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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날’에 느끼는 단상
오늘(5.21)은 부부가 둘(2)이 아닌 하나(1)라는 의미의 ‘부부의 날’입니다.
부부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화목한 가정을 일궈 가자는 취지로 제정된 법정기념일입니다.
돌이켜보니 내가 집사람과 부부의 연을 맺은 지 벌써 45년이 지나갑니다.
그동안 딸 아들 낳고 힘겨운 세월을 잘 살아낼 수 있도록 지켜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특별히 감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감사할 거리가 너무 많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질병이 찾아와서 수술도 받고 약도 오랫동안 먹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다 이겨냈습니다. 70이 넘은 이 나이까지.
아직도 아침 테니스를 거르지 아니하고 튼튼한 두 다리에다가 하고 싶은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다 하고 있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부부가 "처음은 미약했지만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처럼 대학교수와 목회자로서 봉사하고 있으니 이 또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성경 데살로니가전서에 있는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데전 5:16~18)
"いつも喜んでいなさい。
絶えずいのなさい。
どんなことにも感謝しなさい"
이 가운데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와닿습니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어떤 일에도 어떤 것에도 감사하라"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세상에 감사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크게는 오늘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감사할 일입니다.
작게는 걸어 다닐 수 있고 볼 수 있고 잘 먹을 수 있고 잘 들을 수 있는 것 하나하나가 다 감사할 거리입니다.
부부의 날에 감사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앞으로도 늘 감사하면서 하루하루 힘차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노년의 친구
노년에 무엇이 행복을 주는 것일까?
보는 각도에 따라 다 다를 것입니다.
건강은 기본이고 충분한 연금에다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즐기고 사는 인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직에 있을 때, 노후 성공을 향해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개중에는 성공이 곧 행복인 양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앞만 보고 뛰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여 소위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고 부를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제 아무리 돈이 많고 성공을 했어도 생로병사의 흐름을 깰 수가 없습니다.
또한 신은 공평합니다.
절대로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 않았습니다.
시중에 나도는 우스갯소리입니다.
60대는 아직 돈 벌고 있으면 성공
70대는 건강하면 성공
80대는 본처가 밥 차려주면 성공
90대는 전화가 오는 사람이 있으면 성공
일리 있는 말입니다.
여기에다 하나 더 붙이자면 "친구가 있으면 성공"을 들 수 있겠습니다.
어느 세대에나 다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자신의 어려움에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흘려줄 수 있는 참다운 친구가 한 명이라도 곁에 있다면 노년인생은 성공한 셈이다" 괴테의 말입니다.
그만큼 진실된 친구를 사귀기가 어렵다는 말일 것입니다.
특별히 인생 말년에 행복해 지기를 원한다면 재테크뿐만 아니라 우(友) 테크 또한 잘해야 한다는 말로 들립니다.
나이 들면 자연적으로 집에서만 지내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관절이나 각종 노인성 질환으로 인하여 외출을 자제하게 됩니다.
그래서 흉금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멀리 떨어진 친구도 필요하지만 가까운 곳에 살면서 취미까지 같이 한다면 금상첨화라 하겠습니다.
내게는 이런저런 취미가 많아 친구가 많은 편입니다.
최근 테니스, 골프, 댄싱에다가 농사일까지 좀 무리하게 했더니 허리 쪽에 담이 생겼습니다. 꽤 오랫동안 낫지를 않아 할 수 없이 통증의학과와 한의원을 찾았습니다.
담 증상이니 무리하지 말고 좀 쉬엄쉬엄 하라는 의사의 처방입니다.
그래도 늘 하던 테니스와 골프는 중단할 수 없습니다. 게임 수를 줄이고 과격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매일 아침 나가는 테니스 동호회가 있습니다. 많은 회원가운데 나이는 나보다 위지만 친구 같은 교장선생님이 계십니다. 매일 만나고 같이 운동하고 막걸리 한 잔 하며 이런저런 인생사를 나누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요 며칠은 테니스장에 나오지 않아 궁금해서 전화를 하니 아뿔싸 넘어져서 양손을 크게 다치셨다고 합니다. 관절이라 금방 낫지도 않아 걱정이랍니다. 대소변을 비롯한 일상생활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입니다. 빠른 쾌유를 빕니다.
십 수 년째 한결같이 만나다 보니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물론 언젠가 정상으로 돌아와 다시 테니스 코트를 누비는 찹쌀궁합이 되겠지만 그 허전한 마음은 감출 길이 없습니다.
나이 들어 친구 한 명을 제대로 만들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은 세월을 함께 갈 친구를 더 사귀고 싶습니다.
받고 싶은 마음 대신에 주고 싶은 마음을 더 앞세우면 어떤 만남도 다 성공하리라 믿습니다.
아울러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보다 가까이서 늘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나 남녀의 구별이 없이.
칠십이 넘은 마당에 이것저것 고를 처지가 아닙니다.
멋진 친구는 내 하기 나름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되새깁니다.
후회 없는 인생
기독교에서는 인생을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한 조각의 뜬 구름"으로 표현했습니다.
성녀 테레사 수녀는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일생이 그만큼 짧고 덧없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지구전체로 보면 정말 찰나에 지나지 않은 하루살이 같은 게 인간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천년만년 살 것 같지만 인생은 그 누구나 예외 없이 잠시 왔다가 이 땅을 떠납니다.
좀 일찍 떠난 두 분이 생각납니다.
먼저 국민건강 지킴이 이자 인기 있는 강의로 유명했던 고 황수관 박사를 들 수 있겠습니다. 향년 67세의 나이에 급성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국민들에게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키워주고 신바람 나는 삶을 강조했던 웃음박사이셨습니다.
또 한 분은 최근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진 고 주석중 교수(서울 아산병원 심장혈관 흉부외과)입니다. 수많은 응급환자들의 생명을 살렸지만 정작 본인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이 고작 61세였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고인은 모든 치료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글을 벽에 붙여 놓고 혼신을 다 했던 국민 외과 의사였습니다.
두 분 다 신앙인이었는데 하늘에서 할 일이 있었는지 너무 일찍 부르셨습니다.
한편, 천수를 다 하고 떠난 두 분이 계십니다.
먼저, 김동길 교수입니다. 94세까지 비교적 건강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수많은 저서와 강연을 통해 인생의 혜안을 밝혀주신 분입니다.
또 한 분은 이어령 교수입니다.
한마디로 '시대의 지성'으로 불렸습니다. 특히, 마지막까지 암치료를 거부하고 본인의 서재에서 평안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향년 88세였습니다.
그는 죽음과 씨름하면서 "죽음이란 어린 시절에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그만 놀고 들어오라는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죽음과 탄생을 한 줄로 꿰어 죽음을 절망의 끝이 아닌 생으로의 회귀로 보았습니다. 대단한 식견입니다.
이상의 두 분은 평균수명 이상을 사시고 떠났습니다.
지난해 난생처음으로 암(편도암) 진단을 받고 죽음 근처까지 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초기 중의 초기라 잘 치료하여 추적검사를 받고 있습니다. 암경험자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남은 인생은 더 건강하게, 알차게 보낼 수 있습니다”
담당 의사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큰 힘이 됩니다.
하지만 앞서 간 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나도 가야 합니다.
노년에 관한 책을 읽어보니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등 동양인은 암이, 미국 유럽 등 서양인은 심근경색이 사망순위 1위를 달리고 있답니다.
결국 우리는 대부분 여러 가지 암으로 이 땅을 떠나게 됩니다.
실제로 일본의 한 노인전문병원에서 80세 이후 사망자들을 해부해 보니 모두 인체 내에서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고 합니다. 사인(死因)이 암이 아니었던 사람도.
현재 평균수명이 83세이니 칠십이 넘으면 이러한 자연현상을 깨닫고 미리 죽음을 준비해 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김형석 교수같이 105세가 되도록 건강하게 현역에서 일을 하고 있는 분도 있지만 그건 예외 중의 예외일 것입니다.
옛날에 읽은 책이 떠오릅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전신을 크게 다친 분의 자전적인 수필이었습니다.
제목이 "사명을 다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로 기억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저마다 이 땅에 와서 맡겨진 사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일이 각자 다르겠지만 마지막까지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받은 축복이 족합니다. 주신 은총이 넘칩니다.
"이웃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고 오라"는 사명을 스스로 부여받았습니다.
기독교인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천국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네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 14: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어느 날 육신의 역할을 다 하고 이 땅을 떠날 때가 찾아올 것입니다.
지금의 의술과 간절한 기도가 통하지 않아 요단강 입구에 다다를 때,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부르며 주님을 영접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후회 없는 인생'이라 믿습니다.
노인의 자존심
노인의 자존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자존심과 비슷한 고집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늙으면 고집이 세 진다고 합니다.
고집이 세면 가정이나 직장 그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을 수 없습니다.
특히 노년에는 외톨이가 되기 쉽습니다.
고집과 자존심은 대인관계에서 남에게 굽히지 않는다는 점은 같지만 지향하는 바가 다릅니다.
고집(固執)은 잘잘못을 떠나 자기의 의견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 굳게 버티는 좀 부정적인 측면이 강한 말입니다.
자존심(自尊心)은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는 것은 고집과 비슷하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입니다. 철학적으로는 자기 인격성의 절대적인 가치와 존엄을 스스로 깨달아 아는 일로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Kant)는 이것을 도덕적 동기의 근본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자존심은 그 밑바탕에 자기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나를 인정하고, 믿어주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야 하는 사람은 자녀도 아니고 배우자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 사랑을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합니다.
일본의 일부 빈곤층 독거노인들의 사례입니다.
