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선 시인의 시집 『어때요 이런 고요』
약력
조경선
201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시집으로 『목력』, 『개가 물어뜯은 시집』이 있다.
<김만중문학상>신인상, <정음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josun4268@hanmail.net
시인의 말
멀리 있는
새의 이름 꺼내면
떠나간 사람 날아왔다
조경선
어때요 이런 고요
외딴집에 홀로 앉아
아궁이에 불을 넣는다
낯익은 발자국보다 먼 소리가 먼저 들려
일몰은 남아 있는데
고요만 타들어 간다
어제 떠난 발자국
퉁퉁 불어 커질 때
저녁을 훔쳐보는 유일한 산 고양이
눈빛은 노을을 따라
조금씩 움직인다
쓸쓸한 곳 들춰 보면
불씨들 살아날까
녹이는 곱은 손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눈사람처럼
어때요 이런 고요
앵무새 귀가
앵무새 나라에서 이 한 몸은 자격 미달
따라 하는 오늘과 할 말 하는 내일은
입 모양 틀에 박힌 채 제자리를 지킨다
쓰다듬을 반복하는 물기 없는 목소리
오직만을 쪼아대는 내가 배운 어른처럼
말대답 윤기가 흘러 먹이로 올려놓는다
앵무새 나라에서 돈을 물고 돌아와
꺼진 배를 움켜쥐면 좋아하는 목소리
방 안을 날아다닌다 떠다니는 말을 물고
뚜껑의 반란
비틀리고 물어뜯겨 일회용이 되었다
누구를 연다는 건 안과 밖의 소통인데
저마다 이를 악물고 단맛을 찾는다
매 순간 밖을 닫아 눈물이 많은 나는
안간힘을 다해도 대개는 풀리고 말아
하루를 어루만져도 버려짐만 가득했다
어떤 허락도 없이 낯선 손이 닿을 때
열리기 위해서라면 온몸을 조이고 푼다
뜻밖의 승부를 걸다가 거품 물고 폭발한다
종이칼
한 줄의 문장이 비수 되어 돌아왔는가
책을 정리하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그동안 펼치지 않아 아직도 시퍼렇다
날들은 더 차갑게 층층이 쌓여가고
유일한 해결책은 또다시 상처 나는 것
활자는 조용했으나 나를 덮칠 것 같았다
손가락에 묻은 실금 예리하게 퍼져도
아릿하게 참아내느라 순해지는 봄처럼
종이칼 나에게 와서 온몸이 공손해졌다
현재라는 공감
13월을 1월이라 생각해 본 적 있다
한해의 꼬리가 길게 남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 다 시들은 꽃처럼 수많은 공감이 말라
있을 때 자주 들 여다본 거울은 나였다 뒤로 미
룬 흔적들이 곳곳에 머물 러 겁먹은 1월은 무섭
고 설레고, 용서받지 못한 계절은 13월을 만들어
그 어떤 면죄부에 내 얼굴은 감출 수 없 다 새로
운 풍경은 늘 아름다웠지만 소원들과 자랑들로
가득 찼다 자해일 줄 알면서 고개 숙인 현재의 나
는 독 주를 마셨고 다시 쓰는 하루는 늘어만 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는 길은 더 시려 눈 위에 눈
이 쌓이는 지난밤을 뒤적였다 반복되는 칼바람에
허름한 지붕을 걱정하 면 걱정이 쌓일수록 거짓말
도 쌓여갔다 어제는 오늘 같은데 바뀌지 않는 오늘
새로운 나는 무거워 13월이 길어졌다
해설
마음의 고요함으로 가는 길
김주원(문학평론가)
장자의 달생(生)」편에는 악기를 거는 틀인 거(鑛)를 만드는 목수 이야기가 나온다. 귀신의 솜씨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기량에 사람들은 감탄했다. 노나라 군주가 그에게 비법을 묻자 그는 특별한 기술은 없다고 대답한다. 그는 자신에게 비결이 있다면 나무를 깎아 거()를 만들 때는 기(氣)를 소모시키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며칠에 걸쳐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
면 작품에 기대하는 보상과 칭찬, 비난과 같은 평가에 연연하지 않게 되고 외부적 요인이 완전히 없어져 전념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그런 후에야 그는 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나무의 본래 성질을 살펴 가장 좋은 나무를 찾아낸다. 그는 나무에게서 완성된 거(鐻)를 본 후에야 작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목수는 자신의 작업을 하늘과 하늘이 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나무 한 그루를 만나기 위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비우고 오롯이 집중한다. 목수의 솜씨는 기술이나 지식이 아니라 마음의 고요에서 나온다. 귀신의 솜씨 같다는 그의 예술은 나무와 하나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완전히 비운 고요 속에서 태어난다. 이 이야기에는 예술에 관한 흥미로운 암시가 있다. 예술은 흔히 예술가 개인의 의도와 기량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내려놓은 자리, 다시 말해 개인의 의식을 초월한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완성된다. 목수가 하는 일은 그저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뿐이다. 최상의 나무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마음을 비우는 목수처럼 예술가는 마음을 어지럽히는 욕망과 기대, 두려움 같은 것들이 사라져야 비로소 자신의 작품을 알아볼 수 있다. 예술가는 자신의 의지대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고요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예술과 만난다.
조경선의 시집에는 고요한 순간들이 있다. '어때요 이런 고요'라고 묻고 있는 듯한 시집 제목 때문만은 아니다. 진정 고요한 순간들은 '고요'라는 말 없이도 마음의 고요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