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흥미로운 책이다. 지금 준비 중인 <김교신평전>과 직접 관련된 내용이라 관심 깊게 읽었다. 일제 말기 사회분위기에 대한 매우 색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비교사를 거쳐야 역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교훈은 덤. (한 나라의 역사만 아는 연구자는 한 나라마저 이해할 수 없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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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학자 김민수(1926-2018)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일본제국의 식민지 정책이 애초부터 완전동화를 계획한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조선 민족을 그냥 육체만 남기고 완전히 소멸시키자’라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그는 50년 6개월 동안(1895년 4월 7일부터 1945년 10월 25일까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타이완과 비교하면서 조선의 식민지 기간이 35년이라는 게 정말 다행한 일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김민수는 일제 말기 타이완 주민의 일본어 해득률이 85%에 달했으며 이는 대단한 거라고 말한다. 나머지 15%는 오지에 사는 노동자나 농민이니, 일반인들은 대부분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개인적인 경험을 들려준다. 1964년에 하버드 대학에 초청받아서 갔는데, 그때 마침 초청받은 타이완 학자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 타이완 학자가 아내에게 편지를 쓸 때 일본어를 사용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물어봤더니 집에서도 부부 사이에 일본어를 쓴다고 했다.
타이완은 조선보다 15년 먼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지 시기에 타이완의 일본어 해득자는 1932년(식민 지배 37년)에 22%, 1937년에 37%(식민 지배 42년)로 꾸준히 증가하다가 1943년(식민 지배 48년)에는 62%로 갑자기 치솟았다. 한편 조선의 일본어 해득률은 1932년(식민 지배 22년)에 7%, 1937년(식민 지배 27년)에 11%로 늘어나다가, 1943년(식민 지배 33년)에는 22%로 두 배가량 껑충 뛰었다. 완만하게 증가하던 일본어 해득자가 식민지 말기로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늘어났다. 35년 아닌 50년 식민 지배를 당했다면 한국도 타이완과 같은 처지로 전락했을 것이다.
김민수는 해방이 20년만 늦었어도 조선의 일본어 해득률이 90%에 육박했으리라고 전망한다. 그러면 광복이 돼도 국어의 회복은 어려웠으리라고 판단한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어가 일상 언어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지식인이나 상류층부터 먼저 일본어로 생활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모두가 일본어로 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학병제가 시행되던 1943년 서울에서 김민수가 겪었던 일이다. 그때 전차가 서울 시내 주요 교통수단이었는데, ‘전차를 타고 학생들이 몰려있는 데서 들어보면 학생들의 대화는 전부 일본말’이었다. 김민수는 1943년 4월에 서울 아현동의 경기공립공업학교(해방 후 경기공고) 야간부에 입학했으니, 그가 말한 ‘학생들’이란 지금으로 치면 중고교생들이었다. 이런 상태가 광복 이후에도 여전했다고 한다. 김민수는 광복 후인데도 학생들이 몰려있는 데서 들리는 이야기는 전부 일본말이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1946년 3월 20일 자에도 “아직도 이곳저곳에서 왜말이 툭툭 튀어나오니 딱한 노릇”이라는 기사가 실렸고, 《조선일보》 1947년 1월 23일 자 기사에도 “거리에는 아직도 왜말로 쓴 간판이 걸리고”, “왜말과 왜글을 쓰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심지어 학교에서 왜글로 박은 숙제를 내기까지 하는 형편”이라는 내용이 실릴 정도였다.
그는 한 가지 고백한다. 그는 9살(1935년) 되던 해 소학교에 들어가 일본말로 교육받고 글짓기도 늘 일본말로 했다. 광복 후 성인이 되어 국어학자로 활동하면서도 어떤 때는 일본말로 사고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글을 쓸 때마다 머릿속에서 일본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려고 어휘를 찾는다는 것이다. 일본어로는 문장이 떠올랐는데 우리말 어휘를 찾지 못해서 일한사전(日韓辭典)을 찾을 때도 있다. 어린 나이에 배운 언어가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일제가 원한 것도 바로 이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