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논 97두락을 기증한 계은공
역사는 한 사람의 지도자를 통해 발전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한다. 지도자를 잘 만나면 긍정적으로 발전하나 잘못 만나면 반대의 결과로 나타난다. 가정과 사회도 그렇고 한 문중도 마찬가지다. 문중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계은공의 휘는 대량(大良)이며 계은(桂隱)은 호이다. 그는 아버지 죽헌거사(竹軒居士) 휘 계창(啓昌)과 어머니 남평문씨(南平文氏) 사이의 외아들로 1884년(甲申) 관산에서 태어났다. 공의 나이 19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당시로는 어린 나이라고 할 수 없으나 10대 때 어머니를 잃었으니 청년기가 순탄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한·일 합방으로 일제의 통치를 받던 시절이다. 신학문과 시대적 변화에 비교적 능동적으로 대응했다. 그래서 일찍이 행정 관료로 진출, 면장을 지냈다. 그리고 송촌(松村) 간척사업에 눈을 떠서 거대한 논을 경작하는 지주가 됐다. 3백 두락을 소유한 지주라서 지방에서는 갑부였던 셈이다.
1) 93 두락의 논을 문중에 바치다 (편제록p.109)
계은공의 위선정신은 시대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 일제강점기와 대동아전쟁 그리고 해방과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변해갔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적으로 변하고, 어제의 애국자가 오늘은 매국노가 되는 그런 시대의 한 복판에서 살았던 인물들이다. 이런 시대에 위선하는 방법도 변한다.
그래도 변치 않는 것은 조상에 대한 제례였다. 그는 해마다 다산(茶山), 운동(雲洞), 장천(長川), 내덕(萊德)의 제향에 참여했다. 나이 만 62세가 되던 1946년(丙戌) 11월 29일 93 두락의 논을 제위답으로 내놓았다. 한편 공은 자신의 계파인 청계문중의 사우인 죽천사에도 별도로 논 4두락을 제위답으로 희사했다.
문중의 일가들이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사실 누구나 부자라 해서 문중에 자신의 재산을 희사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기에 일가들이 즐거워한 것은 당연하다할 것이다. 문중에 이렇게 많은 전답이 희사된 경우는 역사상 전무후무했다. 장천문중이 허다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늘에 이른 것은 공과 같은 독지가의 도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부 계은당 봉정문(동판)[附 桂隱堂 奉呈文(同板)]
"불초 삼가 박전과 비금으로 다산(茶山), 운동(雲洞), 장천(長川), 내덕(萊德) 4처의 선산 묘에 봉정함은 제향의 비용에 보충토록 바치는 것이니 오직 우리 여러 종친은 박약하다 이르지 말고 수령하여 보충해 쓰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不肖謹以薄田菲金奉呈於茶山雲洞長川萊山四處先墓供祭費之補惟吾僉宗勿謂薄略受領補用之伏望) 丙戌(1946년) 11月 29日
習讀公 14代孫 大良 謹呈
계은당 위대량모선사실기(桂隱堂 魏大良慕先事實記)(편제록p.107)
"토지 93두락을 선영시제의 자본과 죽천원(竹川院)과 다산단(茶山壇)의 정일향사(丁日享祀)의 비용에 보충하도록 하였으며, 그리고 금 8천원을 출연, 4파(판사·운암·판서·안항) 종중에 나누어 주었으며, 금 1천원은 그 분토비용에 보태게 하였다"
1949년(己丑) 9월 26일 魏 洪 良 識
2) 현금 8천원(圓)을 4종중에 희사하다
계은당의 재물희사는 토지뿐만 아니다. 그는 현금 8천원도 함께 내놓았다. 그러니까 자신의 계파 청계파(聽溪派)를 제외한 판사(判司)·운암(雲巖)·판서(判書)·안항(顔巷) 등 4파에 2천원씩을 기증한 것이다. 당시 십원도 제법 큰돈이었으니까 2천원은 엄청난 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토지의 이전에 소요되는 비용도 냈다. 즉 등기비용과 기타비용으로 1천원을 따로 내놓은 것이다. 위선행위는 돈이 많다고 모두 하는 것은 아니다. 효도가 돈만으로 되지 않듯 위선사업도 마찬가지다. 그가 비록 토지가 많아서 문중에 그 많은 토지와 현금을 희사한 것은 결코 아니다.
