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재조명 해본다!
1946년에 있었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 사건의 여파로 그간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 민족주의자니 우익들이 일본인들과 손잡고 호의호식하는 동안 아낌없이 생명을 걸고 항일투쟁을 했던 공산주의자들이 하루아침에 매국노, 사기꾼으로 매도당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재조명하고자, 장문의 글을 한번 기고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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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미군정기 1946년 5월 8일, 미군정보대가 돌연 조선공산당 당사를 습격해 조선공산당 간부이자 조선정판사 사장인 박낙종과 인쇄소 직원 등 14명을 연행한 사건을 말한다. 이들이 대량의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혐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미군정에 의한 정치공작으로 드러난 사건이기도 한데, 어떻게 해서 정치공작이 생겨났고 조작된 사건인지에 대해 기술해보고자 한다. 일본인 건물이던 근택빌딩 1층에는 일제 시절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근택인쇄소가 입주해 있었다. 적산관리법에 따라 미군정으로부터 건물과 함께 인쇄소까지 불하받은 공산당은 인쇄소 이름을 '조선정판사'로 고치고 기관지 '해방일보'를 인쇄했다. 이때 인쇄소 직원들은 모두 일제 때부터 일해온 이들을 그대로 재고용했다. 조선공산당 중앙당은 불하를 받고도 여러 달이 지난 1946년 1월부터 비어 있던 2층에 입주해 업무를 시작했다. 문제는 일제 때부터 지폐 인쇄에 종사해오던 직원인 '김창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공산당과는 아무 상관없는 인물인 김창선은 1945년 9월 일본 기술자들이 철수할 때 백원 권 징크판 2개 조를 빼돌렸다. 징크판은 지폐원판을 이용해 아연판을 눌러놓은 인쇄용 원판으로, 흑색 청색 적색의 세 가지 색상으로 구성되무로 모두 6장을 빼돌린 것이었다. 김창선은 빼돌린 징크판의 일부를 10월 중순 양승구라는 인물에게 팔아넘겼다. 이러한 일은 아직 공산당이 근택빌딩에 입주하기도 전이었다. 양승구라는 인물은 극우단체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 뚝섬위원회 조직부장인 이원재의 이모부였다. 이원재와 양승구는 여러 대의 소형 인쇄기를 구입해 자신의 독촉사무실에서 지폐를 인쇄하려 시도했으나 장비와 기술이 부족해 거듭 실패해버렸다. 이에 징크판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보려고 상대를 물색하던 중 중부경찰서에 적발되고 말았다. 이때가 벌써 1946년 5월로, 그 사이 공산당은 근택빌딩에 입주했고, 인쇄소 직원들도 일정한 교육을 받은 후 공산다아에 가입해 있었던 무렵이었다. 관련자들을 체포한 경찰은 독촉 관계자들이 위조지폐를 만들려 했다는 사실보다는 징크판이 조선정판사 기술과장인 김창선에서 나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보고를 받은 미군정은 정판사 직원 전체를 연행하도록 지시했다. 이무렵 남한에는 여러 건의 위조지폐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공산당은 처음 정판사 직원들이 체포되었을 때만해도 김창선 개인의 부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일주일 후의 경찰 발표는 크게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1945년 10월 중순 근택빌딩 2층 조선공산당 사무실에서 이관술(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 다음으로 가는 제2인자), 권오직(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주필)이 김창선에게 위조지폐를 인쇄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김창선은 6차례에 걸쳐 9백만원을 인쇄해 이관술에게 제공했는데 아무 보답이 없자 분하게 여기고 징크판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가 발각되었다,'라는 것이 당시 군정경찰의 발표였다. 