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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四十四.
심순문(沈順門) 묘갈명(墓碣銘) - 김안국(金安國)
증(贈) 통정 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겸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ㆍ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ㆍ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ㆍ상서원 정(尙瑞院正) 심공(沈公)과 숙부인(淑夫人) 신씨(申氏)를 통진현(通津縣) 동쪽 옹정리(瓮井里)의 간좌 곤향(艮坐坤向)의 언덕에 합장(合葬)하였다.
그 아들 이조 정랑(吏曹正郞) 심연원(沈連源)과 전설사 수(典設司守) 심달원(沈達源)과 생원인 심봉원(沈逢源)과 심통원(沈通源)이 바야흐로 시묘살이를 하면서 가장(家狀)을 나열하여 나에게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나는 공의 문하에서 배우는 데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신진(新進)으로 조정의 반열에 참여하면서부터 공의 풍채와 거동이 의젓하였고 말씀과 기상이 크고 굳센 것을 보고서 그 가슴속에 지킨 바 지조가 대체로 반드시 남들과는 다른 것이 있음을 상상하였는데, 오늘 또 그 가장을 보니 그의 평생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더구나 그 부인은 내 어머니의 사촌 언니의 딸로서 그 부덕의 실상과 규범(規範)의 아름다움에 대해 온 문중이 칭찬하는 것을 내가 소상하게 알고 있다. 비록 옛 사책(史冊)에 일컬은 바 현부인(賢婦人)에는 미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글 때문에 묘갈문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살펴보건대, 공의 휘(諱)는 순문(順門)이요, 자(字)는 경지(敬之)로 청송부 사람이다. 고조부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청성백(靑城伯) 휘 덕부(德符)이고 증조부는 대광 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 휘 온(溫)이니 곧 우리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부친이다.
왕후의 동생은 수충 보사 정난 익대 순성 명량 경제 좌리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대광 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청송 부원군(靑松府院君) 공숙공(恭肅公) 휘 회(澮)니, 이 분이 공의 조부이다.
증 순충 적덕 보조공신(贈純忠積德補祚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 휘 원(湲)은 공의 아버지이다. 그 부인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는 중군 부사정(中軍副司正) 이의구(李義坵)의 딸이고 종실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증손인데, 성화(成化) 원년(元年)인 을유년(乙酉年, 1465, 세조 11)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렸을 적에는 차분하고 말이 없었으며 자라면서 보통 아이들보다 우수하였다. 그러나 참판공이 일찍 세상을 떠나 집에서 아버지의 엄한 훈계를 듣지 못하였으므로 열너댓 살이 될 때까지 학문에 대한 뜻을 세우지 못하였는데, 어머니가 몹시 우려하여 불러서 나무라고 타이르자 공이 바로 깨우치고 감동하여 스승을 찾아가 수업하며 부지런히 애써 게으르지 않고, 비록 비와 눈이 내리더라도 거르지 않았다.
학업이 나날이 성취되었으므로 조부인 공숙공(恭肅公)이 매우 기뻐하며 여러 자손 가운데 특별히 사랑을 모아 주었고, 늘 공이 자라서 원대하여지기를 기대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병오년(丙午年, 1486, 성종 1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홍치(弘治) 을묘년(乙卯年, 1495, 연산군 원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승문원(承文院)에 뽑혀 들어가서 정자(正字)와 저작(著作)을 거쳐 박사(博士)에 이르렀고, 사직(史職)을 겸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참수(參修)하였다. 승급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고 사헌부 감찰(監察)로 전직되었다가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의 경사(京師)에 다녀왔다.
얼마 후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발탁되어 지제교(知製敎)에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과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였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겼다가 다시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옮긴 뒤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여 지제교ㆍ경연 춘추관과 승문원의 직책을 겸하였으며, 여러 번 병조 정랑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장령(掌令)을 지냈다.
천거(薦擧)를 받아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임명되었다가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고 다시 사관(史官)을 겸하였다. 조정에 들어온 지 10년이 되었는데, 늘 청렴하고 삼가고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여 비록 작은 일이라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 직위에 있으면서 그 직분 다할 것을 생각함은 인신(人臣)의 분수이다.”고 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504, 연산군 10)에 연산군이 거칠고 난폭하여져서 나랏일에 대하여 직언(直言)한 신하들을 뒤따라 원수로 여겨 거의 다 죽이고 귀양 보내었는데, 공도 또한 여기에 함께 엮이어서 개령현(開寧縣)으로 유배되었다.
