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무원
어딘가에 누워 짧은 생각을 해본다. “고립무원”. 허망한 들판에 이름 모를 가족들과 함께 살갗 만을 배기 위해 지면 위 튀어나온 이 날카로운 풀들을 혓바닥에 쳐 박고 박는 그 되새김질처럼 “고립무원”이 단어를 곱씹어 무의 여물로 만든다.
생각의 되새김질을 할 때. 역겨운 혐오감에게 동질이라는 식감을 느끼면 곧 냉철하고도 뜨거운 변태적인 카타르시스와 함께 삶의 맹랑함을 느낀다. 따뜻이 이불과 매트 사이의 온열을 품고 있던 온건한 나의 온실 속에 한 켠에는 얼음 가득한 생수를, 한 켠에는 뜨거운 차를 담아 두고서는 더럽게 때 탄 손으로 이미 수 없이 많은 손결에 누추해지고 곰팡이진 책 페이지를 넘긴다. 그때 맞이하는 것은 누군가 속의 나의 모습이며 저들 속에 나의 모습과 우습게 꼬리치며 오는 바람의 행차일 것이다. 난 자연히 바람의 길에 온 몸에 빈 틈을 내주고 의지와 상관없이 간지럽혀지는 기분에 형체 없는 방문자에게 바람이란 이름 붙여 욕 맥이고는 책장을 넘긴다. 완벽한 위치에 어떠한 압박감도 없어 오히려 위험하다 할 정도의 상황에 놓였는데. 언제든지 눈을 감고 맘에 들 때 눈을 뜨면 되는 순간을 경험하며 이 불가지한 온실 속, 유일하게 오점이 될 수 있는 이 마음을 헤집어 놓는 책조차 마음껏 뒤집을 수 있을 때에 되려 단한하다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오만이고 교만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이름모를 이불아래의 제일로 솔직한 고백이 될 지 모른다.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다 결국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얼굴은 천장을 향한 체 눈을 감는다. 그 모습은 어느 날, 어느 순간 누구도 내다보지 못할 때에 아무 이유 없이 죽은 어린 소년 같아서 아무런 흠집 없는 몸이지만 생기 또한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사망이라는 명패에 도장 찍힘 당한 이마는 뇌 속의 무수하게 많은 개인의 아이러니를 보호하고 있다. 뒤틀리고 틀어지고 망가졌다고 생각이 드는 아이러니는 그저 온건히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마음이 부셔지고 도괴되었다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역시나 건전한 위치에서 개인을 주관하고 있다. 욕망과 생각의 모순되는 것들은 자칫 이해하기 힘든 역설로 그저 스크랩화 되어 있는 것이다.
나와 타인 간의 끝없는 거리감은 말할 것도 없다. 정의와 가치를 논하며 사회 속의 한 유기체로써. 앞 개미의 냄새만 진리로 여기고 머리를 가져다가 쳐 박는 개미처럼 ‘타인을 위한다’는 하나의 갈래를 의라 부를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이에 벗어난 ‘나를 위한다’는 위대한 갈래를 악이라 부를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악이라 부른다면, 현실의 세계는 생각하기도 싫은 지옥이 되어 각 악들의 최고 수문장들의 연회들이 집에서부터 학교까지, 학교에서부터 회사까지, 회사로부터 사회까지 펴져 악마들의 축제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나와 타인의 수많은 선택지 속의 선과 악의 개념이 사라지고 난 후의 개인 내면의 스크랩화는 복잡미묘하여 이루어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아이러니한 내면의 역설은 모두가 이해하고 있으며 잠시만 꼬집어 주면 누구나 반겨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가진다면, 그 아이는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데 동시에 내가 있다면, 나는 위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지. 