여기서 이관술을 엮어 넣은 것은 이관술이 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이라는 명분이었지만, 이관술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당수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엇다. 박헌영에게는 제2인자를 잃은 타격이 되었다. 경찰이 위조지폐를 처음 인쇄하기 시작했다는 1945년 10월 중순이면 아직 공산당은 입주도 하지 않아 근택빌딩 2층은 비어 있었고 이관술은 그곳에 갈 일도 없었다. 해방된 지 불과 2개월밖에 안 된 그 시기에는 공산당의 위세가 대단해서 화신백화점 박흥식 등 여러 재벌들이 돈을 보따리로 싸들고 이관술을 찾아올 때였다. 북한에서 못 쓰게된 일본 화폐가 남한 공산당에 대량으로 유입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막 합법화되어 최대 정당으로 발돋움하던 이 시기에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주장이다. 연행된 14명의 정판사 직원들은 처음에는 위조지폐를 찍은 일이 절대 없다고 부인했으나 수사 며칠만에 김창선의 진술을 그대로 베껴내기 시작했다. 공산당사에서 일하다 보니 생계를 위해 공산당에 가입했을 뿐, 불과 몇 달 전까지도 일제 밑에서 일하던 안정된 직장인에 불과했던 인쇄공들이 그 과정에 겪어야 했을 고초는 충분히 짐작되었다. 이시기 남한 군정경찰의 잔혹성은 일제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악랄 그자체였다. 그들은 일제 때는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일본인들 밑에서 고문을 맡았으나 해방과 더불어 경찰 고위직으로 승진한 이제는 자신의 직위와 생명을 걸고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공산당을 없애지 않으면 북한처럼 숙청된다는 절박감이 그들을 더욱 악독하게 만들었다. 일제 때 사용되었던 모든 악랄한 고문 수단이 총동원되었고, 남녀 구별 없이 홀랑 벗겨 매달아놓고 매질을 하는것은 보통이었던 시기였다. 공산당은 즉각 가혹한 고문으로 조작된 누명이라는 성명을 내고 전면적인 항의투쟁에 들어갔다. 미군정은 이 시건이 조선공산당과는 관계가 없는 경제사건이라 발표하기도 하고 한국인 경찰의 조작일 경우는 크게 엄단하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처음부터 미군정의 공작에 의해 시작된 사건이라는 의혹을 벗어날 수 없었다. 사건을 지휘한 경찰청장 장택상도 기자들과의 대담에서 '위폐사건에 대해 자신은 결정권이 없으며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고 실토했다. 즉, 장택상 경찰청장이 간접적으로 이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시인한 셈인거다. 이 사건을 통해 우익단체들은 공산당이 위조지폐 찍었다고 확신하거나 혹은 그렇게 몰아갔다. 5월 12일, 서울운동장에서 독립전취 국민대회를 마친 우익청년들이 수십 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시내를 질주하면서 민전(민족주의민주전선) 산하 각 단체와 언론기관을 습격하는 무법천저의 사태가 벌어졌다. 자유신문(해방정국 좌익 계열 신문사)사에 침입해 기계,의류,종이등을 강탈해가고 가옥을 파손하고 경성자동차서비스회사에 침입해 도끼로 사람을 상해하는 등 서울 시내는 온통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다. 우익 폭도들의 테러가 계속되는데도 경찰은 수수방관하기만 했다. 우익청년단들은 '공산당이 방화하니 불조심'이니 '경제혼란을 일으키려고 지폐 위조' 등의 내용이 담긴 유인물을 뿌리고 포스터를 붙이고 다녔다. 이들 폭력단들이 명백히 미군정과 경찰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1946년 들어 결성된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은 처음부터 미군정에 의해 조직된 단체였다. 족청은 1946년 한 해만해도 7만 명에 이르는 단원을 배출했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좌익운동가들에게 무법적인 테러와 고문을 가하는 전위대가 되었다. 이들은 권력을 좇아 경쟁하는 폭력집단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경찰은 족청이 좌익 인사들에게 저지르는 폭력을 비호했으며 미군정은 경찰간부나 국군 장교 같은 보다 강력한 합법적 권력을 부여했다. 미군정은 이들 경찰과 청년단에게 치안 유지를 맡겼을 뿐 아니라, 양곡 강제 징수권을 부여하여 민중들의 격분을 샀다. 경찰은 양곡의 강제 공출에 막대한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농가당 공출양을 배정하고 도시민에 대한 배급양도 결정했다. 