한 달 연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에도 생활보호 신청을 하지 않는 노인이 많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조사해 보니 "창피해서 싫다"로 나왔습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고독사가 늘어나고 있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인빈곤율과 자살률이 OECD 회원국 가운데 최고가 된 지 오래입니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인들은 저마다 지혜를 짜내어 자존심을 지키면서 노년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노인의 지혜가운데 "지혜는 들음에서 생기고 후회는 말함에서 생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자기의 주장만 고집하지 말고 상대방의 말을 듣는 자세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급적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합니다. 수많은 다툼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생깁니다. 지갑을 먼저 열면 인간관계가 부드러워지고 친구가 생깁니다.
결국 자존심도 건강과 얼마간의 금전적 여유가 있어야 지킬 수가 있습니다.
이 땅을 떠날 때까지 내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면 이 또한 성공적인 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 한마디
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이 들면 점점 말수가 줄어듭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늘어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는 금언을 지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입을 완전히 닫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은 말과 글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말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용하는 소통의 도구입니다.
그런데 말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긍정적인 면입니다.
예로부터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말에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말을 잘하기 위해 웅변학원을 다니고 스피치 훈련을 받기도 합니다.
다음은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신세를 망치는 경우도 있고 명예훼손으로 인해 막대한 손해를 입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사에 자잘한 실언으로 인해 상처를 받고 입히는 경우는 다반사입니다.
문제는 내 잘못으로 상대방을 아프게 했을 때입니다.
이 경우에는 내 잘못을 먼저 인정하고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도 다짐합니다.
“남들이 어떠한 말을 하든지 좋지 않은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야겠다.”
이것이 말로 인해 화를 당하지 않는 최선의 비책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상대방에게 힘을 주는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 등은 아끼지 말고 써야 하겠습니다.
앞으로는 말로 인해 절대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아홉수
옛 어른들로부터 들어온 말입니다.
"아홉수를 잘 넘겨야 한다."
이를테면 우리 나이의 끝자리 수
19,29,39,49,59,69,79,89 등이 그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나이는 인생의 기점을 형성하고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무리를 하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려운 일이 많이 생기고 사고도 더 많이 일어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각별히 주의해서 잘 넘기라는 뜻으로 아홉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미신입니다. 그 어떠한 확실한 근거도 없습니다.
하지만 결혼이나 이사, 사업 등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 나이를 피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은 재껴 두고 59살, 69살 두 나이만 살펴봅시다.
59살만 넘기면 육순, 환갑, 진갑을 넘어 당분간 순탄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69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고개만 잘 넘으면 칠순 즉 고희를 맞이하고 한동안 잘 달릴 수 있다고 합니다.
내 주위에는 칠십에 발을 달고 잘 살아가는 젊은 형님들을 심심찮게 보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기독교에 입문하여 지금까지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그래서 삼재니, 아홉수니 하는 말을 믿지는 않습니다.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니 아홉수가 아니더라도 곱이곱이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참기 어려웠던 그 세월을 잘 이겨내고 지금까지 용케도 잘 살아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해서 그랬던지 육십 아홉을 힘겹게 보냈습니다.
몸도 이곳저곳에서 소리를 내고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희한한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의식적으로 몸을 낮추고 건강도 좀 신경을 써서 열심히 운동을 하는데 에도 다소 무리하고 노화 탓인지 병원 문을 드나들었습니다.
급기야 편도에 종양이 악성으로 판명이 되어 큰 고초를 겪었습니다. 다행히 극히 초기라 잘 치료되어 예전의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인터넷을 서핑하다 보니 아홉수는 남녀 상관없이 고개를 넘는 나이 대 이기 때문에 불운이 들어오는 사람이 꽤 많다고 합니다.
어느 역술인은 아홉수가 들어온 사람이라면 언행에 있어 각별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습니다. 아홉수를 힘겹게 넘겼습니다. 저도 아홉수에 걸린 분들에게 같은 조언을 하고 싶습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지만 '믿음 없는 나'의 뒷모습을 봅니다.
나의 진정한 친구, 예수
칠십 고개가 내겐 깔딱 고개였습니다.
암 친구가 일찍 찾아와 삶의 밑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친구, 예수가 동행해 주었습니다.
넘을 수 있는 힘도 주셨습니다.
사랑의 채찍이었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부 그리고 권력이 다 부질없는 것이고 인생이 잠시 왔다가는 아침 안개와 같다는 말씀을 직접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아울러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배우는 귀한 시간을 주셨습니다.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주시고 피할 길도 열어 주셨습니다.
훗날, 아름다운 인생의 상흔(傷痕)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 힘든 치료기간 동안 늘 동행해 주시고 용기를 잃지 않도록 끝까지 손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젠 외롭지 않습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늘 내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갈 참 친구, 예수가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받기만 했었지만
덤으로 주신 남은 세월은
나도 행함으로 빚진 것을 갚아 나가렵니다.
늦게나마 정도를 걷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잘 산다는 의미
오늘은 노년에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보니 세상사 이치를 조금은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남들에게 못된 짓을 해도 잘 사는 사람이 있고 착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이웃들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잘 산다는 의미가 나이 들어감에 따라 달랐습니다.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아왔습니다.
교리에 얽매인 신앙생활을 하기보다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한데 나도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지만 세상으로 빠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기독교인 가운데에서도 너무 이기적이고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세상적으로 사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개중에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못된 버릇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도저히 믿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하기사 나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좀 바보가 되고 좀 손해를 보고 먼저 주려고 노력해 왔지만 알게 모르게 지은 허물이 많았을 것입니다.
세상 사는 목적이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국 돈입니다. 재산을 더 많이 벌려고 야단들입니다.
그런데 돈이 인간의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옛말에 "천석꾼 천 가지 걱정, 만석꾼 만 가지 걱정 "이라고 해서 재산이 많으면 그만큼 걱정거리도 많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마음에 참 평안이 있고 몸이 건강해야 진정으로 잘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돈도 어느 정도 있으면 금상첨화이겠지요.
특히 인생 2 모작에 해당하는 노년의 길은 더 그렇습니다.
인생의 결산기인 이 시대에 몸과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잘 사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진정한 행복은 평범한 일상에 있습니다.
세상에 나도는 말입니다.
“예쁘다고 흔들고 다녀도 50이면 봐줄 사람 없고 돈 많다 자랑해도 70이면 소용없고
건강하다고 자랑해도 80이면 소용없다.
이빨이 성할 때 맛있는 것 많이 먹고 걸을 수 있을 때 열심히 다니고
베풀 수 있을 때 베풀고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기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의 길이다!”
결국,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흐르는 세월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희로애락이 함께 한 세월이었습니다. 건강하고 여유가 있었을 때, 가족이나 이웃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특히, 자칭 기독교 신자임을 자처하고 살았는데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보니 부끄러운 점이 너무 많았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 하다 보니 조그마한 열매를 맺었지만 속으론 상처를 많이 입었습니다.
"신(神)은 공평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절대로 한 사람에게 건강, 돈, 명예, 권력을 다 주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의 끝이 좋지 않은 모습을 자주 봅니다.
돈 많은 갑부가 건강 때문에 그 많은 돈을 다 써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안타까운 경우를 허다하게 봅니다.
결국, 보통사람들의 건강한 하루하루가 참 행복의 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번에 큰 아픔을 당해 인생길의 최 말단까지 떨어져서 고초를 당해보니
평범한 일상(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주님께 이런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 오늘도 덤으로, 보너스로 하루를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값지고 보람 있게 보낼 수 있도록 지혜와 은총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창조자의 숨결을 느끼며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갑니다.
타인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캐런 케이시(Karen Casey)가 쓴 책, [Change Your Mind and Your Life Will Follow]을 방수연 작가가 번역했습니다.
[타인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이라는 내용 위주의 제목을 뽑았습니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 정독했습니다.
살다 보니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의 감정이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착합니다. 그래서 소위 막말을 함부로 못합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전생에 빚이 있었는지 내가 잘해주고 조심조심 처신하려고 애썼는 데에도 불구하고 또 한 방을 먹일 때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 어떻게 처신해야 내가 상처를 덜 받을 수 있을까 늘 고민입니다.
그 답을 이 책에서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인간관계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 관계는 균형을 이루어 별문제 없이 잘 지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거리 두기입니다.
타인이 하거나 하려고 하는 일을 지적하거나 통제 또는 판단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 일정한 거리를 두라는 것입니다. 금방 반응을 보이지 말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반사적 반응을 슬기롭게 피하라고 합니다.
특히 상대방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판단은 모든 관계를 망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과의 의견충돌이 있을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타인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는 일을 삼가야 하고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를 내는 일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시당하는 것은 매를 맞는 것보다 더 아플 수 있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위사람들을 깎아내리는 못된 습관이 깊숙이 배어 있습니다.
비판에는 사랑이 없고 타인을 비판하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맞닥뜨린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괴로운 경험이 많았지만 즐거운 경험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데 괴로운 경험도 이제와 생각하니 대부분 내가 성장해 가는데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명령을 내리셨나 봅니다.
앞으로 나부터 타인의 감정을 통제하려는 의지를 내려놓아야겠습니다.
내게 무슨 말을 하든지 참고 넘어갈 수 있는 큰 그릇을 만들어 가야겠습니다.
사실 야박한 말도 내게 관심이 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이 책의 말미에 이런 말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할 수 없다면 적어도 서로 해를 끼치지는 말자"
그래, 타인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큰 그릇을 늘 준비해야겠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달라이 라마의 기도
달라이 라마(1935년 생), 티베트 망명정부의 수반이자 정신적인 지도자입니다.
중국에 나라를 빼앗긴 후 인도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티베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정신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는 살생을 금하고 용서를 주장하는 큰 스승입니다.
내 가슴을 울렸던 기도문의 한 예입니다.