연산군이 노(怒)하여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공을 체포해 옥(獄)에 가두었다가 마침내 비명(非命)에 빠뜨렸는데, 불행을 당하던 날에도 공의 신색(神色)은 안온하였고, 조용히 재배한 후 형을 받으니, 이해 12월 5일이었다. 사람들이 원통하고 애석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향년 40세였다. 이듬해 2월에 검소하게 장사지냈다. 정덕(正德) 병인년(丙寅年, 1506, 중종 원년) 9월에 중종이 즉위하자 공에게 지금의 벼슬을 추증(追贈)하였다. 공은 그 천품(天品)이 정성스러웠고 신중하고 중후하였으며 학력으로 북돋우니 그 덕량이 더욱 성취되었다.
마음을 세움이 정대하고 엄격하여 지키는 바가 있었으므로, 바라보면 그 모습이 의젓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났다. 안으로는 실로 너그러워서 경계[畦畛]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공과 더불어 교류하는 것을 즐거워하였다. 한때 공을 재상의 직위에 오를 인물로 기대하였는데 천도(天道)가 어그러지고 운(運)이 흉천(凶舛)한 때를 만났으니, 원통하도다!
공은 효성과 우애가 지극히 돈독하였다. 어머니를 섬기는 데는 안색을 살펴 봉양하였고 마음을 어기는 일이 없었으며, 제사를 받들 때는 반드시 정성을 다 쏟았다. 정해년(丁亥年, 1467, 세조 13) 난리 때 참판공이 함흥에서 죽었는데, 공이 매우 어렸을 때였다.
장성해서는 슬피 사모하고 애통한 마음을 품어 화려(華麗)한 것은 물리치고 매우 소박하게 지내면서 일생을 마칠 것 같이하였다. 누님이 먼저 죽었는데 공이 누이를 꿈에서 볼 때면 꼭 종일토록 소복(素服)을 하였으며, 친구가 상(喪)을 당했을 때에는 힘써 부호(扶護)하여 그 힘과 마음을 다해 주고서야 그만두었다.
자녀들을 대할 때에는 엄하면서도 자애로웠고 노복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너그럽게 대하고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공을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평생토록 영리(營利)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과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다.
처신에 정한 바가 있었고 위급할 때라도 실수가 없었다. 또한 상도(常道)를 벗어나 지나치게 과격한 행동은 일찍이 하지 않았다. 일을 처리하고 만물을 다루는데 한결같이 정성과 신의로써 하였다. 그렇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바로잡으니 사람들이 거스르지 못하고 더욱 공경하고 복종하였다. 공의 옳은 행동에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부인(夫人)은 평산(平山)의 명망(名望) 있는 가문으로서 휘 숭겸(崇謙)은 고려를 도와서 삼한(三韓)을 평정하여 개국 원훈(開國元勳)의 으뜸이 되었는데,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증조부 휘 경종(敬宗)은 증 숭정 대부 판중추원사(贈崇政大夫判中樞院事)였고, 조부 휘 수복(守福)은 형조 도관 정랑(刑曹都官正郞)이었으며, 아버지 신영석(申永錫)은 사헌부 감찰이었다.
어머니 허씨는 증 영의정 양천 부원군(陽川府院君) 허손(許蓀)의 딸이며 명상(名相)인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과 문정공(文貞公) 허침(許琛)의 누이로, 어진 덕을 지녔으며 경서와 사적(史籍)에 통하였고 집안의 범절을 잘 익힌 사람이었다.
신씨 부인은 성화(成化) 정해년(丁亥年, 1467, 세조 13)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훈도를 받아 그 성품은 온화하고 정숙하였으며 지조가 곧았고 은혜로웠다. 그리고 전기(傳記)를 대강 익혀 그 대의(大義)를 통달하였다. 공을 섬기는 데 공경하고 순종하였으며 조심하고 삼가서, 가정 일에 있어서는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고 반드시 공에게 아뢴 다음에 처리하였다.
