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소풍간다고 김밥을 싸달라는데
요즘 김밥처럼 흔한게 없드라
바쁜데 그냥 사가라 했더니
그래도 엄마가 싸준 치즈김밥이 먹고 싶다고...
그래....내가 앞으로 우리 강아지들 김밥 싸줄날이 몇번이나 있겠냐 싶어
치즈김밥에 참치김밥에 열몇줄 싸서
두것들 예쁘게 담아주고
뚱순이(큰아이) 지네 담임 노총각인데 아침이나 드시겠냐고
그래서 또 챙겨드리고
골고루 준비해논 과일하고 떡
정성스럽게 담아서 작은 아이편에 보내고
뒷 설겆이를 끝낸다음
김밥 꼬다리 남은거 줏어먹다보니 혼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나서 목이 메이더군요
자식들 한자라도 더 가르치시겠다고
논이라곤 꼴랑 간척지 논 세마지기 있던거랑
외할머니께서 사주신 밭...등 정리해서
서울로 이사올때
13살짜리 속 없는 저는 엄마가 서울에 아파트 사놓고 오셨다길래
티뷔에서만 보던 아니네요 그땐 티뷔도 없었는데?^^
암튼 갑자기 공주라도 되는듯한 기분이었겠죠
멀미가 심했던 저와 제 동생은 토하고 또 토하고
나중엔 나오는것도 없고 그렇게
외삼촌 화물트럭 운전석 뒤에
거의 기절했다 깻다 반복하면서 올라왔을꺼에요
아파트는 맞더군요^^
암사동에 지금은 현대선사 아파트.. 몇억간다는데
당시 암사시영아파트 9평 13평 그중에 당근 9평^^
고모께서 웃으면서 그러셨어요
"아야 느그들이 잘잘한께 살재 우리새끼들 같으면 발도 못 뻗것다야"
지금도 가끔 하는 얘기가 우리가 그때 발도 제대로 못 뻗는 집에서 살아서
키가 안컷다고 하며 웃습니다
그 성냥곽에서 일년 가까이 살았나? 13평으로 옮길땐 첨 서울 올때보다 더 좋았지요
화장실도 있고^^(9평 화장실은 두집에 하나^^) 부엌도 입식이고...
아파트 다웠어요^^
남편이 있나 갖은거라곤 새끼들 줄줄이 다섯에
용감한거 하나 가지고 저 전라도 끝에서 올라오신 양반이
뭘 하실수 있었겠나요
먼 친척분 따라 김밥다라 머리에 이고 서울살이 덤비셨더랍니다
장사가 안되서 거의 남겨오시는 날엔
김밥에서 약간 시큼한 냄새가 나는데도
옆구리 터서 속에 야채는 버리고 김치넣고 볶는
큰언니가 해주는 주 메뉴였습니다
전 그래서 지금도 김밥을 안좋아합니다
김밥보니까 엄마 생각나는 바람에
또 주책없이 한참을 주절거렸네요
어머니는 " 나 김밥장사 일년도 안했어야.." 하시는데
왜 제 기억엔 통행금지가 다 되가는데도 어머니가 안오시면 걱정되서
동생하고 놀이터 그네에 앉아 기다리다가
엄마가 멀리서 보이면 "왜? 인제와?" 하고 막 뛰어갔던걸
몇년은 했던거 같은지 모르겠어요^^
어쨋거나 옛 애기 하며 웃을수 있는 지금 전 행복합니다
아! 그때도 행복했었어요
서울애들한테 기 죽을까봐 그러셨던가
용돈을 궁하지 않게 주셨거든요^^
혼자몸으로 두배를 고생하셨으니 두배로 호강 시켜드려야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으니... 이번 어버이날엔
엄마가 좋아하시는 독립문 PAT 메장에 가서
젤로 이쁜 꽃가라 티 두어장 사가지고 찾아뵈야겠어요
첫댓글 읽는 저도 눈시울이..저도 친정 엄마 걱정만 끼친 죄가 있거든요.ㅠㅠ 지금은 돌아 가고 안계시지만...
아모르님은 천성이 착하시고 부지런 하십니다. 요새 엄마들 김밥집에서 주문해 주는 엄마들이 많더라구요. 아모르님 같은 엄마..그리 흔치 않습니다. 부군이 누구신진 몰라도 처복은 타고 났네요. 매일 업어 달라하세요.
에고 길벗님 제가 몸둘바를 모르겠잖아요^^아버지 없이 자라서 가족의 소중함을 남들보다 조금더 느끼는거 뿐이에요^^
그때는 왜 그렇게 다들 못살았던지...기대하고 올라왔던 서울은 암사동 천호동 그쪽, 고향 읍내보다는 조금더 나았을까요 지금은 엄청난 발전을 해버린 송파구 쪽에도 친구가 많았는데 그쪽은 더 못살았던거 같애요 덕분에 중요한 사춘기시절 기안죽고 잘 적응할수 있었나봐요
고로..어머니는 위대 한 것입니다. 훌륭한 위인들의 뒤에는 엄마가..에디슨.링컨이 그랬고 율곡 선생님도 그러했지요.
엄마....그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살아계실때 자주 찾아 뵈어야 하는데 엄마한테 전화라도 드려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