" 사람을 만날 때마다 언제나 나 자신을 가장 미천한 사람으로 여기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상대방을 최고의 존재로 여기게 하소서. 나쁜 성격을 갖고 죄와 고통에 억눌린 존재를 볼 때면, 마치 귀한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그들을 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다른 사람이 시기심으로 나를 욕하고 비난해도 나를 기쁜 마음으로 패배하게 하고 승리는 그들에게 주소서.
내가 큰 희망을 갖고 도와준 사람이 나를 심하게 해칠 때, 그를 최고의 스승으로 여기게 하소서. 그리고 나로 하여금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모든 존재에게 도움과 행복을 줄 수 있게 하소서."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그의 큰 자비 정신과 처세술을 배웁니다.
우리는 잠시 왔다가는 이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주위를 돌아보게 됩니다.
남의 그릇이 크게 보입니다.
나보다 잘 되고 잘난 사람들을 괜히 시기하게 됩니다.
심지어 사촌이 논을 사도 배가 아픕니다.
사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깊이 알고 보면 그 사람 나름대로 말 못 할 삶의 고통이 하나 이상은 반드시 있습니다.
옥에도 티가 있듯이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진 것에 만족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 그게 진정으로 여유 있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한 가지 더 보탠다면 달라이 라마의 넓은 마음입니다.
특히, 시기심으로 나를 욕하고 비난해도 오히려 그를 스승으로 여기라는 가르침은 불교도가 아니라도 꼭 따르고 싶습니다.
크리스천(Christian) 노인의 작은 행복
행복이란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 가운데 사랑과 더불어 가장 으뜸이라 생각합니다.
특별히 삶을 정리해야 하는 노인에게 있어서 행복은 너무나 소중하다 하겠습니다.
노후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주요 요소로는 건강, 재산, 친구, 가정화목, 자손번창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건강이겠지요. 늙어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 들면 예외 없이 몸에 이상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생로병사의 흐름을 막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이 땅을 떠나야 하는 운명을 예외 없이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아파보니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찬송가 465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을 불렀습니다.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라고 합니다.
특별히 4절의 가사가 와닿았습니다.
"내 몸의 약함을 아시는 주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네
괴로운 날이나 기쁜 때나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기독교인은 주일에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의무이자 행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건강해야 교회에 나가 예배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같이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식사까지 같이 하면 친교가 자동적으로 됩니다.
오늘 주일을 맞이하여 이러한 소소한 행복을 느낍니다.
또한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고 치료해 주시며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크리스천 노인의 작은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성탄절에 만나고 싶은 예수님
성탄절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생일날입니다.
12월 25일은 정확한 날짜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합의하여 결정된 날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바꾼 위대한 성인의 생일이 정확하게 기록되지 아니한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다만,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더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히브리어로 “하나님은 구원해 주신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BC(기원전) 6~5년 경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며 그분의 어머니는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은 33세의 짧은 인생을 사셨지만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포함하여 모든 역사를 변화시켰습니다. 물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셨지만.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탄생은 성령에 의해 처녀 즉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잉태되어 태어났다"라고 믿습니다. 당시 정혼한 다윗의 자손인 남편 요셉이 있었지만 천사들의 소식을 듣고 이 사실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사도신경에서도 기록되어 있고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 개신교 심지어 이슬람교까지 동정녀 마리아에서 태어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학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암수가 짝짓기를 해야 후손을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이를 비롯한 오병이어의 기적, 육신의 부활 등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것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신다."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머리를 하나님과 견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못할 일이 없다고 봅니다.
우리 한국의 개신교만 놓고 볼 때, 그 역사가 약 140년 밖에 되지 않지만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약 천만 명의 신자가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번 성탄절은 내게 좀 특별한 명절입니다.
칠십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이고 특별히 건강이 소중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맞이하는 첫 성탄절이기도 합니다.
잠시 초등학교 시절의 시골 교회 성탄절 크리스마스를 떠올려 봅니다. 촛불을 켜고 예배를 드리면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집집마다 돌면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등 새벽 송을 부르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뜨겁게 믿지 못하고 무늬만 기독교인이 아니었는가를 반성해 봅니다. 세상의 출세와 명예를 위하여 예수를 이용하지는 않았는지 자문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보다 ‘주시옵소서’를 더 많이 했던 기복신앙이었음을 자복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기독교인은 많은데 참된 교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이들보다 더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나부터 크게 반성합니다.
이제 주님을 만날 날이 가까워지니까 철이 드는 모양입니다.
좁은 지구촌의 두 곳(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하마스)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결코 하나님이 원치 않은 전쟁일 것입니다.
하루빨리 전쟁이 종식되어 평화가 정착되기를 기도합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일들도 벌어졌습니다.
얼마 전 강원도 춘천에서 70대 여신도 3명이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귀가하는 중 파란불에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이때 80대 운전자가 신호위반으로 달리다가 세 사람을 치어 모두 현장에서 사망하는 끔찍한 사고를 냈습니다. 그것도 새벽재단을 쌓고 집으로 향하던 신실한 믿음의 식구들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참담하고 애석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때로는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건강을 주시라고 기도했는데 암이라는 무서운 질병도 주십니다.
그래도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합니다.
여기에도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깊은 뜻이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아기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그런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나를 위해 끝까지 기도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비록 세상이 어지러워 한 치 앞을 예견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세상 욕심을 다 내려놓은 젊은 노인의 하루
UN은 인류의 체질과 평균수명에 대한 측정결과를 토대로 66세~79세 까지를 중년, 80세~99세 까지를 노년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우리 나이로 금년에 칠십 인 나는 노년이 아니라 중년에 해당되니 한층 젊어진 기분입니다.
김형석 교수(1920년생)는 100세를 훨씬 넘겼지만 아직도 노년이 아닌 청년같이 살고 있습니다.
김 교수께서 늘 주장하시는 바인데 지난 인생길에서 제일 좋았던 시기는 60세~75세 까지를 꼽았습니다.
아마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고 금전적으로도 약간의 여유가 있어 이 시기를 택한 것 같습니다.
하기사 이 나이를 못 채우고 이 땅을 떠난 사람도 많습니다.
어쩌면 나이에 상관없이 지금 살아있음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점점 집콕(집에만 콕 처박혀 있다는 신조어)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잔소리하지 않고 밥 먹었으면 집밖으로 나가는 남편이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노후에는 부부가 서로 각자의 시간을 갖고 여유롭게 지내는 것이 제일 멋있으니까요.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집콕이 늘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움직이면 돈을 쓴다고 나들이를 삼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는 인간관계를 통해 상처받지 않으려고 일부러 혼자 지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평생 친구가 없이 거의 혼자 지내다가 이 땅을 떠나면서 '실패한 인생'이라고 고백한 이어령 교수가 쓴 시 '나에게 이야기하기' 일부입니다.
"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 하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실수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너무 뒤돌아보지 말라 하네. 지나간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더 의미 있으므로"
글에서는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살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누구나 지난날의 실수를 가슴속에 묻어두고 아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순한 사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남에게 잘하려고 가급적 말수를 줄이고 지갑도 먼저 엽니다. 그런데 사람인지라 한두 번은 실수를 합니다.
그때마다 상대방의 감정이 섞인 말 한마디에 밖으로 표현은 못하고 마음이 여리고 순해서 스스로 상처를 받는 일이 많습니다. 저도 그런 부류의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인간관계를 기피하려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은퇴한 백수의 시계가 더 빨리 간다."
요즘 내가 느끼는 세월의 감입니다.
오늘은 중부지방에 많은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늘 하던 대로 아침 5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합니다.
감사기도를 시작으로 충분한 기체조와 산뜻하게 화장실을 갔다가 자전거를 타고 뒷산으로 향합니다.
테니스장에 도착하여 불을 켜고 각종 쓰레기통을 비우고 동료들과 한두 게임으로 몸을 풉니다.
이어서 뒷산 초입에 있는 각종 운동기구를 이용하여 부족한 근육운동 등을 합니다.
특히 뒤로 걷기를 하면서 날기새(날마다 기막힌 새벽, 김동호 목사) 새벽기도회를 유튜브로 들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오전 시간에는 일본어 공부, 신문 읽기 (사설과 칼럼 포함), 책 읽기로 보냅니다.
오후에는 막간을 이용하여 기타와 장구를 연습하고 책 읽기와 글쓰기로 보냅니다.
중간중간에 집 공간을 이용하여 걷기와 체조를 실시하여 몸을 이완시킵니다.
저녁시간에는 못다 한 글 읽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급적 10시 이전에 취침을 하려고 합니다. 다음 날 5시에 기상해야 하니까요.
이러다 보면 금방 하루가 다 지나갑니다.
물론 하루 이틀 정도 집에만 있지 나머지 날들은 밖으로 나갑니다.
주일날에는 교회 예배 및 봉사활동, 수금요일은 민요와 장구, 목요일은 스크린골프로 시간이 채워집니다.
오늘도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습니다. 하루가 번개같이 지나갑니다.
"주님, 오늘 하루는 덤으로, 특별 보너스로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값지고 보람 있게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매일 아침 드리는 기도입니다.
평범하게 큰 욕심 없이 감사함으로 보내는 오늘 하루가 그래서 값집니다.
남은 세월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했듯이 나도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습니다.
사람 냄새가 나는 삶
어릴 적 고향의 풍경이 그리워집니다.
집에서나 들판에서나 이웃과 음식을 나누고 모내기나 가을 추수, 나아가 관혼상제가 있으면 발 벗고 나섰습니다.
그게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삶이었습니다.
요즘 도시의 삶은 사람 냄새는커녕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여 너무 삭막해져 가고 있습니다.