공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정성을 다하여 받들어서 도왔다. 세속의 투기 같은 습성은 말과 행동에서 전혀 볼 수 없었으므로 공과 교유하던 사람들 사이에 그것을 듣고는 부인이 이렇게 하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여기어 때때로 시험하면서 모두 탄복하였다.
공의 모부인(母夫人)이 연세가 백세에 가까우나 지금까지 강녕하였는데, 부인이 날마다 섬기기를 극진히 효도하여 늘 집안 일을 뒤로 미루고 밤낮으로 그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앉거나 누울 때에 반드시 몸소 부축하였고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는 데 있어서 고루 갖추어 빠뜨림이 없었고 더러 물러나 거처하는 집에 있더라도 모자라는 음식은 고루 장만하여 보낸 것이 길에 연달렸다.
부인은 조카들도 친자식같이 돌보아서 동생인 서령(署令) 신원(申援) 부부가 잇따라 먼저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이를 서러워하고 슬퍼하여서 말할 때마다 울먹이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초상 때에도 힘껏 도와주었고 그 유자녀들은 본인 소생보다 더 은혜로 길렀다.
혼인을 못한 자가 있으면 모두 맡아서 그 비용과 차림새를 마련해 주었고 친척 가운데 굶주리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고루 나누어주었다. 항상 옛사람들이 함께 사는 의리를 생각하여 말하기를, “옛적에 장공예(張公藝)는 9대 동안을 한 집안에서 살았고 최효분(崔孝芬)의 집은 한 푼의 돈과 한 척(尺)의 옷감일지라도 사실(私室)에 들이지 않았다.
비록 고금이 달라져서 분가(分家)하여 갈리어 살지라도 마땅히 옛사람들이 도탑게 화목하였던 것과 같이 마음먹어야 한다.”고 하였다.
가정 내에서는 어질고 너그러워지는데 힘썼으므로 노비들이 잘못을 저질러 언짢아도 매를 들지 않았고 또한 모진 말로 가혹하게 꾸짖지도 않았다.
항상 며느리에게 훈계하여 말하기를, “옛날 도잠(陶潛)은 시종(侍從) 한 사람을 그 아들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이도 또한 인간이니 잘 대해 주라.’고 하였다. 후한(後漢) 때 유관(劉寬)은 시비(侍婢)가 국그릇을 엎었어도 성내지 않았고, 수(隋)나라 때 우홍(牛弘)은 동생이 소를 죽였어도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것을 본받아야 된다.”라고 하였다. 자상하고 측은한 마음이 속에 쌓여 밖으로 드러나서 그 언행(言行)에 나타남은 정성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품이 밝게 통달하여서 길흉과 의지하고 믿을 이치를 능히 알 수 있었으므로, 빈궁(貧窮)과 영달(榮達), 얻음과 잃음[得失]의 사이에서 근심하지 않았다.
매양 공자의 말씀을 외우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에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 하였고, 한 가지 일의 성패(成敗)를 당하면 문득 말하기를, “어찌 화복(禍福)을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아들들이 낙방해도 슬퍼하지 않았고 급제해도 또한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여러 아들들에게 친히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을 가르쳐서 의로운 방향으로 인도하여 모두 한때의 드러난 사람이 되었다. 부인의 덕이 규문(閨門) 안에서 나타나서 일가 친척에게 퍼지고 진신(縉紳)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리하여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멀고 가까운 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공경하고 우러렀으며 본받았으니, 그러므로 공의 아름다움에 짝하여 더욱 빛을 내었다고 할 수 있다.
갑자년(甲子年, 1504, 연산군 10)의 화(禍)로 (공이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울부짖고 먹지 않아서 거의 생명을 잃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는데, 이때부터 공을 애모(哀慕)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면서 친척과 이웃의 수연(壽宴)이나 혼례(婚禮) 같은 각종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제사는 반드시 몸소 주관하여 정성을 다하였고, 제삿날이 든 달에는 고기와 양념을 입에 대지 않았다. 공을 뒤따르지 못한 것으로 항상 한(恨)을 삼았고 세상에 오래 사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았으며, 질병에 약을 즐겨 복용하지 않았고 속히 지하로 공을 따라 가기를 빌었다.
