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님,
복된 휴식의 항구에 안전하게 닻을 내릴 때까지
멈추지 말고 서둘러 나아가도록 하여주소서.
오늘의 기도지향
농민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에게 주신 자연에 감사드리며 기도하오니
저희에게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 관심을 갖고 봉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농민들에게는 위로와 힘을 주소서.
오늘의 말씀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루카 15, 1 – 10 또는 요한 10, 11 – 16
그때에 1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 5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 9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은 대학 다니며 누구를 좋아할 때였습니다. 사실 처음 누가 좋아질 때는 그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신의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에 지나가는 예쁜 사람을 쳐다본 것에서도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서서히 상대에게서 서운한 것이 느껴지고 그 사람이 예전처럼 나를 완전히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을 느낄 때는 마음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더 예뻐 보이고 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면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다가올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만나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사람에게는 느낄 수 없는 잊혔던 감정들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몇 번 만나 이야기 하는 것은 바람피우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러고 나서 본래 좋아하는 상대에게 더 잘 해주면 된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바람피우고 이혼하고 하는 연속극을 보며 ‘왜들 저렇게 사나, 나는 결혼해서 절대로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라는 생각을 쉽게 하지만, 실제로 살다보면 그런 것이 꼭 남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육체의 나약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도 믿지 못하게 되고, 혹 상대도 그런 사람이었고 그렇게 자신을 떠나가는 것을 체험하면, 나뿐만 아니라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사랑은 사람을 믿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믿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을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조차도 그런 믿을 수 없는 사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 안에 잠재되어 있는 ‘육적인 감정’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육체적인 감정에 따라 자주 변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사랑은 믿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자주 변하는 육체적 감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아일랜드에 갔더니 하루에도 날씨가 수십 번씩 변합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 말로는 ‘아일랜드 날씨는 하루에 4계절이 다 들어있다.’라고 합니다. 물론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나라에서 비가 안 오는 때라도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자주 변하는 날씨는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맑다고 하루 종일 맑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 안에 있는 ‘육체적 감정들’을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육체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높은 사람이 되고 싶고, 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많이 자고 싶고, 맛있는 걸 먹고 싶고, 멋지게 보이고 싶은 등의 성향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위해 자신의 색깔을 쉽게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육체적인 사람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에게 보증을 서주지 말라고 합니다. 돈이 필요할 당시는 모든 책임을 다 질 듯이 굽실거리다가도 상황이 바뀌면 어떤 사람도 쉽게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이 사람의 육체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이런 육체적인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즉,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보며 마치 그 죄인들 중 하나처럼 취급하려합니다. 자신들이 그런 처지면 당연히 그들이 즐기는 방식으로 즐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제가 인터넷에 글을 올린다고 하면, “이젠 큰물에서 놀려고 하시나봐. 역시 인기관리는 잘해.”라고 하며 꼭 좋지만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각자 자신이 쓴 안경대로 보는 것이니 그런 말에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체를 믿지 않는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믿지 않는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이란 뜻은 우선 나부터라도 영적인 사람이 되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뜻입니다. 처음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한 예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쉽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나중엔 사람을 믿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처럼 변하지 않고 누구라도 믿을 수 있는 그런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할례, 즉 세례를 받은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 삼용 신부님의 사이 미니홈피 (http://www.cyworld.com/30joseph)]
영적독서
성령께서는.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와 세계의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세례의 계약은 죽음과 생명의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상징은 물에 있고 생명의 보증은 성령에 있습니다. 이것은 왜 물과 성령이 연관되어 있는 지에 대해 제기된 문제를 풀어 줍니다. 세례는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의 열매를 맺게 하는 죄를 씻어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함의 열매를 맺게 차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세례의 물은 그 안에서 무덤처럼 영세자의 몸을 받아들일 때에 죽음을 상징합니다. 한편 성령은 생명의 힘을 부여하여 우리 영혼들을 죄의 죽음으로부터 그 영혼이 한때 누렸던 생명에로 되돌려 줍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물에서 죽음이 이루어지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생명도 이루어집니다.
세례의 위대한 성사는 세 번 물에 잠기고 또 그때마다 삼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거행됩니다. 이렇게 하여 죽음의 상징이 실현되고 또 세례 받은 이들은 처음 지혜를 받아 영혼이 조명됩니다. 그런데 물을 통해 오는 은총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물 자체의 힘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현존으로 말미암아 옵니다. 세례는 육체에서 때를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올바른 양심으로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때문에 부활에서 나오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준비 단계로서 복음적 생활을 가르쳐 주십니다. 즉, 우리는 분노를 피하고 어려움을 견디어 내며 쾌락과 재물에 대한 애착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후세에서 본성적으로 가지게 될 것을 미리 우리 마음의 상태에서 영적으로 가지게 됩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낙원을 되찾게 되며 하늘 나라에 오를 수 있게 되고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집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신뢰심을 갖게되고 그리스도의 은총에 참여할 수 있으며 빛의 자녀라 불리고 영원한 영광의 참여자가 됩니다. 한마디로 현세와 후세에서 온갖 축복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우리가 약속된 것을 믿음으로 희망할 때 후세에 누릴 이것들이 마치 지금 여기에 있는 듯이 거울처럼 보는 것입니다. 약속의 보증이 그러하다면 그 약속의 실재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꽃이 그러하다면 그 열매는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