평소부터 조상과 문중을 위한 모선지심(慕先之心)이 없었다면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행위는 이미 점지된 결과일 것이다. 우리 위씨 문중에 그런 인물이 끊이지 않고 배출된 것은 실로 다행스런 현상이다.
청계공(21세조 휘 덕의, 1540~ 1613)의 11대손 계은공(휘 대량, 1884~ 1951)은 1932~1935년 고읍(현 관산읍)면장 재임 때 면소재지(옥당리) 시가지 조성과 평촌마을 앞 간척사업을 주관하여 지역발전에 공헌하였습니다. 1939년에 장흥향교 직원(현 典校)를 역임하여 장흥 유림을 대표하였습니다.
또한 논 300두락을 소유하게 되면서 1949년 장천문중(산하 형제 종중 포함)에 논 93두락과 청계종중 죽천사에 논 4두락을 희사하였습니다.
형제 종중인 판사•운암•판서•안항 종중에 일정의 토지와 각 2,000원, 등기 비용 1,000원을 희사하여 오덕(五德) 문중의 화목과 단합을 이끌어 오늘날의 장천문중이 있게 하였습니다.
장천문중에서는 公의 위선에 대해 계은거사위공대량모선기적비(桂隱居士魏公大良慕先紀積碑)를 장천재 묘각 앞에 세웠습니다.
※ 위 내용 중, 4처 제향은 1)다산(茶山)은 장흥읍 평화 다전등, 습독공(18세조 휘 유형) 제향(陰 10월 10일)
2)운동(雲洞)은 용산면 운주동 봉황, 통선랑공(19세조 휘 진수) 제향(陰 10월 11일) 1994년까지 묘전에서 제향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후 매년 음력 10월 15일 장천재 시제 때 별도의 단소를 마련 합제하고 있습나다.
3)장천(長川)은 관산읍 옥당 천관산 자락 장천재, 습독공 배(配) 평산申氏 이하 선조 제향(陰 10월 15일)
4)내덕(萊德)은 회진면 대리, 당곡진사공(20세조 휘 곤)과 호조판서공(21세조 휘 덕화) 제향(陰 10월 1일)을 말하며,
4곳의 제향은 모두 장천문중에서 주관합니다.
계은당 위대량모선사실기(桂隱堂魏大良慕先事實記)는 1949(己丑)년 중와공(휘 홍량, 1881~1961, 청계공 11대손)이 근서(謹記)하다. 부(附) 계은당(桂隱堂) 봉정문(奉呈)은 1946(丙戌)년 11월 29일 습독공(휘 유형) 14대손 대량이 근정(謹呈)하다.
<장천재 내 소장 편액 사진>
계은공의 생가인 죽헌고택은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477번지에 위치합니다. 1986년 2월 7일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 6호 죽헌고택(위성룡 가옥)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청계공 13대손이자 죽헌공의 증손 성룡(1936년생, 前 경제기획원 총무국장 역임) 종친의 소유입니다.
안채는 1949년 신축한 一字형 6칸 전후 툇집이며 겹집의 형태입니다.
사랑채는 1919년에 지어진 4칸 전후 툇집입니다.
휼륭하신 위문중 조상님 옛발자취와 문중사를 공부하고 갑니다.
栢江위성록/장흥위문사랑 님
잘 알게되었습니다
계은공의 문중사랑이 우리들의 귀감입니다
우리
위문사에
길이남을
정말 대단한
나눔에
표상 이십니다ᆢ
계은당 위대량은 택호가 범계댁으로 저의 어머니 고숙이
위경돈 님 호계댁(범계댁) 택호가 맞습니다.^^
저도 대충은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자세히 알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