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0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아버지의 마음, 자녀들의 마음 》
말 4:6
〈 최근에야 깨닫는 진실 〉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녀이고 또한 부모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자녀로 살아갑니다.
결혼하여 자녀를 두면서 부모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자녀일 때는 ‘부모의 마음’을 모르고, 부모일 때는 ‘자녀의 마음’을 모릅니다.
자식일 때는 자식으로서 ‘자기의 마음’만을 주장합니다.
부모일 때는 부모로서 ‘자기의 마음’만을 주장합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언제나 ‘자기 마음’뿐입니다.
그런데, 모든 자녀, 모든 부모가 알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자녀로서 부모 마음을 다 안다고 착각합니다.
부모로서 자녀 마음을 모두 안다고 착각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안다고 하면서 사실은 알지 못하고 한평생 삽니다.
☞ 모든 것을 아는 척하지만, 정작,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 저도 목사이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단한 착각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제가 착각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13년 전, 아들을 앞세우고서야 ‘저희 아버지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참 끔찍한 일입니다. 감히 설교로서 하기에도 어려운 일입니다.
☞ 제가 최근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
이 진실을 누가 알아야 할까요?
자식 된 입장에 있는 자들이 알아야 한다고 우리는 흔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틀렸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는 진실은 부모가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많은 부모들은 이를 못 깨닫고 평생을 탄식합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현명한 부모라면, 이 생각, 이 한탄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 깨달은 부모와 깨닫지 못한 부모와의 차이 〉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는 진실을 깨달은 부모가 있습니다.
평생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는 진실을 못 깨닫고 사는 부모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못 깨달은 부모는 늘 원망하고 탄식합니다.
“부모 마음을 왜 이리도 몰라주냐 이눔아!” 한숨 속에 삽니다.
깨달은 부모는 담담합니다. 그래, “자식은 부모를 모르지!”
자식이 부모를 모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부모로서 할 일을 담담히 해 냅니다.
누가 불행하고 누가 행복합니까?
못 깨닫고 끝까지 자식에게 바라는 부모는 불행합니다.
깨닫고 자식에게 바라지 않으면서 베푸는 부모는 행복합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시는 부모님들, 어느 편입니까?
세상 대부분 부모는 못 깨닫고 한숨과 탄식 속에서 생애를 마칩니다.
아니면 선을 긋고, 남이려니 하고 체념으로 살아갑니다.
어떻게 선을 긋습니까?
‘대학까지 마쳤으니 이제 내 할 일은 다 끝났다’
‘결혼까지 돌봤으니 이제 내 할 일은 다 끝났다’
‘나도 이제는 내 인생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알아라!’
이렇게 정리하고 남남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아갑니다.
〈 ‘나’는 ‘너’의 마음을 모른다 〉
사실 아버지와 자식간에만 이런 것은 아닙니다.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알까요?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알까요?
똑같습니다. 서로 모릅니다. 아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 뿐입니다.
‘자기 마음’이라 했습니다. ‘자기 마음’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자기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이기심입니다. 이기주의입니다.
☞ 사실 모든 사람들이 ‘나’만 알고 ‘너’를 알지 못하고 평생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이는 틀렸습니다.
당신이 나를 모르니, 나도 당신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당신을 모르니, 당신도 나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대가 먼저 나를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나도 상대를 알게 된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틀렸습니다.
진실은 내가 너를 모르니, 너도 나를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이렇습니다.
사람이 이렇습니다.
내가 이렇습니다.
나란 사람이 이렇습니다.
모든 문제는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든 문제가 ‘나’아닌 ‘너’로부터 비롯한다고 강하게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여기에서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 마음을 알지 못한다!”
“제자는 스승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백성은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교인은 담임목사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 아랫 사람의 위치에 있는 자는 결코 윗 자리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제가 청각장애 자녀를 키우면서 늦게야 뼈저리게 깨달은 진실이 있습니다.
