 잠언9장의 말씀을 보면, 지혜가 의인화되고 있지요? 이것으로 보아 이 본문은 좀 후대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의인화된 지혜는 아주 큰 집을 짓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특별히 어수룩한 사람(<페티> 복수:<프타임>)과 지각이 모자라는 사람(<카살-렙>을 초청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지혜의 잔치에 와서 먹고 마시면서 어리숙한 길(<프타임>)을 버리고 생명을 얻고(<위켜유>, 명철의 길(<버데렉 빈나>)을 따라가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어수룩한 자들은 그 어리숙한 길을 버리고 지혜를 배워 생명을 얻으라는, 지혜로의 초대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어수룩한 사람(개역: 어리석은 사람)은 <페티>(복수<프타임>)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너무 나이브해서 뭘 모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사리분별을 못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숙맥”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에 비해서, <에빌림>, 즉 “어리석은 사람”(개역: 미련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도덕적인 결함이 있는, 세상을 잘못 살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둘은 댓구로 같이 쓰이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어수룩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어수룩한 것을 좋아하려느냐? 미련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지식을 미워하려느냐?)
오늘 지혜의 초대는 이런 어리숙한 사람들(<프타임>)을 생명의 길로, 명철의 길로 초대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지혜의 초대를 읽다보니, 예수님의 “혼인잔치의 비유”가 생각이 납니다.(마태22:1~14; 누가14:15~24)
어떤 사람이 혼인잔치(마태, 누가는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는 종들에게 사람들을 모셔 오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밭을 봐야 하오”,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을 시험하러 가는 중이요”, “내가 장가들어 아내를 맞이하였소” 그러면서 잔치 초대에 응하지 않고는 다 자기 볼일 보기에 바빴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나중에는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지요. 그러자 잔치를 베푼 사람은 크게 노해서,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 그러니 너희는 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라고 명령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명령합니다.)
큰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초대하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이 거절하는 이미지는, 오늘 지혜가 어수룩한 사람을 초대하는 이미지와 닮아 있습니다. 오늘 잠언에는 초대를 거절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우리는 실제로 어수룩한 사람<프타임>이나 어리석은 사람<에빌림>이 지혜의 초대에 응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실제로 잠언1장 20절 이하를 보면,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고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머리에서 외치며 성문 어귀와 성 안에서 말을 전합니다. 뭐라고 합니까? “어리숙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어수룩한 것을 좋아하려느냐? 비웃는 사람들아, 언제까지 비웃기를 즐기려느냐? 미련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지식을 미워하려느냐?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보여주고, 내 말을 깨닫게 해주겠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불러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내가 손을 내밀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도리어 너희가 내 모든 충고를 무시하며 내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비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운 일이 닥칠 때에, 내가 조롱하겠다.”(잠1:22~26)
이렇게 잠언에는 지혜는 간절한 초대하고 있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귀를 닫고 있다는 이야기가 여러 군데 나옵니다. 8장1절 보십시오. “지혜가 부르고 있지 않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고 있지 않느냐? 지혜가 길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자리를 잡고 서 있다. 마을 어귀 성문 곁에서, 여러 출입문에서 외친다.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른다. 내가 모두에게 소리를 높인다. 어수룩한 사람들아, 너희는 명철을 배워라. 미련한 사람들아, 너희는 지혜를 배워라...”(잠8:1~5)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혜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더 나아가 우리는 지혜가 베풀어주는 온갖 은총과 선물을 다 누리고 사는 지혜로운 사람들일까요? 지혜가 초대하는 잔치에 기꺼이 응하는 사람일까요? 요즘 처세술이나 자기계발에는 열성인지 몰라도 정작 “지혜”가 부르는 소리에는 귀를 막고 살고 있는 게 우리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마도 지혜가 부르는 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좋겠습니다. 그럼 오늘 우리에게 지혜가 초대하는 잔치는 어떤 것일까요?
오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다시 식탁(잔치)으로 초대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예수님은 이 빵의 식탁에 참여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의 초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빵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이 흘러들어오는 통로입니다. 이것을 사크라멘트(성사)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대인데, 보이는 물질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선물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적인 축복이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로 간주되는 물질들을 통해 전달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물질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물질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을 보고, 영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을 통해 구체화 됩니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는 빵과 포도주로 성만찬을 행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은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빵과 포도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에 대한 왜곡과 탐욕과 집착으로 그 은총을 고스란히 누리고 있지 못하지만, 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의 통로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을까?” 반문할 것이 아니라, 그 빵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보고 그 빵을 먹게 하여 주십시오, 그 식탁에, 그 지혜의 잔치에 제대로 응답하게 하십시오, 간구해야 할 일입니다.
지혜가 초대하는 잔지, 그리고 지혜자를 넘어 지혜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초대하는 잔치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그 잔치에 참여하는 의식에 참여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늘잔치에 참여하라는 초대입니다. 이 초대는 지혜로운 사람, 명철한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데, 지혜로운 사람, 명철한 사람은 우리 삶의 숨겨진 바탕을 깨달아 아는 사람입니다. 지나가는 것은 지나가는 것으로 알고, 영원한 것은 영원한 것으로, 사랑의 숨겨진 바탕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날 최상의 지혜는 우리의 숨겨진 바탕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사실을 바로 아셨고, 그래서 그분은 지혜자, 아니, 지혜 자체가 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최고의 지혜는 예수님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이 말은 너무 자주 사용되어, 이 말의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지 못하고, 그 의미가 훼손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아는 것, 즉 우리의 삶은 숨겨진 사랑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이것을 행하고 누리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먹는다”(8번)와 “산다”(6회)라는 말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입에 넣고 씹어서 맛을 보고 삼키고 소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이해가 아니라 경험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입에 넣고 씹어서 맛을 보고 삼키고 소화하는 자체가 중요합니다. 먹어서 소화되는 과정을 이해했다고 해도 실제로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먹어서 소화되는 과정을 이해 못해도, 먹으면 삽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먹어서 입에 씹어 삼키는 과정까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소화시켜서 생명을 얻는 과정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삶을 머리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 지혜, 다시 말해 “숨겨진 사랑의 바탕”도 우리가 거머쥘 수 없습니다. 머리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나 이성이 쓸데없다는 뜻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은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이 먹는 것을 옆에서 아무리 많이 보고 분석하고 이해해도 자신이 먹고 소화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내 빵은 내가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에게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에베소서에서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데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술에 취하지 말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고,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찬송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지혜를 얻는 아주 좋은 길입니다. 술에 취하지 말라는 것은, 정신을 흐리게 하거나 흐트러뜨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지금 여기를 놓치지 말고, 알아차리고 살라는 것이지요. 마음을 모으는 것이지요. 향심기도와 침묵과 묵상으로 마음을 모으십시오. 그리고 특별히 가슴으로 찬송하라고 합니다. 테제 노래는 이 찬송에 아주 적합합니다. 그리고 감사입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감사를 찾는 일은 지혜에 이르는 가장 좋은 지름길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나의 삶의 바탕이 되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께 마음을 여는 삶, 지혜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