가정(嘉靖) 7년 무자년(戊子年, 1528, 중종 23) 정월 28일 질병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나니 향년 62세였다. 내외(內外)의 조카들과 노비들이 부모상을 당한 것 같이 가슴을 치며 슬피 호곡(號哭)하였으며, 친인척과 이웃에 이르기까지 유달리 슬퍼하여 조상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 부인의 현덕은 이 세상에서는 짝할 것이 없다.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 글을 지으려고 보니 부인에 대한 찬사가 너무 많아서 나는 그것을 다 기록할 수 없다. 나는 그것으로 부인의 덕을 오래도록 드러내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지 부인에 대한 찬사가 넘쳐 나는 것은 걱정되지 않는다.
유독 이상한 것은 하늘이 순일(純一)하게 타고난 자질을 후(厚)하게 해놓고는 운[祿命]에 있어 일치하지 않게 박잡(駁雜)되도록 하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시보(施報)의 즈음에 유감이 많게 하였으니, 과연 무슨 일인가? 그해 4월에 공의 묘소 왼편에 부장(祔葬)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되어서 마침내 그 뒤를 따랐으니, 부인에게 자못 남은 한(恨)은 없었을 것이다.
네 아들 중 장남인 심연원(沈連源)이 병자년(丙子年, 1516, 중종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임오년(壬午年, 1522, 중종 17)에 급제하였으며 병술년(丙戌年, 1526, 중종 21) 중시(重試)에까지 급제하였다.
차남인 심달원(沈達源)은 정축년(丁丑年, 1517, 중종 12)에 급제하여 일찍 청화직(淸華職)을 역임하였으며, 삼남인 심봉원(沈逢源)은 병자년(丙子年, 1516, 중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사남인 심통원(沈通源)은 기묘년(己卯年, 1519, 중종 14) 생원시에 합격하여 함께 문행(文行)과 영예(令譽)가 있으니, 공과 부인의 후광(遺慶)이 여기에 촉망하였음일진저.
심연원은 한성 판윤(漢城判尹) 김당(金璫)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심강(沈鋼)이고 모두 아직 어리다. 심달원은 병조 참판 윤희인(尹希仁)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아 심진(沈鎭)ㆍ심자(沈鎡)ㆍ심전(沈銓)ㆍ심수(沈鐩)이고, 딸 하나는 종실(宗室) 황양정(荒壤正) 이수린(李守獜)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모두 아직 어리다.
심봉원은 형조 정랑 김현조(金顯祖)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심건(沈鍵)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심통원은 종실 덕림군(德林君) 이자(李孜)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심전(沈錪)과 심뇌(沈鐳) 및 딸 하나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현묘(玄妙)한 이치 심원(深遠)하여 뉘 이를 주장하기에,
탁청(濁淸)과 순수하고 박잡(駁雜)함을 어찌 다 기록하겠는가?
길(吉)하게 부여받으면 순후한 것이 함께 할 것이고 흉(凶)한 자질을 타고나면 패덕(悖德)하도다.
영구토록 이치는 환히 밝아 만인(萬人) 중에 전체가 같으나 1인만이 착오되나니,
뉘라서 여기에 개탄하며 하늘에 힐책할 것인가?
아름다운 이 부부(夫婦)는 순수하고 올바른 행위 복응한 몸으로,
정성스레 인후(仁厚)하여 법도를 따르고 상서로움 답습하였는데,
어찌하여 그 보시(報施)가 반대로 되어 괴상한 재앙에 걸려 넘어졌도다.
음흉하게 속이는 자에겐 조장(助長)해 줌이 많으나 자량(慈良)한 이에겐 인색하였는데,
수(數)가 운(運)과 만나게 되면 정해진 것도 혹시 그렇게 안 될 수 있었도다.
아! 어떻게 위탁하였던가? 징험이 아들들에게 있도다.
대대로 성대한 경사 이어져 영원토록 이 빗돌을 지킬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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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國朝人物考四十四.