죽인다, 죽이지 않는다. 그 중립적인 하지만 철저히 나의 기준과 선택으로 인하여 한쪽으로 무너져야 한다는 폭력적인 결론들은 괴롭지만 분명하다. 그 사이에는 나름의 판단이 기초를 형성할 것이다. 아이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아무도 아이를 죽이는데에 의문을 표하지 않는다, 아이에게는 죽음이 행복으로의 차선책이다. 나는 아주 힘들다, 내가 꿈을 위하여 모아둔 자금 전부를 수술이라는 도박에 걸어야 한다, 애초에 아이에 대해 호감도, 사랑도 정리해낼 정도의 시간은 없고 머리는 혼란에 가득하다. 나의 모든 것을 배우자라는 족쇄에 걸게 됐는데 이제는 그 족쇄가 더 길고 단단하게 장애아이에게 걸린다. 아, 나의 꿈은 저 멀리 달아나고 개인의 희망과 망상과 힘과 원동력과 기준은 무너져 내려 공동의 쇠사슬에 묶이고 끌려 다니게 될 것이다. 이 사이의 결정, 무엇이 되었던 나에게로부터 오는 모든 결론과 이로 인하여 오는 사명과 책임과 의무가 내가 나를 옭매고 말 것이다. 나는 나로 존재하지 못하고 외부의 바람에 어떠한 저항도 반응도 하지 못한 체 갈대처럼 휘둘리며. 아, 그 시점에 나는 오로지 나의 선택을 하며 그 선택으로 인해-자세히는 그 선택에 반향 되어질 타인에 대해-무쇠 같고 견디기 힘들며 무엇인지도 모를 이상야릇하게 냄새나는 인간의 곰팡이에 얽매인다.
이 선택은 단순치 않다. 나를 선택하면 돌이킬 수 없는 타인들, 심지어는 나의 아이의 가녀리면서도 심심하게 강고한 손을 놓칠 것이라는 불안이. 타인들, 어쩌면 나의 아이를 선택하면 내가 키워내었던 나의 삶의 결론, 이상 혹은 그 뿌리가 되어 있는 “나”라는 것의 “삶”을 잃어 버릴 것이라는 불안이 든다. 그 불안은 살짝은 역겨운 것 같아서 결국 뭐든지 전부 챙기고 싶다는 오만한 생각이기도 하며. 그 장애가 있는 우만한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따위의 감정이기도 하다. 나의 손에 달린 타인과 개인의 운명을 생각하며 느껴지는 쿰쿰 하고 매캐한 곰팡이의 숨쉬는 소리는 이 아이러니한 개인 선택의 스크랩화를 어럽고도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그렇게 혐오스러운 것의 해소는 더욱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자욱하게 퍼진 압도와 경악의 숨결의 안개를 걷히게 만들 강인하고 화려한 돌풍은 존재하지 않고 그저 땅 속 싶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 내면의 욕망의 우물이 봇물처럼 터져 오르기 만을 희망할 뿐이다. 어지럽고 혐오스러운 선택과 그 선택의 과정에서 벗어나 욕망의 충실하게 된다. 선택 따위, 고민 따위, 인간답기에 비로소 역겨운 것들 따위. 그러니 말하자면 생각 따위에서 벗어나 쾌락과 뇌 작용의 정신없는 분비만이 가득한 욕망의 우물을 파내기 시작한다.
인간 다운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차라리 아프리카 초원, 생존과 유전자 종속 만을 위하여 머리과 심장을 들이 박는 생물들 다운 것이기를 바래 보지만. 인간으로 사는 개인의 욕망은 그렇게 휘황찬란한 거룩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이 욕망의 우물은 변태적이고 괴상망측하며 저주적일 뿐이었다. 목으로는 가시를 삼키는 것에, 손으로는 파괴하는 것에, 생각으로는 무지에 빠지는 것에, 타인에 대하여는 괴결하는 것에 그 우물을 폭발할 준비를 하고 있다.