과거 직장생활을 잠시 회고해 봅니다.
대학교수 이전에 농협은행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얘기입니다.
나름대로 사람 냄새나는 지점장이 되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일찍 출근하여 화장실 청소를 하고 직원들에게 군림하지 않는 지점장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생일을 맞이하는 직원들에게는 내 돈으로 책을 사서 선물과 함께 전달했습니다.
취미생활도 권장했습니다.
오카리나를 구입해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엊그제 15년 전 농협은행 (풍무중앙지점)에서 같이 근무했던 멤버들이 모처럼 우리 동네를 찾아왔습니다.
벌써 두 분은 명예퇴직을 했다고 합니다.
고촌에서 꽤나 이름난 식당(채선당)에서 맛있는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또한 인생 2 모작 농사도 풍작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난해 발간한 내 졸저 [혼자서도 고물고물 잘 놀자] 수필집을 1권씩 정성껏 사인해서 주었습니다.
가정에서도 사람 냄새가 나는 가장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눈이 내리면 집사람 차를 몰래 치우고 설거지, 빨래, 청소, 각종 쓰레기 버리기 등은 내 차지가 되었습니다.
각종 동호인 모임에서도 내가 좀 손해 보고 바보가 되어 낮아지려고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진심 어린 마음으로 사람 냄새를 풍기려고 하는데 상대방은 전혀 반응이 없는 경우를 허다하게 봅니다. 그만큼 각박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가깝게는 우리 집사람도 최소한의 반응이 없어서 서운했을 때가 많았습니다.
새 해부터는 마음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들판의 꽃들은 그 누구에게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향기를 내뿜습니다.
나도 그런 꽃들을 닮고 싶습니다.
걸림돌과 디딤돌
돌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산이나 들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흔하디 흔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사에 꼭 필요한 물건입니다.
돌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리면 이것은 걸림돌이 되지만
냇가를 건널 때 물가에 놓인 돌은 고마운 디딤돌이 됩니다.
살다 보면 원치 않는 곳에서 인생의 돌부리를 만납니다. 그것이 건강 일수도 있고 재산이나 명예 일수도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재산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은 것은 많이 잃은 것이며
건강을 잃은 것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그만큼 건강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특히 목숨을 위협하는 암이라는 돌부리를 만나면 당황하고 실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무서운 암을 잘 치료하여 완치 판정을 받은 이른바 암경험자로 힘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의술이 발달하여 조기에 발견하고 다양한 치료과정을 거치다 보니 생존확률이 높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암은 죽는 병이 아니라 만성질환으로 여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암의 그늘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얘기를 듣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계기로 위축되기는커녕 암을 극복하고 더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암이라는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는 기적을 만들어낸 사람들입니다.
나를 포함한 많은 경험자들이 그들로 인해 큰 힘을 얻습니다.
디딤돌로 만들어준 그분께 감사하면서.
노인들이여, 나를 위해 과감하게 다 쓰고 갑시다.
십수 년 전, 농협은행 지점장 시절의 얘기입니다.
칠십 대 중반의 할머니 단골 고객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지점에 올 때마다 지점장실을 찾았습니다.
서금요법사인 내가 수지침에다가 뜸까지 놓아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점장님, 침을 맞고 집에 가면 기분이 너무 좋아요. 몸이 가뿐하고 저녁에 잠도 잘 온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적지 않은 돈을 정기예금에 넣고 있었는데 매 1년마다 이자를 보태서 재예치를 하곤 하셨습니다.
한 번은 보다 못해 부탁을 드렸습니다.
"여사님 매번 한 푼도 빼지 않고 재예치를 하시는데 이제 본인을 위해 과감하게 좀 쓰고 지내세요. 좋은 곳으로 여행도 다니고요, 맛있는 거 돈 아끼지 말고 사서 잡수시고요...."
천주교 황창연 신부님도 늘 주장하는 사항입니다. 다 쓰고 죽자고요.
이른바 '쓰죽회(이 땅에 있을 때 다 쓰고 죽자는 철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에 가입하라는 부탁입니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돈 아끼지 말고 나를 위해 또한 남을 위해 다 쓰고 이 땅을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생일날이나 결혼기념일 등을 맞이하여 누가 나한테 해 주려나 기다리지 말고 자기를 위해 럭셔리하게 돈을 지출하라는 얘기입니다.
더 나이 들면 돈을 쓰고 싶어도 힘이 없어 쓰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자기 나이만큼 빠르게 흘러간다더니 칠십에 오르니 정말 실감이 납니다.
이를테면 칠십은 시속 70km , 팔십은 시속 80km, 구십은 시속 90km로 달린다고 하니 나이가 많을수록 점점 더 빨리 가는 게 세월인가 봅니다.
이래서 인생을 "아침에 잠시 왔다가는 안개와 같다"라고 했는가 봅니다.
오늘 아침 운동을 하면서 그 옛날 할머니 고객이 불현듯 생각이 났습니다.
아직도 은행에 돈을 넣어두고 한 푼도 쓰지 않은 채 이 땅을 떠나는 불쌍한(?) 노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두 다리로 걷고 움직일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다니고 있는 돈은 다 쓰고 가는 것이 나와 자손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천주교 황 신부의 당부와 같이 죽을 때 사용할 장제비로 쓸 500만 원 정도는 별도로 남겨주면 좋을 것입니다. 모자라는 돈은 부조금으로 채우면 된다는 신부님의 유머가 웃음을 짓게 합니다.
우리나라 노인빈곤율과 자살률이 OECD 국가 가운데 1위를 달린다고 합니다.
어쩌면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다 보니 노후가 쓸쓸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새롭게 먹어야겠습니다.
나부터 얼마 되지 않은 노후자금이지만 과감하게 쓰고 미련 없이 이 땅을 훌훌 떠나고 싶습니다.
그 옛날 할머니 고객처럼 은행에만 쌓아놓지 말고...
여유를 가져다주는 생활 속의 작은 습관
늘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이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하는 거 없이 후딱 하고 하루가 지나갑니다. 여유로운 삶이 그리워집니다.
은퇴하면 여유가 생겨 유유자적하게 지낼 줄 알았는데 그게 환상이었습니다.
은퇴자금이 여유로운 사람이 그리 많지 않고 노년을 재미있고 알차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또한 적습니다.
나는 이것을 미리 예견하고 혼자서도 고물고물 잘 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습니다.
요즘 생활의 지혜를 하나 더 찾았습니다.
자족하는 삶입니다. 비교하지 않고 내 있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더불어 여유를 가지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습니다.
소소한 일입니다만 여유를 주는 생활 속의 사례입니다.
우선 화장실에서 쓰는 물건입니다.
화장지, 비누, 치약, 칫솔, 수건, 면도날 등을 좀 여유 있게 미리 사다 놓습니다.
얼마나 여유로운지 모릅니다.
어제는 미리 화장지 두루마리를 사서 자전거에 싣고 오는데 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빨래도 미리 하니 좋습니다.
옛날에는 가득 쌓아두었다가 한꺼번에 세탁기를 돌렸었는데 이제 적당히 양이 차면 돌립니다.
팬티나 속옷 그리고 운동으로 젖은 체육복을 그때그때 세탁하여 말리니 갈아입을 옷의 여유가 생깁니다.
먹는 약도 그렇습니다.
나는 비타민C, 비타민(아로나민 골드) 그리고 가장 낮은 혈압약, 3개월 분치를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약국에서 타서 먹습니다.
세월이 어떻게 빨리 흐르는지 엊그제 약을 타왔는데 벌써 다 떨어져 갑니다.
이것도 지금까지의 관행을 바꾸어 조금 앞당겨서 준비하니 한결 여유가 생깁니다.
매일 아침 테니스를 치고 뒷산에 올라가 부족한 운동을 더합니다.
봄이 되니 진달래나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트려 너무 보기 좋습니다. 사방천지가 다 내 정원입니다.
비록 남들처럼 많은 재산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이제 더 채우려고 하는 욕심을 다 내려놓습니다.
욕망의 그릇을 비우니 한결 여유 있는 삶이 이어집니다.
이 땅을 떠날 때에 빈 몸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니 계속 비어나가고 싶습니다.
운칠기삼
오늘 아침에 예보에도 없었던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지만 여전히 테니스장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습니다.
테니스의 맛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십 년이 넘는 테니스 경력이지만 실력은 아직도 동배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같이 컨디션이 좋고 파트너를 잘 만나면 게임에서 원사이드 하게 이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겸손한(?) 표현인 '운칠기삼'이 생각났습니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운이 칠 할이고 기술이 삼 할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일은 재주나 노력보다 운에 달려 있음을 빗대어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과거 고스톱이나 골프 라운딩 시에 써먹곤 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실력보다 결과가 좋았을 때, 동반자에게 미안한 표현으로 사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 하고 실력이 있어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세상사 순리이자 진리이겠지요. 하지만 인간사에 실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운도 같이 따라야 비교적 수월하게 넘어갔던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찌질이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6.25 전쟁이 막 끝난 시절에 태어났으니 제 또래 베이비 부머들은 모두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에는 농촌에서 중학교만 나와도 부러운 시선을 보냈습니다.
대개 농사를 짓거나 공장에 나가 일을 하면서 겨우 끼니를 이어가곤 했습니다.
그랬던 베이비 부머들이 이제 칠십의 고지에 올랐습니다.
지금까지 운칠기삼의 행운이 같이하여 아들 딸 낳고 위로는 부모님을 공경하며 살아왔습니다.
남은 세월도 우리 베이비부머에게 멋진 인생 마무리의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과유불급', 몸으로 배운 하루
이제 무리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몸으로 배운 하루였습니다.
