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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21) 하느님 백성의 사제직 수행, 「교회헌장」 제11항
「교회헌장」 제11항은 “사제 공동체”로서의 하느님 백성이 “성사와 덕행”을 통해서 사명을 수행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11항 전체의 주제와도 같은 것으로 하느님 백성의 삶을 성사인 교회 안에 머물게 합니다. 따라서 ‘각 성사 안에서’ 하느님 백성은 성사의 배령자가 되고, 그것으로부터 얻어지는 자격과 사명의 차원에서 하느님 백성의 사제직이 소개됩니다. 하지만 하느님 백성은 ‘세상 안에서도’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선포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사제직을 수행할 사명을 지니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 백성은 교회의 구성원이 되고, 그리스도교 예배를 드리는 자격으로서의 인호를 받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하느님 백성은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사제직은 가시적인 행위로 나타납니다.
견진성사를 통해서 하느님 백성은 교회와 더욱 완전히 결합하고,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서 신앙을 전파하고 수호해야 하는 사명을 지닙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 백성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참여”하고, “신적 희생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며, 자기 자신을 그 제물과 함께 봉헌”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전례 안에서 각자가 맡은 역할을 하고, 영성체를 통해서 일치를 이룹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은총을 저버린 것에 대해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를 받음으로써 하느님과 화해합니다. 또한 자신의 죄로 상처를 입힌 교회 공동체와도 화해합니다. 공동체는 사랑과 모범과 기도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노력합니다. 다만 고해성사에서는 하느님 백성의 사제직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병자성사에서 병자들에게 하는 도유와 사제들의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 백성 전체는 수난하고 영광 받으신 주님께 병자들을 맡겨드리며 치유를 청합니다. 또한 병자들은 자신의 병고를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결합하여 하느님 백성의 선익에 기여합니다.
성품성사를 받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으로 교회를 사목하도록 세워집니다. 하느님 백성은 사제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과 은총 그리고 은총을 중재하는 직무가 필요합니다. 그 직무자의 인도로 그리스도와 일치한다는 것을 하느님 백성은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세상에 대한 자신의 사제직도 완수할 수 있습니다.
혼인성사의 은총은 부부가 부부 생활, 자녀 출산, 자녀교육을 통해서 서로 도우며 성덕에 이르도록 합니다. 혼인으로 가정이 생겨나고, 가정에서 인간 사회의 시민이 태어나며,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 백성을 이룹니다. 최초의 복음 선포자인 부모는 가정 교회 안에서 자녀들의 고유한 소명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교회의 언어] 라훔, 자비로운
하느님께서는 금송아지 사건으로 깨져 버린 계약을 이스라엘 백성과 다시 맺으시면서 모세에게 ‘야훼’라는 이름과 함께 당신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라고 선포하십니다.(탈출 34,5-7 참조) 히브리인들은 ‘자비’가 ‘모태’(레헴) 안에 혹은 ‘내장’(라하밈 : 1열왕 3,26) 안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모태 안에 아기를 품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이며, 위험에 빠진 이의 고통을 자신의 내장이 끊어지는 고통처럼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하느님께서는 우상 숭배의 죄를 지은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 자비로움은 예수님의 공생활에서도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마태 14,14; 마르 1,41; 6,34 루카 7,13 등) 그들을 위로하고 기적을 일으켜 치유해 주시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고 말씀하십니다. 자비는 마음에만 머물지 않고,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하셨듯이 우리도 삶 안에서 자비를 실천하면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사회교리] 노동
노조’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머리에 띠를 두르고 주먹 팔을 휘젓는 모습, ‘강성노조’, 다소 과격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참 희한한 일이다. 이 나라의 약 2800만명, 인구의 절반이 노동자요, 절대 다수가 그 가족인데 사회적인 통념은 노동자들에 대하여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1891년, 레오 13세 교황은 회칙 ‘새로운 사태’를 발표하였다. 최초의 사회교리 회칙인 이 회칙은 교회 밖에서는 ‘노동헌장’이라고 불리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그로 인한 반대 급부로 ‘공산주의’가 생겨나던 때, 교회는 자본가의 횡포로부터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이 회칙을 반포하게 된다. 자본은 더욱 집중되고 노동자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갔다. 하루 16시간 극심한 노동, 어린이와 여성마저 이러한 열악한 노동에 동원되고, 마치 인간이 노예처럼 그리고 공장의 기계처럼 전락하던 때에 교회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폐해를 동시에 지적하며,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도록 천명하고 나선 것이다. 이로써 각국에 노동법이 제정되었다.
