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웅은 선조 24년에 별시에서 무과에 합격하고 특별히 기용되어 내금위가 되었다가 선전관으로 옮겼으나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조 25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왜군은 20만의 대군을 가지고 부산에 상륙해 파죽지세로 북상, 15일만인 4월28일 충주에 다달았다. 충주 역시 신립 장군이 왜적과의 충돌이 있었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해 적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5월2일 서울도 함락되어 왕은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이 때 고향에 내려와 있던 조웅은 여러 지방에 격문을 띄워 5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앙성면의 태자산 아래에 주둔하고 서울로 향해 올라가는 왜적의 후속 부대를 막아 물리쳤다. 조웅은 군호의 표지로 모든 깃발을 흰 것으로 하였으니 그 때 사람들이 이를 두고 이르기를 '백기장군'이라 하였다. 당시 8도의 의병중 호서의 백기장군과 영남의 홍의장군이 가장 뛰어났다고 하여 왜적도 백기와 홍기는 피하라고 할 정도였다. 조웅을 백기당이라는 호를 붙인 것도 이 때문이다.
조웅은 앙성면과 소태면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적은 충주와 원주에 대부대를 주둔하고 있었으며, 죽산, 양지, 용인으로 연결되는 길을 통해서 서울을 왕래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웅이 지키던 소태면과 앙성면은 그 길목이었으며 적과의 충돌이 잦았다.
한 때 소태면 남한강 북쪽 유역에서 적과의 교전이 크게 일어나 적의 피해는 두말 할 것도 없고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조웅 역시 부상당한 몸이 되었다. 이 무렵 원주의 왜군이 여주에서 패배를 당하자 원주의 잔여 왜군들은 충주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조웅과의 일전 역시 피치 못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