간밤에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몇 번 깨다 보니 베스트 컨디션이 아니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좀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가야 하는데 평소와 다름없는 스케줄을 다 소화했으니 칠십 노인으로서 무리였나 봅니다.
텃밭에서 그리고 오후에 일산에서 열린 스크린골프를 치면서 몸이 착 가라앉는 기분이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테니스장을 나가는데 오늘은 여느 때보다 일찍 나갔습니다.
테니스를 즐기면서 쳐야 하는데 코트에 들어가면 늘 전투적으로 하게 됩니다.
오늘은 파트너를 잘 만나고 나 역시 혼신의 힘을 다 쏟아붓다 보니 두 게임을 모두 6 : 0으로 이겼습니다.
하지만 마음만은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무리할 이유가 없었는데...
이제 나이를 생각해서 이른바 영감테니스로 바꾸고 승패에 너무 연연하기보다 즐겁게, 재미있게 쳐야겠다는 생각을 이 아침에 했습니다.
그리고 덤으로 하는 골프스윙 연습이나 각종 체력단련 기구를 이용한 스트레칭 운동도 적당히 조절해야 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오늘은 매사에 30%의 여유를 항상 남겨 놓으라는 '계영배'의 가르침을 잠시 잊은 날입니다.
과유불급!!!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함과 같다"
다시 한번 마음속에 깊이 새깁니다.
노년의 배려하는 삶
가끔 순환도로나 고속도로 등 중장거리 운전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 차선을 지키며 충분히 앞차와 거리를 두면서 안전운전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위험하게 추월하는 얌체 운전자를 꼭 만납니다.
깜짝 놀라서 주의 깜빡이를 켭니다만 아랑곳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계속 비집고 다닙니다.
결국 사고와 직결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운전입니다.
물론 거리의 운전자들이 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경기가 좋지 않아 많은 자영업자들이 폐업을 한다고 합니다. 청년들도 자기가 원하는 직장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하네요.
그러다 보니 잔뜩 신경이 날카롭게 돋아난 운전자가 도로에 즐비합니다.
따라서 조심조심 운전대를 잡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특히, 칠십이 넘은 노인들은 그 옛날 젊은 혈기를 버리고 방어운전을 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니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나타나 길을 막고 때로는 깊은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참다 참다가 속병이 걸리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대들다가 인간관계에서 영원히 멀어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때 내가 좀 더 이해하고 참을 걸 하는 후회를 가끔 해봅니다.
내가 한 번 참으면 술술 넘어갈 수 있었는데 배려심이 부족한 탓에 문제를 키운 것입니다.
이제 거리에서 내 앞을 위험하게 추월하는 운전자를 보면 필시 바쁜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내려놓고 서행하려고 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하고 분수를 모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내가 바보가 되고 이해하려는 폭넓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자고 다짐을 합니다.
그것이 칠십 대에 올라선 노인이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기뻐하라
어느덧 2월이 거의 다 지나고 봄이 오는 3월이 다가옵니다.
감기기운이 있었지만 흥겨운 '민요와 장구'시간에 참석하여 신나게 장구치고 우리 민요를 흥겹게 부르고 왔습니다.
온갖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우리 가락은 본래 흥이 나고 신바람이 납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그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신명 나는 노래와 함께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을 재미있게, 즐겁게, 신명 나게 보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덧없는 세상입니다.
석가모니도 덧없는 세상을 강조하며 이 땅을 떠났습니다.
석가모니(본명 고타마 싯다르타)는 예수, 공자와 더불어 세계 3대 성인으로 불리 웁니다.
80세를 일기로 이 땅에 살면서 수많은 깨달음의 지혜를 남겼습니다.
마지막으로 입적하기 전 제자들에게 남긴 말입니다.
"세상은 덧없으며 무릇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져 간다.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이 말을 마친 석가모니는 돌아누우며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덧없는 인생입니다.
대개 7,8십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보다 훨씬 앞에 떠나는 이들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오늘 하루'가 소중합니다.
기왕이면 즐겁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빌립보서 4장 4절)
또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18절)
인생길에서 늘 기뻐할 일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기뻐하라고 합니다.
분명히 깊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뻐할 일이 없다면 사는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돈이 많고 건강하더라도 무미건조하게 세월만 축을 낸다면 사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취미 하나 없이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을 떠날 때가 되면 대부분 후회를 하게 됩니다.
걸을 수 있고 내 의지대로 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기는 게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적 위의 기적입니다.
살아있는 게 기적이니까요.
덧없는 이 세상이지만 죽는 날까지 늘 감사하면서 기뻐하는 삶을 영위하고 싶습니다.
우정~망년지교
벗을 사귀는데 나이를 따지지 않는 것을 '망년지교(亡年之交)'라고 합니다.
지금이야 한두 살만 많아도 선후배 대접을 깍듯이 하지만 예전에는 아래위 열 살 이내로는 으레 객지 벗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내게는 동네 테니스를 즐기면서 친구 이상으로 가까이 사귀어 온 여덟 살 위의 교장선생님이 계십니다.
십 수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일 아침에 만나 테니스로 우정을 다져왔습니다.
나이를 넘어서는 우정을 나누기가 쉬운 것이 아니지만 취미가 같고 마음이 통하다 보니 가능했습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테니스장을 찾았습니다.
칠십이 된 이 나이에도 여전히 라켓을 들고 힘차게 스윙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아들뻘 되는 청년들과 대등한 실력으로 코트를 누빌 수 있으니 이 또한 하늘이 내린 축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올해는 내가 수십 년 동안 해온 텃밭농사를 망년지교 사이인 교장선생님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나도 서툰 초보 농사꾼이지만 아는 범위 내에서 훈수를 두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테니스 운동을 끝내고 같이 밭에 가서 풀을 뽑고 토마토와 가지, 고추를 끈으로 단단히 묶어서 위로 잘 자라도록 하였습니다. 물도 흥건히 주었습니다.
가끔 혼자 올 때에는 이런저런 밭 관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은 잘 자란 상추와 솎은 열무를 듬뿍 수확했습니다.
집에서 먹고 테니스 동호인들과의 적은 양이지만 나누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테니스에다가 텃밭농사까지 같이 하니 취미생활이 더 풍족해졌습니다.
아침 식사를 인근 식당(감미옥)에서 맛있게 했습니다. 막걸리 한 잔씩 걸치면서.
오늘도 우정이 또 모락모락 자라납니다.
안락사(安樂死)를 생각하며
최근 안락사를 최초로 도입한 네덜란드에서 칠십 대 부부가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안락사를 통해서.
부부는 유치원 시절에 만나 결혼하여 50년을 해로(偕老) 하였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지독한 허리통증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였고 아내는 치매증상이 나타나 삶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 기사를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는데 대부분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우리도 이 제도를 하루빨리 도입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안락사는 2002년 최초로 네덜란드에서 합법화된 이후로 스위스, 벨기에, 포르투갈, 룩셈부르크 등이 도입하였습니다. 최근 미국의 일부 주에서, 호주에서도 안락사를 허용하는 등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 문제가 공론화 장으로 나왔습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76.3%가 안락사를 찬성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니
첫째, 남은 삶의 무의미 30%
둘째, 존엄한 죽음에 대한 권리 26%
셋째, 고통의 경감 20.6%
넷째, 가족 고통과 부담 14.8%
다섯째, 의료비 돌봄으로 인한 사회적 부담 4.6% 등으로 나왔습니다.
예상대로 '삶의 무의미'가 제일 큰 요인으로 나타났습니다.
내 의지대로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을 남에게 의지해야 한다면 삶의 의미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장수가 축복이 될 수도 있고 불행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건강하고 오래 사는 거라면 누구나 환영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생로병사의 흐름을 따라갑니다. 죽음의 시기를 조금 늦추거나 당기거나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행복한 장수 노인으로 올해 105세인 현역 김형석 교수님을 들 수 있겠습니다.
백 살이 넘도록 치매도 없고 큰 병치레 없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시니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물론 예외 중의 예외일 것입니다.
이렇게만 장수한다면 뭔 걱정이겠습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균수명을 살고 이 땅을 떠납니다.
떠날 때, 큰 고통 없이 잠자듯이 갔으면 좋겠다고 노인들은 원합니다.
크게 보면 이것이 안락사일 것입니다.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산다면 안락사를 적극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다만, 생명존중 차원에서 신중을 기해야 하고 특히 악용과 남용의 위험을 줄이는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안락사는 하루빨리 도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노인자살률을 줄이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웰다잉의 길이 될 것입니다.
나와 같은 또래의 네덜란드 부부가 은근히 부럽습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살만큼 살다가 한날한시에 이 땅을 떠났으니 죽음의 복을 스스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께 진심으로 명복을 빕니다.
고향 가는 길에서 다짐하는 후회 없는 인생
내일이 고향(김천)에 계시는 어머님 생신이라 곧장 짐을 싸고 서울 역으로 향했습니다.
자가용은 네댓 시간이 넘게 걸려 가급적이면 KTX를 이용하려 합니다.
열차를 타고 가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차는 왕복표를 끊을 수 있지만 인생열차는 편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새롭게 먹고 하루하루를 후회 없이 지내야겠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긴 들었나 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한번 주어졌습니다.
후회 없이 살고 싶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이 땅을 떠날 때에는 한 가지 이상 후회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출세를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장 후회를 많이 한다는 3 가지입니다.
첫째, 왜 더 참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했는가?
둘째, 왜 더 관심을 주지 못하고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했는가?
셋째, 왜 더 베풀고 나누지 못했는가?
물론 이외에도 후회스럽기만 한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칠십이 넘으면 그날을 늘 준비하면서 살아가라고 합니다.
나이 들면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떠날 때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최소한 두 가지 만이라도 실천하고 싶습니다.
