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지내며/靑石 전성훈
매년 맞이하는 한가위, 올해는 작년과는 다르고 지난번 추석과도 다르겠지 생각하지만, 명절을 지내고 보면, 허전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전혀 다를 바 없다. 허전하고 조금은 쓸쓸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명절을 지내는 세상 모습이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점도 있지만, 명절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인 것 같다.
젊은 날에는 허겁지겁 바쁘게 직장생활을 하였기에 쉬는 날이 되면 반갑기 그지없었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이 커나가면서 이런저런 작은 사건이나 사고가 끊임없이 생기고 사라지면서 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60년을 함께 했던 어머니도 머나먼 나라로 떠나시고, 자식들도 성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위하여 우리 부부의 곁을 떠나서 그들만의 둥지를 틀고 훨훨 날아간 지 오래되었다.
매일 평온하고 비슷한 그날그날의 일상 속에서 명절이라는 이름을 가진 날이 되면 마음만 싱숭생숭해진다. 출가한 자녀들이 손자녀를 데리고 찾아오면 반갑기 그지없다. 와글와글하며 개구리 형제들이 노래 부르며 지내는 것처럼,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인간의 냄새가 진동하는 장터 같은 삶의 모습에서 잠시 즐거움을 맛본다. 때가 되어 자식들이 돌아가면 집에는 평소처럼 그저 고요한 정적만 흐른다. 오래전에 T.V에서 보았던 부모세대의 모습이 바로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모습이다. 가족을 위해 몸과 마음이 바쁘고 힘들었던 아내의 모습을 보며,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무언가 음식 장만하는 일을 도와주지도 못하는 나 자신의 어정쩡한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 그렇다고 딱히 할 일도 없어 음식상에서 이것저것 열심히 맛있게 먹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만나고 헤어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다. 이런 모습이 인간의 길임은 알고 있는데 주책스럽게 눈물이 나오기도 한다. 마음이 약해지는 게 나이 탓인가 보다. 허전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지나간 추억을 곱씹어본다.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께서 계실 때에는 명절에 제사나 차례를 지낼 일이 없어서, 형제들 가족들과 수차례 여행을 다녔다. 그중에서도 가슴에 늘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두 번의 명절이 떠오른다. 한 번은 어느 해, 설 명절에 충청도 일원을 돌아다니면서 보냈다. 수안보 온천에 숙소를 정하고 여기저기 구경을 하면서 월악산 밑자락에서 칡 막걸리를 사다가 마셨다. 술이 부족해지자 술을 마시지 않은 매제가 밤중에 강추위로 얼어붙은 밤길을 운전해 월악산 칡 막걸리를 사 왔던 일, 도담삼봉 부근 떡볶이와 어묵을 파는 가게에서 어묵을 싹쓸이했던 일이 생각난다. 어느 해 추석에는 강원도 설악산 콘도에 숙소를 정하고 동해안을 구경했다. 속초 어시장에 회를 뜨러 갔다가 어머니를 잃어버려서 형제들이 혼비백산했던 추억, 화진포 백사장에서 강아지와 함께 백사장을 뛰시던 어머니의 모습, 체력 단련한다고 밤새도록 화투놀이를 하면서 술을 마시던 일이, 바로 어제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올해는 인천 동생 집에서 형제들 부부가 모여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다 큰 자녀들의 이야기와 손자녀 이야기를 하고, 연예인 부부를 통하여 궁금했던 연예계 뒷이야기도 들으면서 웃음꽃을 피웠다. 추석 당일은 자식들과 손자녀들이 모여 함께 식사하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자식들과 손자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게 내 역할이다.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끼어도 여러 사람이 모여 대화를 하면 소음이 심하여 잘 알아듣지 못해 자녀들 이야기에 끼어들지 못한다. 아이들이 돌아간 다음에 차분한 마음으로 종이를 끄집어내어 추석을 보낸 기분을 적어본다. 가족과 형제들에게 그저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2004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