沈順門 墓碣銘[金安國]
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沈公、淑夫人申氏, 合葬于通津縣東甕井里艮坐坤向之原。 其孤吏曹正郞連源、典設司守達源、生員逢源・通源方居廬于塋側, 列狀請碣銘於安國。 安國生後, 未及遊公之門。 然以新進參列班行, 覿公風儀峻整, 辭氣弘毅, 想像其中所守, 蓋必有異於人者。 今觀家狀, 益悉其平生。 況夫人, 我先妣堂姊之女。 其德懿之實、閨範之美, 合門欽誦, 安國所詳知, 雖古史簡所稱賢婦人, 蔑以過之。 安國義不得以支辭拒。
謹按公諱順門, 字敬之, 靑松府人, 高祖領議政府事、靑城伯諱德符。 曾祖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諱溫, 卽我昭憲王后之皇考, 王后之弟曰輸忠保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靑松府院君、恭肅公諱澮, 是公祖。 生贈純忠積德補祚功臣、嘉善大夫、吏曹參判諱湲, 是公考。 配曰貞夫人李氏, 中軍副司正義坵之女, 宗室義安大君和之曾孫。 以成化元年乙酉, 生公。
幼沈靜寡言, 大與群兒殊。 然參判公早世, 家無嚴訓, 至十四五, 無志學意。 大夫人憂慮, 召而勅戒之。 公惕然感厲, 求師受業, 勤苦不怠, 雖雨雪, 未嘗癈程課。 學日就成, 恭肅公喜甚, 於諸孫中特鍾愛, 恒以遠大期之。
未幾, 中丙午司馬試, 登弘治乙卯第, 選入承文院, 歷正字、著作。 至博士, 兼史職, 參修《成廟實錄》。 陞授成均館典籍, 轉司憲府監察, 以書狀官朝京師。 俄擢弘文館副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遷司諫院正言, 移兵曹佐郞, 陞拜弘文副校理, 兼帶知製敎、經筵・春秋館、承文院職。 累歷兵曹正郞、司憲府持平・掌令, 以薦拜議政府檢詳。 陞舍人, 復兼史館。 立朝十年, 淸愼恪勤, 雖小事, 未敢忽曰: “居其位, 思盡其職, 人臣之分也。” 甲子, 燕山主荒亂追讎, 言事之臣, 誅竄殆盡, 公亦編配開寧縣。 主怒未已, 復逮繫獄, 竟陷非命。 不幸之日, 神色不亂, 從容再拜就刑, 實是年十二月五日也。 人莫不痛惜揮涕, 時年四十。 明年二月, 克葬。 正德丙寅九月, 今上卽位, 追贈公今官。
公天資簡重謹厚, 培于學力, 德器益就。 立心正大方嚴有執守, 望之儼然起敬, 內實坦易無畦畛, 故人樂與之交。 一時以公輔望之, 天道乖爽, 運遭凶舛, 痛矣哉! 公孝友篤至, 事大夫人, 色養無違, 奉祭必誠。 丁亥之亂, 參判公卒於咸興, 公尙幼。 旣長, 哀慕懷慟, 屛却紛華, 痛樸約終其身。 娣先亡, 公夢見, 則必齊素以竟日。 親舊有喪, 黽勉扶護, 殫其心力而後已。 待子姪, 嚴而慈。 至於臧獲胥徒, 皆寬而有恩, 畏愛不敢欺。 平生不慕榮利, 不與人苟合, 摻履有定, 顚沛不失, 亦未嘗爲矯激過情之行。 處事接物, 一以誠信。 然有非理, 必規正之, 人不忤而益敬服, 公之行誼, 豈可及哉?