"지금이라도 가족을 비롯하여 사랑해야 할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더 사랑하자.
그리고 이웃에게 더 베풀고 나누며 살아가자."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가는 인생길이니 다 주고 떠난다면 행복한 마무리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랑했다는 고백과 함께.
고향으로 가는 길에서 후회 없이 이 땅을 떠날 생각을 미리 해 봅니다.
안전거리 유지와 노년의 입
국민 휴가기간에 밀리는 줄 예견했지만 고향을 향해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휴가철 고속도로는 군데군데 서행하는 곳이 많았습니다.
작은 추돌사고로 갓길에 주차된 차들을 심심찮게 봅니다.
내비게이션에 서행 구간과 앞에서 급정거를 했다는 사인(sign)을 보내오기도 합니다.
대개 서행을 반복하다 보니 잠시 집중하지 않아 사고를 일으킵니다.
이는 한꺼번에 휴가를 실시하는 한국의 독특한 휴가문화에도 그 원인이 있습니다.
물론 성질 급한 우리 국민성에도 그 이유가 있겠지요.
나름대로는 늘 앞차와 옆 차를 주시하면서 조심조심 운전대를 잡습니다.
특히 앞차와의 간격을 충분히 유지하여 급정거를 사전에 예방코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따금씩 급하게 끼어드는 얌체족 때문에 기분이 상하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안전운전을 위한 경구가 이곳저곳에 걸려있습니다.
이번 고향 가는 길에서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안전거리 유지는 가장 좋은 에어백입니다"
에어백은 충돌이 발생할 경우 생명을 보호하는 장치입니다.
안전거리를 유지하면 사고의 90% 이상은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다만 얄밉게 끼어드는 얌체족을 애교로 봐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노년의 삶도 운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급적 입을 닫고 침묵을 지키는 것은 인생길의 가장 좋은 에어백이다"
노인이 되면 자꾸 참견하고 싶고 훈수를 두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보니 상처를 주고 본인도 상처를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좀 입을 닫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넓은 아량이 필요합니다.
그게 노년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안전벨트이자 에어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운전은 그런대로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아직도 입은 신중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침묵은 금이다."라는 경구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남은 나날을 살아가고자 다짐에 다짐을 합니다.
고희(古稀)를 맞은 이 아침에
드디어 오늘(음력 7월 14일) 칠순, 고희를 맞이했습니다.
고희(古稀)는 말 그대로 고래(古來)로부터 드문 나이란 뜻으로 일흔 살을 이르는 말입니다.
두보의 곡강시(曲江詩)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기사 '만' 나이로 치면 1년이 남았습니다만 아직도 음력을 사용하는 우리 세대이다 보니 그대로 지냅니다.
요즘 평균수명이 늘다 보니 칠순은 물론 팔순잔치도 건너뛴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 뜻깊은 날에 가까운 친척들과 식사라도 한 끼 해야 하는데 이것마저도 생략하였습니다.
대신에 집 근처 고촌테니스회 아침반 모임에서 거하게 칠순 잔치를 베풀어 주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나도 색소폰을 비롯하여 기타, 오카리나, 장구를 치면서 분위기를 돋우었습니다.
많은 회원들이 합심하여 음식을 장만하고 선물까지 듬뿍 받으니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역시 테니스는 운동도 좋고 특히 회원들 상호 간의 유대도 강화되어 형제자매 같은 기분입니다.
돌이켜보니 엄마 뱃속에서부터 지금까지 70년 동안 살아오면서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죽을 고비도 숱하게 넘겼습니다.
가난에 찌들어서 일찍 직업전선에 나와야 했습니다.
용케도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일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다소 무리했던 탓에 몸과 마음을 해쳐 고생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신앙의 힘으로 다 이겨냈습니다.
힘들었을 때나 기뻤을 때나 늘 함께 해주시는 그분(주님)이 계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은 "잠시 왔다가는 아침 안개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인생길을 정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후세에 다 넘겨주고 홀연히 이 땅을 떠나야 합니다.
세 가지 소원입니다.
먼저, 사는 날까지 주위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최저로 받고 주님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다음으로는 아직도 남아있는 헛된 욕심을 다 내려놓고 유유자적하게 세월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이 있다면 내 가족과 이웃에게 다 나눠주고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습니다.
하루하루가 덤이요 특별 보너스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끝까지 사람답게 살다가 주님 품에 안기게 하옵소서.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위 사람들과 늘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비교 대상을 나보다 나은 사람을 주로 정하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까운 친척이라도 상대가 잘 되는 것이 부러워서, 시기심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는데 이와 같이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고 했겠습니까?
칠십 년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때로는 이러한 배 아픈 것 때문에 더 열심히(?) 노력하여 배 아프게 했던 상대를 따라잡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잘 되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던 적도 있었습니다.
고졸에서 박사까지, 은행 지점장에서 대학교수까지 지냈으니 이만하면 그들을 충분히 따라잡았습니다.
은퇴 이후에도 다양한 취미생활과 더불어 학자로서의 노력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현직에 있을 때보다 더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작가로서 베스트셀러 에세이(혼자서도 고물고물 잘 놀자)를 낸 덕분에 주부대학, 장수대학 등에 초청을 받아 명강사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오히려 내가 친구나 동료들로부터 시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실 밥도 잘 사고 남이 싫어하는 것을 솔선수범하는 편인데도 말입니다.
사실, 남이 잘 되면 배 아픈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입니다.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지난해에는 이들에게 다소나마 위안(?)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건강하고 잘 나가던 내가 덜컥 암에 걸린 것입니다.
평소 건강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근 50년간 테니스로 건강을 다져왔었습니다.
댄스스포츠와 골프로 체력을 보강해 왔습니다.
이런 내게 편도에 조그만 멍울이 만져져 병원을 찾았는데 이것이 악성종양 즉, 암(편도암)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차분하게 죽음을 맞이하려고 주변 정리를 하나하나 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진정으로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내 가족밖에 없었습니다.
친구들이나 가까운 이웃은 비교본능에 의해 오히려 쾌재(?)를 부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예견되었지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내 가장 아픈 곳을 보여줌으로써 대리만족을 줬다고 생각하니 견딜만했습니다.
"그래 나보다 그렇게 잘 나가더니 암에 걸려 잘 됐다. 나는 너를 따라갈 수 없지만 암에 걸리지 않았으니 너보다 낫다. 암은 죽는다고 하니까 나보다 먼저 가겠네......"
대부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워낙 초기에 발견되어 잘 치료하고 추적검사를 받고 있습니다.
"재발 걱정은 하지도 말고, 잘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라"는 주치의 선생님의 말씀이 매번 이어집니다. 이전보다 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내가 내린 결론입니다.
이번에 암이 내게 찾아온 것은 하나님께서 내린 사랑의 채찍으로 믿습니다. 남은 세월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 라는 준엄한 메시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덤이요 특별 보너스로 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허투루 보낼 수 없습니다.
운동, 공부, 일, 취미생활, 봉사활동 등으로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남은 세월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저급한 삶이 아니라 내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고자 합니다.
내 얘기가 길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지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여운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그때를 시점으로 내 인생을 다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이 지구상에 80억 명이 넘는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인물이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고 지문이 같은 사람도 단 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한 배에서 동시에 태어난 일란성쌍둥이도 다르다니 신(神)의 창조 능력이 오묘합니다.
각자 다 다른 재능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남이 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할 수가 있습니다.
돈 많고 많이 배웠다고 다 행복한 것이 아니듯이 돈 없고 못 배웠다고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이 땅에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말 그대로 '천상천하유아독존'입니다.
한 생명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나이 들어보니 남이 잘 되는 것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나도 덩달아 좋아집니다.
골프가 좋은 예입니다.
삼십여 년 골프를 치다 보니 싱글, 이글, 홀인원까지 삼종세트를 다 갖추었습니다.
아직까지 골프채를 놓지 못하고 가끔 필드를 찾습니다.
그 옛날에는 가벼운 내기 골프를 자주 했습니다. 그때마다 상대를 이기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젠 아닙니다.
옛날에 못 치던 동료가 나보다 잘 치면 내가 더 기분이 좋습니다. 굿샷을 연발합니다.
다 나이가 먹었다는 증거이겠지요.
암을 경험한 이후부터는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웃이 다 친구처럼 보입니다.
이웃이 잘 되면 내가 더 좋습니다.
이것이 암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한 가지를 잃으면 반대급부로 한 가지를 얻는다고 합니다. 내가 그렇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픈 것이 아니라
힘차게 박수를 쳐주며 축하해 주고 싶습니다.
조심조심, 말조심
나이가 들어가니 여러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생깁니다.
건강, 말, 돈, 운전, 인간관계 등 열거하면 더 나올 것입니다.
이 가운데 말에 대한 얘기입니다.
말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지요.
나이 들어가는 요즘 들어 가장 조심스러운 것이 말입니다.
다양한 취미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모임에 나가다 보니 어디에서나 못마땅하게 구는 사람들로 인해 입이 근질근질하여 말실수를 하기 때문입니다.
못 본척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끝까지 참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놈의 입이 방정입니다.
말에 대해 이런 속담이 생각납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말을 조심하라. 특히 남에 대한 얘기는 함부로 내뱉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본인에게 부풀려져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쁜 얘기를 할 때, 문제가 됩니다.
늘 고운 말만 하면 세상살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한데 살다 보면 남의 얘기를 잘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죽이 맞는 사람과 만나면 나도 모르게 험담에 가담하게 됩니다.
그땐 후회해도 늦습니다.
희한하게 얘기를 나눈 상대방에 의해서 부풀려져 본인에게 전달됩니다.
참으로 무섭습니다.