“건청인이 농인을 이해해야지, 농인이 건청인을 이해하기를 바라지 말라!”
농아교회 목사님이 저에게 해 주신 말씀입니다.
농아교회 목사님 말씀이 진실이고 진리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순간순간 딸이 아버지인 나를 이해하기를 바라면서 삽니다.
〈 생활의 지혜 〉
부모는 ‘자녀가 부모 마음 알지 못한다’라는 진실을 알고 양육해야 합니다.
스승은 ‘제자가 스승 마음 알지 못한다’라는 진실을 알고 공부시켜야 합니다.
왕은 ‘백성이 왕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라는 진실을 알고 통치해야 합니다.
목사는 ‘교인들이 목사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라는 진실을 알고 목회해야 합니다.
여기서 몇 가지가 더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남편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아내는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이걸 알고 가정생활을 하면 그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 베트남 달랏 여행에서의 깨달음 〉
지난 주에 전북지방회 목사님 내외 30여 분이 베트남 달랏에 여행하고 왔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 부부가 매우 독특한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아내 손을 꼭 잡고 여행을 했습니다.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다른 목사님 사모님들이 놀리기도 했습니다. “목사님,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제가 왜 이렇게 했는지, 여행 마지막날 밤에 실토했습니다.
저의 건강이 부실합니다. 제가 자칫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감당이 안 됩니다.
그러니 이번 여행에서 아내에게 의지하자! 그래서 제가 의도적으로 아내 손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잘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다녀보니, 그런대로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아내 손을 잡고 롯데 시네마에 영화보러 걸어갔다 걸어왔습니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개의치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아내와 내가 길을 걷는 모습은 이와 사뭇 달랐습니다.
제가 대여섯 걸음 앞서 가고, 아내는 뒤에서 따라왔습니다.
간혹 제가 아내를 불러서 함께 가자고 했지만, 사이가 벌어지는 것은 늘 똑같았습니다.
그랬는데, 제가 아내 손을 잡거나, 아내 어깨에 손을 얹고 다니니까 그런 일이 없어졌습니다.
앞으로도 항상 이렇게 다니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아내는 제 손을 잡을 줄 모릅니다.’ 그러면 ‘남편인 제가 잡으면 됩니다.’
☞ 오늘 본문 말라기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은
☞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권면하는 듯합니다.
〈 아버지 하나님의 무한책임 〉
(6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자식은 부모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제자는 스승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백성은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교인은 담임목사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니, 하나님은 ‘그러려니’하고 포기하실까요?
사람들은 포기하고 살아갈 수도 있지만, 하나님까지 포기하시면 어찌 됩니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요,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알기 바라고, 부모가 자식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제자가 스승의 마음을 알기 바라고, 스승은 제자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성도가 목사의 마음을 알기 바라고, 목사가 성도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요,
사람이 하나님 마음을 알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신다는 것,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식이 아비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인간이 행복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사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마음을 돌이키라 〉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여기서 “그가~”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 땅에 보내십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요? 말라기 4장 6절 말씀입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마음을 알게 하고, 자녀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시려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것은, 기실, “내가 내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켰다.”
바로 이 뜻이 됩니다.
또한 부모된 사람들이라면, 부모로서 “내가 내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켰다.”
바로 이겁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마음을 돌이키고
자녀는 부모에게 마음을 돌이키라~
스승은 제자에게 마음을 돌이키고
제자는 스승에게 마음을 돌이키라~
목사는 성도에게 마음을 돌이키고
성도는 목사에게 마음을 돌이키라~
건강한 사람은 불편한 사람에게 마음을 돌이키고
불편한 사람은 건강한 사람에게 마음을 돌이키라~
남편은 아내에게 마음을 돌이키고
아내는 남편에게 마음을 돌이키라~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마음이 떠난 적이 없습니다.
400년 침묵하신다고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떠난 것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켜야 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