교회는 노동이 신성하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노동으로 하느님 창조사업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노동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더 쓸모 있게, 더 아름답게, 더 가치롭게 한다. 그리고 노동은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안에 인격이 스며 있다. 인간은 노동으로 하느님 창조에 동참하고, 자기를 실현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해결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주체들은 노동 문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선 기업과 고용주는, 노동자들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예가 아니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기계가 아니라, ‘인격’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의 정당한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 경영의 효율과 사업성 그리고 이윤의 극대화만을 찾지 말고 윤리와 인간성을 생각하는 지속가능한 경영이 필요하다.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경영은 오히려 기업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영업을 이어가기에 어려움을 줄 수도 있다. 정부는 기업과 노동자의 문제를 방관하지 말고 조정해 주어야 한다. 양측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하고 서로 양해할 수 있는 바를 협의하여 원만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말고 동료들과 단합하고 연대하여 공동의 문제들을 풀고자 노력해야 한다. 일반 대중의 관심도 중요하다. 우리 사회 심각한 노동 인권 침해에 대하여 늘 관심을 가져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노동현실은 어떠한가? 직장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는 사람이 한 해 약 600명. 하루 평균 두 사람이 직장에서 일하다가 죽어가고 있다. 찌는 듯한 이 더위에도 고공농성, 단식농성에 나선 노동자들이 있다. 오늘날의 노동 현실이 개탄스럽다. 사람이 일을 하고, 사람이 돈을 번다. 살자고 일하는 사람에게 죽음이 웬말인가? ‘함께 사는 세상’을 일구어 가야 한다. 돈벌이보다 ‘사람’이 우선인 세상, 돈벌이보다 ‘생명’이 우선인 나라,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저는 믿나이다] (35) 교부는 누구인가
사도들의 정통 신앙 계승한 교회의 아버지, 교부
그리스도교 신앙은 성령 강림 후 성령으로 가득 찬 사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선포한 기쁜 소식에서 시작됩니다.
교회가 전하는 ‘사도들의 신앙’은 “성령께서 영감을 주신 성경 안에서, 교부들의 증언이 언제나 살아 있는 전통 안에서, 성령께서 도우시는 교회의 교도권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게 하시는 성사의 전례 안에서 말씀과 상징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성령께서 전구해 주시는 기도 안에서, 교회를 이루는 은사와 직무 안에서, 사도적 삶과 선교적 삶의 표징들 안에서, 성령께서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구원 사업을 계속하시는 성인들의 증거 안에서”(「가톨릭교회 교리서」 688) 계승되고 지켜지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은 로마 제국의 경계를 넘어 땅 끝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뿐 아니라 많은 민족이 복음을 받아들여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이에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이며 고대 교회 저술가인 교부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다교 지역과 문화를 뛰어넘어 전 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당대 유행하던 헬레니즘 철학 사고 체계를 도입합니다. 이 과정에서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복음 내용(케리그마, Kerygma)이 ‘믿을 교의’(도그마, Dogma)로 발전하게 됩니다.
교부(敎父, Patres Ecclesiae, Father of the Church)는 문자 그대로 ‘교회의 아버지’를 뜻합니다. 좀더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교회의 영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요. 일반적으로 교회의 영적 아버지는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교부는 주교가 아니더라도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을 해설하고 정통 교리를 수호함으로써 교회 성장과 발전에 이바지한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스승으로 성경의 언어와 문화로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생생하게 느끼며 살았던 신앙의 오랜 증인들입니다. 이들은 모진 박해와 세상 거짓에 맞서 기꺼이 자신을 불사르며 복음의 진리와 거룩한 삶의 가치를 지켜낸 성인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백성을 섬기고 돌보는 일을 천직으로 여겼던 목자들입니다.(한국교부학연구회 「그리스도교 신앙 원천」 머리말 참조)
고대 저술가들 가운데 ‘교부’로 인정받고 불리기 위해선 다음 네 가지 기준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첫째, ‘고대성’을 지녀야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일반적으로 첫 교부를 제4대 교황 클레멘스 1세(재위 88~97년)로, 마지막 교부를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650?~749?)으로 봅니다. 따라서 1세기 말 사도 시대 이후부터 7~8세기까지를 ‘교부 시대’라 합니다. 적어도 이 시기 안에 활동해야 교부의 자격이 됩니다.
둘째, ‘정통 교리’입니다. 그 가르침이 정통 교리에 부합해야만 합니다. 셋째, ‘생활과의 조화’입니다. 그 가르침이 실제 생활과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신앙과 생활이, 가르침과 삶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이단에 빠지거나 윤리적으로 고결하지 못한 삶으로 추문을 일으킨 자는 교부라 불릴 수 없습니다.
