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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세계사 |
사회주의운동사 |
한국사 |
1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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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정계비 건립 |
17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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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저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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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 |
루소 『사회계약론』저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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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 |
파리조약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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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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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설치 |
1789 |
바스티유 감옥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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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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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최초의 헌법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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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 |
파리 시민 봉기, 프랑스 국왕 유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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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 |
루이1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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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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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이집트 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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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성을 가진 그들의 치적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뵈프는 다른 계몽 사상가들과 비교하여 ‘행동’을 앞세운 것을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 당시 추진력을 가지고 자신의 뜻을 펼친것을 떠올렸습니다. 열 번 이야기 하는 것 보다 한번 실천하는 것이 더 강하게 남는 법 입니다. 미래의 도덕교사의 입장에서 도덕규범역시 스스로 실천하여 보여주는게 아이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 이혜숙 : 8) 이런 측면에서 한 사상을 주도한 그들의 치적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지만 다른 계몽 사상가들과 비교하여 그는 ‘행동’을 앞세운 것을 높이 살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내용적으로 관련이 없지만 지난 민족과 역사 수업을 들을 때 발표했던 세종대왕의 추진력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열 번 이야기 하는 것 보다 한번 실천하는 것이 더 마음에 남는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도덕규범역시 열 번 알고 행동하라고 외치는 것 보다 스스로 실천하는 게 훗날 교단에 섰을 때 아이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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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일 : 1) 사회주의 풍 사상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 2) 루소의 경우는 계몽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민중이 우둔한 길로 걸어들어가는 것을 스스로 선택할 경우 힘으로라도 제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이것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꽤나 악용가능성이 많은 사상 같아 보입니다. ->> 3) 현실에 사유재산제 폐지를 적용하려고 하는 점 높이 사야 할 것 같습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박종일 : 4) 저만 받은 느낌인지 ->> 5) 제가 보아도 바뵈프는 실제로 민중들과 함께 행동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아픈 학우를 대신해 갑작스런 발표를 맡고도 훌륭히 잘 소화해낸 이환 학우에게 박수를 드립니다.^^ 교수님 말대로 사회주의의 특징 중 하나인 동료애를 잘 실천하셨네요.^^ 유럽에서의 혁명적 변화를 통해 사회주의는 점점 움직이게 됩니다. 그 중심에 있던 사람이 바뵈프라고 할 수 있지요. 생각만 하는 것으로 역사는 바뀌지 않습니다. 바뵈프는 기존의 사회체제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넘어 그것을 변화시키는 행동을 함으로써 역사를 한 단계 발전시켰습니다.
* 조아라 : 1) 이환학우에게 -> 2) 유럽에서의 혁명적 변화를 통해 사회주의는 점점 유동성을 띄게 됩니다. ->> 3) 변화하려는 행동을 함으로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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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후에 모렐리나 마블리는 공산주의적 계몽 사상가로서 불리워졌지만 바뵈프에게는 공산주의적 혁명가라는 정의로운 이름이 붙은 것이겠지요. 이번 발표를 들으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에 더하여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큰 덕목을 같이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많이 힘들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최선을 다하려는 정아 학우의 빠른 쾌유를 빕니다. ^^
* 조아라 : 4) 계몽 사상가로 -> 5) 힘들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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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3절로 인해 계몽 사상가들의 이상향이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이상향과 비슷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렐리와 마블리가 사유재산에 대한 부정을, 바뵈프는 행복을 위한 진정한 사회적 평등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사회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바뵈프는 다른 사상가들과는 달리 구체적인 실천을 강조했다는 측면이 인상깊었습니다. 비록 폭력을 정당화하긴 했지만, 이론으로만 그치지 않았고 몸소 실천하려는 결단력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이번 장절로 인해 실천으로써, 행동으로써의 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