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끔 사용하는 컵의 비유가 있다.
어떤 장인이 여행하던 중 광야에서 자기가 만든 컵으로 물을 따라 마시다가 컵을 그만 그 자리에 두고 가버렸다.
많은 날 해가 뜨고 해가 진다. 하늘의 열기가 작열한다. 사막 바람이 불어온다. 광야의 개미며 벌레며 동물들이 스쳐 지나간다.
광야에 우두커니 서있는 동안 컵은 자기가 무엇인지 정체성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일까. 나에겐 오목한 공간이 나있다. 그러니 나는 개미들 집인가 보다.
아니 나는 손잡이가 달려 있으니 아, 손잡이를 잡고 못을 두드려 박는 망치인가보다.
그런데 나는 초록색이다. 혹시 내가 나무의 한 종류 아닐까?"
숱한 날 무수한 사고를 거듭해도 이 컵은 자기 정체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은 하나다.
이 컵을 만든 장인이 이 컵에게 그 용도를 말해주어야 한다. 이 컵은 장인이 물이나 커피를 마시기 위한 용기로 만든 것이다.
무슨 말일까? 인간이란 인간을 만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정체성이 정의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자기 인식의 출발점을 삼아야 하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서 제기한 철학의 제일 원리.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란 라틴어는 영어로 I think therefore i a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그는 자기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회의했다. 그러다가 분명한 것은 자기는 생각한다는 것,
생각한다면 자기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것을 정상적인 사고 작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
어쩌면 일반인들에게는 정신병적인 사고 작용으로 비칠 수도 있는 이런 추론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은 그냥 직관으로 아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의 의식이라면 “나는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로 진행하는 게 순리 아닐까?
좌우지간 데카르트에겐 자기가 의식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신학적 입장에서 보면 이 명제는 틀린 것이다.
왜일까? 인간 자신으로부터 존재의 진실을 풀어가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다. 그래서 나는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 맞다.
"너는 청년의 때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도서12:1)"
"나는 무엇일까?" "나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내 존재의 원인과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
인간에게는 인간적 의식과 인간적 질문이 있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인간적 의식과 질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지 인간성이 중단되고 인간의 삶이 중단되는 곳에는 이 의식과 질문이 자취를 감춘다.
나치가 그랬다. 일본의 쇼비니즘이 그랬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그랬다. 물질주의가 그러하다.
진정한 의식과 진정한 질문을 촉발시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현대인의 모든 고뇌와 망가짐 속에는 이 명징한 진리에 대한 무시가 내재한다.
현대인의 모든 정신질환의 근저에는 하나님을 제거한 구멍이 있다. 하나님 없이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모든 의식과 노력은
잠깐 버틸 수 있는지 몰라도 태양열에 눈사람 녹듯이 비진리의 힘에 의해서 그 삶이 해체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의식의 준거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존재의 거점을 두고 삶을 이어나갈 때
우리는 세상이 와해시킬 수 없는 기반 위에서 안식할 수 있을 것이다.
2023. 11. 18
이 호 혁
첫댓글 주여! 주님 안에 존재의 뿌리를 두게 하소서~ 아멘~
아멘! 나 자신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