그래서 나이 들면 가급적 사람 만나는 것을 멀리하게 되나 봅니다.
만나면 돈 쓰고 말실수도 하게 마련이니까 아예 혼자 지내려고 합니다.
노년의 지혜가운데 하나라지요.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
남은 세월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심조심, 말조심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작정입니다.
말의 바보가 되고 싶습니다.
진정으로.
치매, 누구나 예외일 수 없습니다
가끔 스마트 폰으로 혼자 배회하는 치매환자를 찾는 메시지가 뜹니다.
가까운 지인이 멀쩡하다가 치매환자로 돌변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치매,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이제 먼 얘기가 아닙니다. 나도, 우리 모두에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치매는 인지기능이 떨어져 모든 것을 잊게 되는 병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은 물론 본인 자신까지 잊어버리는 가장 슬픈 병입니다.
나이 들어 찾아오는 병 가운데 암보다 무섭다니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치매 통계입니다.
2023년 현재, 65세 이상 944만 명 가운데 치매환자가 97만 명으로 10명에 1명꼴입니다.
앞으로 평균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치매환자도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기사 팔구십을 넘어 백 살이 넘도록 치매도 없이 비교적 건강하게 활동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김형석 교수님(105세) 같은 분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예외 중에 예외입니다.
칠십 후반에서 팔십이 넘으면 서서히 치매증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치매를 치료하는 약이 없습니다.
언젠가 그 약을 발견하는 사람은 노벨상은 따 놓은 당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무서운 치매도 노력 여하에 따라 늦출 수 있고 예방까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귀가 솔깃해집니다.
미국의 신경학회에서 발표된 내용 가운데 실천 가능한 몇 가지를 살펴봅니다.
첫째, 외국어를 배워라.
이중 언어를 쓰는 사람이 한 가지 언어만 쓰는 사람에 비해 치매발생 위험이 낮았다고 합니다. 설사 발생하더라도 그 시기를 4~5 년 이상 늦출 수 있었다고 합니다.
둘째, 매일 15분 이상 중강도 운동을 하라.
운동은 건강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합니다.
뇌 무게는 1.5kg 밖에 안 되지만 심장에서 박출(搏出)되는 혈액의 25%가 뇌로 향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뇌에 혈액이 충분히 공급되어 혈액순환이 원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루 7시간 이상 잠을 자라.
잠이 보약이란 말이 있습니다.
뇌 세탁이론에 의하면 잠자는 동안 뇌가 그날 들어온 정보를 분석해서 요긴한 것은 기억창고에 저장하고 쓸데없는 것은 버린다는 것입니다.
숙면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외에도 매일 손 글씨 쓰기, 친구들과 어울리기, 고른 영양분을 섭취하기 등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나이 들어도 머리를 굴리는 공부를 하고 부지런히 운동을 해서 몸을 많이 움직이며 잘 먹고 잘 자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실천이 문제입니다.
친구들에게 간혹 이런 얘기를 들려주면 한마디 듣습니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저마다 죽음의 운명을 타고났으니 제명대로 살다가 가자고 합니다.
이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가는 날까지 치매에 걸리지 않고 천수를 다 하고 떠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원일 것입니다.
나 자신은 물론이요 가족이 나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는 병은 친구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모든 병이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만 치매만큼은 제일 늦게 아니 아예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알차게 하루하루를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오늘 또 합니다.
결혼을 회상하며
무더위가 좀 가시고 이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올 가을이 더 반갑습니다.
때마침 친지들이 청첩장을 카톡으로 보내옵니다.
결혼 날짜, 장소와 더불어 은행계좌가 꼭 들어가 있습니다.
요즘 같은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의 시대"에, 또한 심각한 인구절감 시대에 결혼을 결정한 젊은이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결혼은 참으로 신중해야 합니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긋나지 않고 결승점까지 골인할 수 있습니다.
결혼에 대한 여러 나라의 속담입니다.
러시아입니다.
"싸움터에 나갈 때에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에는 두 번, 결혼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하라"
중국입니다.
"결혼하는 것은 경험의 부족이요 이혼하는 것은 이해의 부족이며 재혼하는 것은 기억력의 부족이다"
아프리카입니다.
"결혼에는 고통이 있고 독신에는 행복이 없다."
우리 한국입니다.
"된장 신 것은 일 년 원수, 아내 못된 것은 백 년 원수"
그만큼 결혼 상대자를 고르는데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는 말입니다.
한 번 잘못된 결정으로 평생 후회를 하며 혼자 눈물을 흘릴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은 칠십 대 이후 세대는 아무리 잘못된 선택으로 결혼을 했더라도 이혼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천생원수'가 될지언정 서로 갈라서는 일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황혼이혼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장수시대가 되다 보니 퇴직 후 3~40 년을 같이 살아야 하는데 성격차이 등 여러 가지 사유로 갈라서는 노부부가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젊은이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은 신혼부부에서부터 아기를 낳은 부부까지 이혼을 너무 쉽게 합니다. 어느 이혼전문 변호사의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재빠르게"라는 구호가 생겨날 정도입니다.
이러다 보니 겉으로는 정상적인 부부이나 속으로는 곪아터진 부부가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부대학 강의 시 다음 질문을 해봤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남편과 또 한 번 웨딩마치를 울리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조용히 손을 들어주세요...."
100여 명의 주부대학생 가운데 손을 든 사람은 한두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중에 한 분은 사유가 걸작입니다.
"남자는 이놈 저놈 다 똑같습디다. 그래도 길들여진 놈이 낫지요...."
참으로 의미심장한(?) 답변입니다.
사실 남남이 만나 부부로 한평생을 살아내기가 쉽진 않습니다.
우선 만남 그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아니 기적입니다.
불교에서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부부의 연을 맺기 위해서는 전생에 7,000 겁(劫)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한 겁이 이 우주가 한 번 개벽한 때에서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이니 무한대와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만큼 질긴 인연이다"라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런데 십수 년 이상을 같이 살다 보니 여러 가지 사유로 마찰을 일으키고 급기야는 이혼에 이르는 부부가 생깁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최근에는 살만큼 다 산 노부부가 갈라서는 황혼이혼이 점차 늘어나는 실정입니다.
늘그막에라도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장에서 다짐했던 주례 선생님의 물음에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함께 하자고 굳게 다짐했건만 그 약속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살아보니 조그만 자존심이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내가 아플 때 진정으로 아파해주는 그 사랑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결국 인생은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어머님 뱃속에서부터 나와 죽을 때까지 결국 혼자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자꾸만 받으려고 하니 거기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내 결혼생활을 회상해 봅니다.
근 50년이 되어갑니다.
딸 아들을 낳고 부모의 역할을 그런대로 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년시절에 겪었던 가난을 딛고 결혼 후에도 쉬지 않고 일하며 공부하여 소기의 성과(각각 경영학박사와 신학석사학위)를 거두었습니다. 대학교수를 거쳤고 집사람은 목사안수를 받고 지금까지 목회 일선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칠십을 넘겼습니다.
남은 세월은 인생을 결산하는 시기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봉사하는 삶을 영위하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이 땅을 떠나고 싶습니다.
내가 실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두 살이나 연상인 집사람이 너른 마음으로 다 이해해 주었습니다.
참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남편의 자리를 지켜 성공적인 결혼생활이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처럼.
은혜와 원수
은혜(恩惠)는 고맙게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입니다.
칠십 평생을 살다 보니 그동안 여러분들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추석명절이 가까워오니 그분들이 한 분 한 분 떠오릅니다.
우리 속담에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겨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수는 빨리 잊어버리고 은혜는 두고두고 잊지 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반대로 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거꾸로 할 때가 다반사입니다.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은혜는 물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하며 마음의 병을 키웁니다.
부부싸움이 좋은 예입니다.
수십 년이 지난 잘못을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꺼내서 상처를 줍니다. 그것이 쌓이다 보면 황혼이혼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상사나 동료가 철천지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할 경우, 정신병원을 찾기도 합니다.
살인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가까운 사람들이 원수가 되어 큰 상처를 줍니다.
이럴 때일수록 물에 새겨서 더 큰 상처를 받지 말아야 하는데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나도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아직까지 돌에 새긴 원수(?)가 남아 있습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오싹하고 큰일을 벌일 것 같은 기분입니다.
하지만 이젠 많이 수그러들었습니다.
나만의 해결방법입니다.
나를 괴롭힌 그 원수들에게 내가 전생에 많은 빚을 졌다고 생각하면서 상대방 입장에서 서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추석이 내일모레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합니다.
이번 추석을 맞이하여 인생여정에서 만난, 아직도 못 버린 원수는 모두 물에 떠내려 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게 음으로 양으로 은혜를 주신 분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조그마한 정성이라도 베풀고 싶습니다.
영원히 내 가슴속의 돌에 새기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은퇴 후 자산관리의 시작~절약
"돈은 쓰기 나름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써야 할 때를 잘 구분하여 지혜롭게 지출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은퇴 후에는 제 분수에 맞추어서 살아야 합니다.
자기가 지출할 수 있는 범위 이내에서 절약하며 조절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과거 씀씀이를 줄여 나가기가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꼭 필요한 곳은 지출해야 할 것입니다.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는 말도 있듯이 너무 구두쇠같이 굴면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할 것입니다.
100세 시대입니다.
장수시대입니다.
장수시대에는 돈과 건강이 필요합니다.
"은퇴(retirement)가 곧 행복이다."
유럽, 미국 등 선진국의 얘기입니다.
충분한 연금이 나오고 노후보장이 잘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노인 빈곤율이 높고 덩달아 노인자살률도 높습니다.
다 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은퇴자금이 충분하여 돈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부분 자금이 모자라 외출까지 삼가는 노인들이 많다고 합니다.