넷째, ‘교회의 승인’입니다. 교회가 그를 교부로 선포하거나 그의 저서가 교회 문헌에 직접 인용돼야 합니다.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는 성 암브로시오(339~397)와 성 아우구스티노(354~430),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 예로니모(347~419), 그레고리오 대교황(540?~604)입니다. 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는 성 대 바실리오(329~379)와 성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329?~390?),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4/354?~407), 성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295?~373)입니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는 사도좌를 바치고 있는 네 교부의 청동상이 있습니다. 앞쪽은 서방 교회 교부를 대표하는 성 암브로시오와 성 아우구스티노이며, 뒤쪽은 동방 교회 교부를 대표하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성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입니다. 동·서방 교부들이 사도좌를 받들고 있는 것은 성령 안에서 항상 일치를 이뤄야 한다는 교회 가르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교부들은 사도로부터 이어온 정통 신앙을 해설하고 수호하며 후대에 계승해 줌으로써 교회에 풍요로움을 더해 준 이들이라 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부들의 가르침을 중요하게 여겨 “거룩한 교부들은 이 성전(聖傳)이 살아 있음을 증언하고, 믿고 기도하는 교회의 관습과 생활 안으로 이 성전의 풍요로움이 흘러들어온다고 가르친다”고 밝힙니다.(「계시 헌장」 8)
따라서 교부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소중한 영적 자산이자 보화입니다. 특히 초기 교부들은 유다이즘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가현설, 영지주의에 맞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과 인성을 옹호하는데 크게 공헌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시다’라는 신앙 고백을 성경과 사도 전승으로 증명했을 뿐 아니라 신앙의 유산으로 계승하였습니다.
[생활교리] 하느님 아버지는 누구이신가?
우리는 보통 다양한 하느님 호칭 가운데, 하느님을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우리말 번역과 달리, 사도신경의 라틴어 원문은 하느님에 대한 첫 고백을 “아버지”로 시작한다(Credo in Deum Patrem...). 예수님께서도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Our Father...)로 부르도록 가르치셨고, 실제로도 그렇게 기도하셨다. 특히나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십자가 위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마르 15,34; 마태 27,46)이라 하신 경우를 제외하고, 예수님은 늘 하느님을 (아빠)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왜 하느님을 우선적으로 아버지라 고백하고 부르셨는가? 여기서 ‘아버지’란 칭호는 생물학적 성(性)의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과 하느님 사이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40 참조). 실제로 예수님은 세례 때 하느님으로부터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르 1,11)로 드러나셨고, 당신도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고 말씀하시며 하느님과의 전적인 신뢰와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셨다.
나아가 예수님은 하느님을 “내 아버지”, 제자들에게는 “너희의 아버지”(요한 20,17)로 다르게 부르셨다. 이는 성부와 성자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고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말해준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들”(요한 3,16)이시지만, 그 아버지와 아들의 ‘영원한’ 관계는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우리에게도 이어진다(로마 8,15; 갈라 4,6).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첫째, “하늘에 계신” 초월적 존재이시지만 동시에 우리 가운데 가까이 계시며 활동하시는 “우리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실만큼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의 바람과 간청을 들어주신다(마태 6,31-32; 10,30; 루카 11,11-13). 둘째,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마태 5,45) 햇빛을 비추어주시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모든 이의 아버지이시다(로마 2,11; 갈라 2,6). 때문에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역할의 ‘차이’는 있어도, 신분상의 ‘차별’은 있을 수 없다. 셋째, 영원한 사랑과 돌봄으로 참고 기다려주시는 아버지이시다. “되찾은 아들”(루카 15장), 아니 ‘자비로운 아버지’ 비유에서 아들의 ‘돌아옴’은 단지 빈털터리와 배고픔 때문일까? 오히려 “아직도 멀리 떨어져”(20) 있는 아들을 단숨에 알아볼 만큼 간절히 그리워하며 기다려온 아버지의 사랑과 인내가 아니었을까? 하느님은 연민과 자비 안에서 우리 마음의 문을 계속 두드리시며(묵시 3,20), 그에 응답할 때까지 참고 기다려주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몫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답게”(에페 5,1), 아버지의 이름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필리 2,15) 이 소중한 삶을 충실하고 멋지게, 그리고 아름답게 살아내는 일이 아닐까!
[매주 읽는 단편 교리] 빵 나눔, 하느님의 어린양, 영성체 전 기도
미사 때 평화의 인사를 나눈 뒤엔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합니다. 이때, 사제는 성체를 나누고 그 작은 조각을 성작 안에 넣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기도하며 영성체를 준비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빵을 나누는 예식은 미사 전례의 가장 근본적 예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빵 나눔”(Fractio Panis)이라는 용어는 사도 시대부터 미사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명칭이었습니다. 「미사 경본 총지침」은 빵 나눔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예식은 하나인 생명의 빵,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시는 영성체에 참여하는 모든 이가 한 몸을 이룬다(1코린 10,17)는 사실을 드러낸다”(83항). 성체를 나눈 사제는 그 작은 조각을 성작에 넣으며 조용히 기도합니다: “여기 하나 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이를 받아 모시는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하소서.”