夫人, 平山望族。 有諱崇謙, 佐麗祖定三韓, 爲開國元勳之首。 平山之申皆其後也。 曾祖諱敬宗, 贈崇政、判中樞院事。 祖諱守福, 刑曹都官正郞。
考諱永錫, 司憲府監察。 母許氏, 贈領議政陽川府院君諱蓀之女, 名相忠貞公琮、文貞公琛之娣。 有賢德, 通書史, 家範甚修。 夫人生于成化丁亥。
幼服慈訓, 性復和淑貞惠, 略習傳記, 達於大義。 事公敬順, 祇愼家政, 雖小不敢專, 必稟而行。 公欲有爲, 雖甚難, 竭承以副, 世俗妬忌之習, 絶於辭色。 公交遊間聞之, 以爲婦人難能, 往往試之, 咸歎服。 母夫人年近百歲, 至今康寧, 夫人存日, 事之極孝, 常屛棄家事, 晝夜不離側, 坐臥必躬扶之。 甘旨之奉, 備至無闕。 或退在居第, 磬資供具, 絡繹于道。 撫視姪甥如親子。 夫人弟署令援夫婦相繼先逝, 夫人慟傷之, 言及未嘗不涕泣, 扶喪盡其力。 恩育遺孤, 過於所生。 未婚嫁者皆營辨其資裝, 親戚有匱窮者, 必周給之。 常慕古人同居之義曰: “昔張公藝九世猶同居, 崔孝芬之家, 一錢尺帛, 不入私室, 雖古今異宜, 分房析居, 宜以古人敦睦處心。” 家庭之內, 務存仁恕, 婢僕有過, 不喜笞捶, 亦未嘗以惡言苛罵, 常戒子婦曰: “昔陶潛送一力給其子曰: ‘此亦人子, 可善遇之。’ 劉寬不怒侍婢覆羹, 牛弘不怪舍弟殺牛, 爾曹當以此爲法。” 慈祥惻怛之念, 積于中而發乎外, 其見諸言行, 無非誠悃。 性明達能, 知吉凶倚伏之理, 當窮達得失之際, 不屑屑焉。 每誦夫子之言曰: “死生有命, 富貴在天。” 遇一事成敗, 輒曰: “焉知福? 焉知禍?” 諸子落第, 不以爲戚, 得第, 亦不甚失喜。 敎諸子, 親授《孝經》、《小學》, 導以義方, 皆爲一時聞人。 夫人之德, 著于閨門, 達于宗族, 傳于縉紳, 小大遠近, 靡不景仰而欽式之, 可謂克配公美而愈有光矣。 甲子之禍, 夫人悲號不食, 幾至滅性。 自是, 哀慕屛處, 不與親隣慶壽婚嫁之會, 祭必躬執致誠。 遇忌日入月, 輒不食肉茹葷, 常以未亡爲恨, 不樂久生於世, 疾病不肯服藥餌, 祈速從於地下, 嘉靖七年戊子正月二十八日, 感疾卒, 享年六十二。 內外姪甥曁藏獲, 悲號哭擗, 如喪父母。 以至族黨姻婚隣里, 亦莫不悼弔異常。
噫! 夫人之賢, 今世無有儷者, 撰美多溢辭。 安國竊懼夫紀之不能盡, 不足以昭揚夫人之德于永久, 不虞辭之有溢也。 獨怪天之純畀之厚, 而祿命之不稱以駁, 使人多憾於施報之際, 果何歟! 四月, 祔窆公兆之左。 距公沒二十五歲而竟從焉, 夫人殆無遺恨矣。
四子: 連源, 魁丙子生員試, 擢壬午第, 捷丙戌重試; 達源, 登丁丑第, 蚤歷淸華; 逢源, 中丙子生員: 通源, 中己卯生員。 俱有文行令譽, 公與夫人之遺慶, 其屬之玆乎! 連源娶漢城判尹金璫女, 生一男三女: 男鋼, 皆幼。 達源娶兵曹參判尹希仁女, 生四男: 鎭, 鎡, 銓, 鐩。 女適宗室荒壤正壽麟, 餘皆幼。 逢源娶刑曹正郞金顯祖女, 生男鍵, 幼。 通源娶宗室德林君孜女, 生二男錪、鐳與一女, 皆幼。 銘曰:
玄機轇轕, 孰主張是? 濁淸粹駁, 寧有勝紀? 吉與純俱, 凶畀悖德。 理昭終古, 萬同一錯。 孰慨于玆, 叩詰于穹? 懿厥夫婦, 醇誼服躬。 肫肫仁厚, 循軌踏祥。 胡反其施, 顚躓奇殃? 淫詭多脩, 慈良則嗇。 數與運遌, 定或不克。 嗚呼曷托? 徵在嗣續。 世世茂慶, 永守貞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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