절약, 참 어렵습니다.
특히, 얼마 되지 않는 은퇴자금을 쪼개서 쓰려고 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그래도 절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은퇴자가 파산에 몰리면 헤쳐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경제적 상황에 자기 자신을 맞추어 넣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다리가 짧아 종종종 걷는 뱁새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황새를 따라갈 수 없듯이 제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노년의 길이라 믿습니다.
나만의 고속도로 주행 노하우
꽉 막힌 수도권을 지나 고향 김천까지 가려면 네댓 시간은 족히 걸립니다.
젊었을 때에는 몰랐는데 칠십 고개를 넘으니 장거리 운전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고향에 도착하면 차가 필요하여 할 수 없이 운전대를 잡습니다.
자주 왕래하다 보니 나름대로 노하우가 생겼습니다.
먼저, 무엇보다 조급하게 과속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90~110 km 정도로 해서 규정 속도를 준수하려 합니다.
난폭하게 내 앞을 끼어드는 경우에도 너그럽게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둘째는 중간중간에 있는 휴게소를 찾아 쉬어 갑니다. 물이나 커피, 호두과자를 사고 점심시간에는 맛있는 자장면 등을 사서 먹습니다.
혼자서 맛집을 찾아 먹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처음에는 혼자서 먹는 것이 좀 쑥스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요즘은 혼자서 맛있게 먹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자꾸만 버릇을 들이니 편해졌습니다.
셋째는 차 안에서 흥겨운 음악을 듣고 갑니다.
최근에는 장철웅의 '라이브 카페' CD를 틀어놓고 운전을 하는데 너무 좋습니다. 혼자서 어깨춤이 절로 나옵니다. 덕분에 운전이 지겹지 않습니다.
때로는 흥겨운 우리 민요를 구성지게 소리 내어 부릅니다. 혼자서도 신이 납니다.
역시 우리 민요가 좋습니다.
넷째, 휴게소에서 잠시 눈을 붙입니다.
짧은 수면이 피로를 풀어주고 운전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깁니다.
이외에도 가급적 차 안에서 먹을 간식거리는 미리 준비합니다.
오늘 차 안에 넣어둔 품목입니다.
포도, 사과, 호두과자, 옥수수수염차, 감, 고구마 등입니다.
대부분 고향 밭에서 직접 생산한 것인데 휴게소에서 먹으면 맛있습니다. 비용도 줍니다.
무엇보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나만의 여유를 가지고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할 만 하지만 그래도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반 귀촌, 반 귀농의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 당분간 운전대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기왕이면 더 안전하게, 더 즐겁게, 더 행복하게 차를 굴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평택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토요일 오후라 올라가는 길이 많이 막힙니다.
이제 한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천천히 음악을 듣다 보면 집에 도착하겠지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성경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고 합니다.
예수는 남에게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나 위선으로 자선을 베푸는 것을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사에 실천하기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아니 불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칠십 년 제 삶의 궤적을 뒤돌아보니 나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로서 제게는 많은 회원을 두고 있는 동호인 모임이 있습니다. 공동의 일이 생기면
대부분 생색을 내지 않고 묵묵히 회원의 본분을 다 합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생색을 내려고 하는 덜된 인간들이 있습니다. 사사건건 얄밉게 구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이 지내면서도 속이 훤히 보입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이 있다면 애써 바꾸려 노력하지 말고 본인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참고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으로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훈훈한 얘기가 많이 들려옵니다.
연말에 자기를 밝히지 않고 매년 거액의 돈을 관공서 앞에 놓고 가는 손길이 있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선행이나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무리 구정물이 많이 흘러내려도 이러한 선행의 맑은 물이 더 많이 흘러내리면서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이 들어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일을 하던지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산행을 하다가 휴지나 쓰레기가 있으면 줍습니다. 테니스장이나 살고 있는 아파트 주위에 치워야 할 것이 있다면 머뭇거리지 않고 치웁니다.
일본 도쿄에서 지낼 때의 얘기입니다. 동경학예대학의 변두리를 매일 아침 걸으면서 거리에 버려진 각종 쓰레기를 수거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개의치 않고 묵묵히 내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람직한 길이며 하늘의 상급이 클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느닷없이 닥치는 죽음
세상에 자연스러운 것이 나고 자라고 죽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람을 제외한 동식물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유독 사람만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예 죽음 얘기를 터부시 합니다.
공동묘지가 주택단지 가운데에 있는 일본이나 서구 여러 나라와 달리 아예 집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산 중턱에 있는 묘지도 많아 한 번 성묘하기가 힘듭니다.
추석을 앞두고 벌초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큰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왜 죽음을 이토록 두려워하고 멀리 할까요?
죽음은 예고 없이 다가오고 고통이 연상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죽을 사(死)는 “한 날 저녁에 비수같이 찾아온다.”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느닷없이 닥칩니다.
그래서 늘 죽음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갑작스럽게 이 땅을 떠날 경우 자식들이나 가까운 친척들이 당황하기 마련입니다.
요즘 웰빙만큼 웰다잉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웰다잉의 하나로 '데스 클리닝(death cleaning)' 이른바 '죽음 청소' 운동이 생활 속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죽은 뒤 가족들이 자신의 물건을 정리하지 않도록 죽음에 대비해서 미리 물건을 정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추억이 담긴 물건을 보며 지난 삶을 돌아보고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거나 기부하며 남은 삶의 방향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 옛날 우리 할머니는 윗목에 삼베옷과 필요한 장례용품까지 함에 넣어두었습니다. 평소 철저히 죽음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나도 지난해 편도에 조그만 암이 발견되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잘 치료하였지만 이를 계기로 죽음이 한 발 내 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변 정리(옷, 책, 상패, 은행 통장 등)를 하나하나 했습니다. 심지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도 작성하여 등록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후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한편, 죽음을 대비하는 자세도 가지가지입니다.
대개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죽으면 평안이 오고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기고 힘든 경우, 자살도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죽음을 긍정적으로 맞이합니다.
불교에서는 윤회설을 믿어 이 땅에서 보시를 많이 하면 다음 생은 좋게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영생을 믿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하다고 믿습니다.
내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인간은 태어나면 누구나 죽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평합니다.
죽음도 나이에 상관없이 느닷없이 닥칩니다.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었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생전 장례식'도 선택의 하나라고 봅니다.
말기 암 등 죽음이 확실하게 다가왔다면.
그 어떤 방식이든지 멋지게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이 땅을 떠나고 싶습니다.
특별히 나는 부활과 영생을 믿는 기독 신자로서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려 합니다.
노년의 아름다운 마무리
칠순 고지에 올랐습니다.
남아있는 세월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죽는 날까지 삶의 의미를 제대로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고령화가 일찍 시작한 일본에서 퇴직한 비즈니스맨의 행복도를 조사한 결과입니다.
가장 행복도가 높은 순서입니다.
첫째, 스스로 회사를 창업하여 성공한 사람
둘째, 다른 회사에 재취직한 사람
셋째, 일에 완전히 손을 뗀 사람
역시 은퇴 이후에도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퇴직준비를 했을 경우, 봉사활동과 취미생활을 하면서 여유 있게 보내는 것도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하루하루 보람 있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야 그 인생이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요.
무미건조하게 세월만 축을 낸다면 사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은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10인 10색이라 단정적으로 정의를 내릴 수 없습니다.
"꽃은 피어야 아름답고 바람은 불어야 시원하며 인생은 즐겨야 행복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건강, 재산, 명예를 다 얻었다 해도 잘 놀면서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퇴직 후 새로운 목표를 세우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무미건조하게 보내며 세월만 축을 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은퇴자들이 다시 돈을 버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창업은 더 어렵습니다.
결국은 그동안 벌어놓은 것을 쓰면서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다양한 취미생활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 가장 멋진 인생의 마무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도 그런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취미생활을 통해 얻은 노하우를 강의 현장에서 잘 써먹고 있습니다.
취미생활도 하고 강연을 하면서 약간의 부수입도 있으니 일거양득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롭고 힘겹게 살아가는 베이비부머를 비롯한 노인들에게, 그리고 다가오는 세대들에게 멋진 노후를 보내는 노하우를 전수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내 남은 인생길에서 파종해야 할 씨앗이라 생각합니다.
더불어서 그저 받았던 내 모든 것들을 죽기 전에 다 나눠주려고 합니다.
비록 얼마 되지 않지만.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싶습니다.
☞ 가슴 아파하지 말고 나누며 살다 가자
김수환
버리고 비우면
또 채워지는 것이 있으리니
나누며 살다 가자
누구를 미워도
누구를 원망도 하지 말자
많이 가진다고 행복한 것도
적게 가졌다고 불행한 것도
아닌 세상살이
재물 부자이면
걱정이 한 짐이요
마음 부자이면
행복이 한 짐인 것을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은
마음 닦은 것과 복 지은 것뿐 이라오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갈 날도 많지 않은데
누군가에게 감사하며
살아갈 날도 많지 않은데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가슴 아파하며 살지 말자
버리고 비우면
또 채워지는 것이 있으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다 가자
웃는 연습을 많이 하자
웃음은 만병의 예방약이요 치료약이라
노인을 즐겁게 하고 동자로 만든 다오
화를 내지 마시라
화내는 사람이 언제나 손해를 본 다오
화내는 자는 자기를 죽이고 남을 죽이며
아무도 가깝게 오지 않아서
늘 외롭고 쓸쓸하다오
사랑하시라
소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오
진정한 사랑은 이해요
관용 포용 동화 아니겠는가
첫댓글 '노년의 지혜' 후편입니다.
멋진 노후를 위해 지켜야 할 규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정리하는 이 시기를 잘 건널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얘기를 조곤조곤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