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9월3일(목)센 바람이 하늘을 화창하게 벗기다
부처님은 “가르침으로 장사를 하지 말라(dhammena na vāṇijjaṃ care).”고 하셨다.
어디서든 얻으려 애쓰지 말고,
타인의 사람이 되지 말라.
남에게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하지 말고,
가르침으로 장사를 하지 말라. (Ud.64)
부처님의 가르침조차 상품화하여 팔아먹는 사람들이 생겼다. 500만 원 주면 일주일 안에 수다원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느니, 또 얼마 내면 며칠 안에 사선정을 체험하도록 해주겠다느니 선전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진흙 속의 연꽃님이 자기 블로그에서 개탄하고 있다.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나의 기억에만 존재하는데, 그것은 부모나 다른 사람들이 내게 기억되도록 반복적으로 이야기해주어 세뇌된 것이다. 나는 나의 탄생을 경험한 적이 없다. 죽는 순간에는 죽음을 경험하는 주체가 사라져서 나의 죽음조차 경험할 수 없다. 그런데 누가 태어났고 누가 죽는가? 그리고 지금 누가 ‘너’를 살고 있는가? 사태가 이러한데도 우리는 소위 ‘태어났다는 나’를 붙들고 ‘나의 삶’을 염려하며 ‘나의 죽음’을 불안해한다. 소위 ‘나’, ‘자아’, ‘자신’이란 문신된 주민번호이며,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집단무의식이고, 자아동일시에 의한 착각이며 생존본능의 도구이다. 나-없음, 자아-없음은 한마디로 놓여남, 풀려남, 문제없음, 안도, 평화이다.
눈앞의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 뒤쪽을 보라. 거기에 펼쳐져 있는 여백, 그 광대한 지평이 있다. 그 여백의 광활함을 느껴라. 그 여백을 짚어보면 텅 빔이며, 지금 여기 전체를 순식간에 광활한 품으로 감싸오는 포근한 현존이다. 이것은 무조건 안도감이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너는 파도처럼 얼마든지 까불어도 돼. 그러나 너는 엄마-바다에게 늘 안겨있으니 염려 말고 돌아다니렴. 다만 엄마-바다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만 잊지 마.’
2020년9월4일(금)맑음
금요 요가 클래스 하다. 다음 주 월요일 개강을 결정하다. 스마트폰 이동 통신사를 SK에서 KT로 바꾸다. 위약금이 4만 원이다.
지금 내가 딛고 있는 토대가 견고한가? 모든 사람은 그렇다고 여긴다. 지금 내가 딛고 선 대지는 견고한가?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믿는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확실하게 믿을만한가? 큰 사고가 터지지 않는 한 대개 그렇다고 여기면서 습관대로 굴러간다. 아, 습관대로 굴러가는 것이 문제다. 습관대로 굴러가는 삶이란 ‘습관이 습관을 되풀이’하기에 습관이 굴러가는 것이지 사는 게 아니다. 습관대로 살면 안전하게 느껴진다. 다른 모든 사람도 대개 그런 식으로 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 없이 안전한 쪽으로 가게 된다. 그러니 내가 딛고 선 토대(세계, 상식과 관습, 정보와 지식 등)가 견고하냐는 질문은 자신에게 해본 적이 없어 생소하다. 생소한 것은 불편하다. 그래서 받아드리기 싫다. 그러면 질문이 없어진다. 그리고 서서히 죽어간다. 그런 삶은 습관-기계이며 좀비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매 순간은 도도한 탁류에서 용솟음치며 솟아오는 찬란한 섬광이다. 그것은 전무후무하며 반복가능 재생가능 하지 않은 절대 유일의 순간이다. 그 순간 잠수함의 잠망경과 같아 360도로 회전하면서 과거와 미래와 세계의 안팎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세상-바다에 빠져 잠겨있다가 수면으로 부상하여 잠망경으로 세계를 두루 보는 순간이 覺醒각성이며, 開眼개안이다. 이런 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일상의 매 순간이다. 그런데 우리는 매 순간 그걸 놓치고 있다. 우리가 사는 데 눈이 어두워져 별처럼 반짝이는 순간을 밟으면서 그냥 지나친다. 우리는 영원하지 못함을 서러워할 게 아니라, 매 순간 가장 고귀한 순간을 놓치고 있음을 서러워해야 한다.
가슴 속 불안이 익숙한 관성을 넘어설 때야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당신에게 내생을 선택할 자유가 주어진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삶을 다시 살아야 한다면 당신은 다시 태어남을 선택하겠는가?
혐오스럽고 덧없는 삶 전체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전환시킬 정도로 열정을 지닌 사람만이 다시 태어남을 선택하리라.
무상하고 무의미한 삶에 자기 힘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 끝없이 자기 자신을 극복해 가는 사람, 저절로 굴러가는 바람개비처럼 유쾌한 사람, 그래서 지금까지 누구도 지어본 적이 없는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 윤회의 권태와 허무주의를 삶에 대한 사랑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초인)이다. 불교는 보리심을 발한 존재인 보살이 그러한 삶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2020년9월6일(일)흐림 오후부터 비 뿌림
태풍 하이선이 온다는 예보만큼 요란하지 않다.
2020년9월7일(월)바람 불어 맑은 날
인간은 ‘그가 되려고 마음 먹은 바 바로 그것’이다. One is what one mean to be.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해지게 한다.
Was mich nicht umbringt, macht mich stärker.
나를 죽일 수 없는 것이 나를 살린다.
풀 한 포기라도 완전히 절멸시킬 수 없다. 왜? 풀은 조건만 맞으면 어느 때 어느 곳이라도 자라날 테니까. 하 잘 것 없고 지극히 연약한 잡초에 깃든 우주의 대 생명력은 무엇으로도 절멸시킬 수 없다. 너희가 나를 베어 없앨 수는 있지만 내 몸에 깃든 우주의 대 생명력은 없애지 못하리라. 낫을 든 사람 손이 벌써 우주의 대 생명력의 작용이 아니더냐?
길가의 잡초가 증언한다. ‘조건만 되면 잡초는 언제 어느 곳에서 무엇으로든 존재할 것이다. 잡초를 잡초이게끔 하는 생명의 연결망을 보라. 생명의 망은 산천초목 일월성신을 망라한다. 잡초는 일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잡초는 잡초를 넘어선 전체이니 불생불멸이다’
우리도 그러하다. 조건만 맞으면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동시에 모든 것이다.
지금 이 인생을 다시 한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자.
월요강의하다. kronos, kairos, ksana. 시간의 사슬을 끊고 솟아오르는 섬광의 시간!
영겁회귀. 매 순간이 영원적 찰나이다. 무시간이 시간의 사슬을 끊으면서 지금 현재를 밝힌다. 그러나 현재는 벌써 이미 거기에 없다. 시간은 잡을 수 없음, 이미 거기에 없음, 사라짐이며, 소멸이 남긴 흔적이다. 인간은 무시간과 시간, 출세간과 세간, 빠져있음과 둘러봄Umsicht의 두 차원을 동시에 산다. 잠망경의 관점을 가져라. 일상성의 바다를 유영하는 잠수함은 가끔 잠망경을 솟구쳐 두루 본다. 그럼으로써 세계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고 향해야 할 방향을 정한다. 인간은 생사를 유희한다. 생사-놀이는 순례자의 길이다. 보살에게 윤회는 생사-놀이다. 우리는 순례하듯이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을 만나 같은 일을 한다. 그러나 그건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가는 차이기에, 창발을 일으키는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