모든 물가가 폭등하는 상황에서 경찰에게 주어진 이 막강한 권한은 부패와 비리의 원천이 되었고 민중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극우폭력집단에서 배출된 경찰관들은 자기와 밀접한 이들의 공출양은 적게 하고 영세 농민에게는 과다하게 할당해 불만을 샀다. 농민들이 이에 항의하면 갖가지 이름의 우익 청년단을 동원해 강제 공출에 들어갔다. 저항하는 농민은 공산주의자로 몰아 구타하고 협박했다. 견디다 못한 일부 농민들은 산으로 도망쳐 야산대가 되어 경찰관과 행정관소를 공격하는 판이었다. 이러한 일은 뒷날 1946년 대구10.1 사건 같은 유혈충돌 사태가 터진 1차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다. 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조선판 히틀러 테러'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조선인민보(좌익계열 신문)에 '공산당은 방화라든가 지폐 위조 같은 것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상식입니다. 왜나하면 공산당은 인민대중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인민대중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또 할 수 없는 정당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이주하 등 공산당 필진들도 거듭 억울한 누명임을 강조하는 주장 글을 발표했지만, 이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5월 18일. 미군 대위의 인솔 아래 수백명의 미군장교와 헌병들이 근택빌딩을 포위하고 공산당 중앙당 사무실과 '해방일보'를 샅샅이 수색해 공산당 관련 서류 일체를 압수해갔다. 미군정 적산관리과는 조선공산당으로부터 근택빌딩을 회수, 공산당은 5월 30일 사무실을 남대문 앞 일화빌딩으로 옮겨야 했다. 경찰에 의해 위폐 사건 주범으로 지목되어 전국에 수배되었던 이관술은 두달 만인 7월 6일, 충신동에서 체포되었다. 이관술은 체포되기 전부터도 자신이 운영하던 책방인 '해방서점'에 주기적으로 나타나 장부를 점검했고 체포되던 날도 낮에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들고 집에 돌아갔다. 온나라를 떠들썩하게하게 한 주범이 이처럼 반공개적으로 돌아다녔던 것은 자신에게 혐의가 없으므로 체포되더라도 누명을 벗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실제로 체포된 그는 한달이나 계속된 잔혹한 고문에도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재판정에서 이를 폭로했다. 물론 아무런 소용이 없는 항변이었다. 남한의 미군정과 우익은 좌익운동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으나 자신들의 사법권 안에 들어온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데는 힘이 넘쳤다. 대개 친일파 출신인 재판부는 고문에 의해 조작된 누명이라는 공산당의 주장을 무시하는 데만 완고했다. '사도법관'이라는 칭송을 듣던 양심적인 검사 김홍섭은 재판 도중 사표를 제출했고 미군정 법무관 중 일부는 이 사건이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견서를 제출했으나 무시되었다. 조선일보,동아일보 등 보수언론은 검사의 논고를 마치 재판의 결과인 듯 상세히 보도하는 반면 좌익의 주장은 일체 무시해버리거나 아니면 반박 기사를 내보냈다. 이렇게 공산당이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소문은 점차 기정사실화 되어가게 되었고, 이관술은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대전 형무소에서 처형당했다. 이 사건은 남한내에서 매우 커다란 파장이 터져나왔고, 이 사건으로 미군정의 집중적인 정치공작은 확실히 효과를 거둔다. 그 근거로 1946년 7월에 실시된 '조선여론협회'가 서울시민 6671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대통령감으로는 이승만이 29%로 압도했고, 김구,김규식,여운형이 10% 선을 유지한 반면, 박헌영은 1%밖에 얻지 못했다. 다만 '모르겠다'고 응답한 절반 속에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를 숨겼다. 이 시기 극우세력을 제외한 나머지 세력에 대한 지지의사를 숨겨야 할 정도로 분위기가 크게 위축되어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