사제가 성체를 나누고 그 조각을 성작에 넣는 동안, 신자들은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이 노래는 7세기경 동방 교회에서 도입되었는데, 처음에는 축성된 빵을 나누는 동안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다 8~9세기 작은 제병이 등장하면서 빵을 나눌 필요가 줄어들자 세 번만 반복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빵을 나누는 동안 계속 반복할 수 있는데, 다만 마지막 구절은 “평화를 주소서.”로 해야 합니다.
사제는 성체의 작은 조각을 성작에 넣은 다음, 혼자서 조용히 “영성체 전 기도”를 바칩니다. 두 가지 양식이 있는데, 사제는 이 중 하나를 선택해 바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께서는 성부의 뜻에 따라 성령의 힘으로 죽음을 통하여 세상에 생명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이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로 모든 죄와 온갖 악에서 저를 구하소서. 그리고 언제나 계명을 지키며 주님을 결코 떠나지 말게 하소서.”
첫째 양식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찬미하고 죄의 용서와 주님과의 일치를 청하는 내용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이 제게 심판과 책벌이 되지 않게 하시고 제 영혼과 육신을 자비로이 낫게 하시며 지켜 주소서.”
둘째 양식은 영성체에 앞서 사제 자신의 부당함을 자각하고 치유와 보호의 은총을 청하는 내용입니다.
미사 경문에는 사제가 미사 주례자가 아닌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위해 바치는 기도들이 있습니다. 바로 복음 봉독 전과 후, 예물 준비 다음, 손을 씻을 때, 성체와 성혈을 영하면서, 성반과 성작을 닦으며 바치는 기도입니다. “영성체 전 기도”도 이런 기도 중 하나입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20) 하느님 백성의 사제직, 「교회헌장」 제10항
「교회헌장」 제10항은 하느님의 백성이 세상 안에서 수행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사제이십니다(히브 5,5 참조). 그분은 단 한 번 당신의 몸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고(히브 10,10 참조), 메시아 백성이 한 나라를 이루어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셨습니다(묵시 1,6 참조).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새로 태어남과 성령의 도유로 영적인 성전을 짓고 거룩한 사제직으로 축성되어, 그들의 모든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께 신령한 제사를 바치고 그들을 구원의 빛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선포합니다(1베드 2,5.9 참조). 그들은 기도와 찬미(사도 2,42.47 참조), 자기 봉헌과 증거(로마 12,1 참조)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전합니다(1베드 3,15 참조).
공의회는 신약성경의 풍부한 인용을 통해서, 초기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대사제로 언급되고 성령의 도유를 받은 하느님 백성이 그리스도의 사제직으로 축성되었다는 전통을 계승합니다. 이 가르침은 트렌토 공의회 이후 반종교개혁의 신학에서 하느님 백성의 사제직이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상황이 극복된 것을 의미합니다.
공의회는 이어서 하느님 백성의 사제직 곧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공통 사제직)”과 교회가 그동안 강조해 온 “직무 또는 교계 사제직”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먼저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은 정도에서가 아니라 본질에서 구분됩니다. 정도에 따른 구분이라면, 두 사제직은 사실 같은 것이고 그 안에서 등급이 나뉘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사제직은 정도가 아니라 본질에서, 곧 서로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집니다. 하지만 두 사제직은 서로 관련이 있고, 공동의 근원인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합니다.
“직무 사제” 곧 성직자는 ‘거룩한 권한으로’ 하느님 백성을 “모으고”(efformat) “다스리며”(regit) 성찬을 “거행합니다”(conficit). 공의회는 직무 사제직을 세 가지 직분으로 표현하는데, ‘모으다’는 ‘형성하다’라는 뜻으로 말씀 선포와 가르침을 통해 교육하는 것을 의미하고, ‘다스리다’는 하느님 백성을 인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성찬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고 신자들과 함께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신자들”은 ‘왕다운 사제직의 힘으로’ 성찬의 봉헌에 참여하며, 성사를 받고 기도하고 감사드리며, 거룩한 삶을 증언하고 극기와 사랑으로 사제직을 수행합니다. 보편 사제직에 대한 이 언급은 사제직 수행에 있어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왕다운 사제직의 힘에서 나온다는 전제는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게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누구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품위를 누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