깊고, 깊은 생각을 하다가도 그 욕망의 우물은 지 혼자 범람하듯 밀어 올라져 와서 이상한 망상에 빠져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하고, 나태와 무지의 상태에 거하는 것이 답인 듯 여기게 한다. 그렇게 허무에 빠지면 그로써 만족하며 자책하고, 무의미라는 의미를 모든 사물에 부여하는데 괴이한 만족을 느꼈다. 혐오와 고통과 역겨움을 전부 쏟아낸다. 먹고, 먹던 나의 모든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들을, 그렇게 입으로 표현하고 마음에 품어 묵상하던 것들을, 알게 모르게 삶 속에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들을 조금 의식함과 동시에 삶의 미천에 전부 토해낸다. 그렇게 혐오를, 고통을, 역겨움을 토하는 그 와중에 느껴지는 배덕감과 욕망의 만족. 분노와 나태와 회의와 슬픔과 변태적이게 뒤틀린 쾌락들을 온전이 맞이함에서 오는 욕망의 만족들의 토사물이 미천에 쌓이고. 미천은 역전되어 개천으로 태어나, 그 노랗게 묽든 개천에서 역겨운 만족과 혐오스러운 행복이라는 용이 난다.
고립무원. 이 상태에 놓인 것이다. 물론 뽀송한 이불을 덮고 푹신한 매트리스에 누워 한 손을 뻗으면 차가운과 뜨거운 것을 원하는데로 고를 수 있는 안락한 자리에 영원히 있어도 되는 상황이지만. 이것인 연약한 정신이 그나마 인지한 상황이고 사실 그 두려움에 떠고 있는 망쳐진 정신은 개인의 자의식으로부터, 사람으로써의 정체성 그 어두운 진실로부터 도망치고 도망친 상황일 뿐이다. 그 상황에서 도무지 무엇이 부정적으로 보이겠는가. 보인다면 그대로 다시 도피의 길에 오를 뿐이다.
도망쳐 온 것들은 해결되지 않은 그래도 굳건히 서있고 자신의 존재를 고하며 언젠가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이 두터운 곰팡이를 더욱 짙게, 고약하게 성장시키고 있다. 개인의 선택은 개인과 타인 사이. 불완전하고 오히려 악으로 채워진 개인의 마음대로, 무지를 지식의 최고봉으로 여기는 지성생각의 판단대로 그 중 택일 해내며. 그 결과는 망측할 따름이다. 생각하는 순간 누군지 모를 또 다른 나의 한 모습이 이 생각의 역겨움의 정도를 나타내며 채찍질하고 그렇지만 나는 나의 뜻을 포기하지 않고 그저 고요하고 적막한 바닥 없는 절망 속에 누구의 도움도, 언질도 없이 빠져버리고 마는 것이며. 그저 생각했다는 죄의식에 죽어버린다. 결정을 내림에 있어 개인은 자신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으로써, 나의 결정이 영향을 받을 타인의 모습으로써 투영되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몽상을 하다 결국 그 꼬리대로 길고 억세게 묶여져 버린 쇠사슬, 곧 악인을 향한 당연한 족쇄를 바라보며 결정을 내리는 과정 속 발견하고 말아버린 곰팡이를 생각해 본다. 이제는 결과를 기다릴 시간,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어 개인은 그 괴상망측한 욕망의 굴로 숨어 버리고 모든 사실을 잊게 할 욕망의 범람을 애원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며 일상 중 간단히 묻어 나오던 전혀 여과되지 않은 욕구의 결정을 모으고 모아 한 순간 터트리고 그 순간부터는 도저히 용처럼 터져오르는 욕망의 오물을 멈출 수가 없을 것이다. 순간의 감정을 인생의 주권자로 만들어 내며, 여과되지 않은 원함을 만물의 법칙으로 여기며, 처음 맞이한 재미를 온 천지의 으뜸으로 만들고 종속되며,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연약해지고 추해진 모습을 최대한 가리려 허풍과 속임수를 늘려가며, 그 속임수에 자신마저 속아버린다. 그렇게 개인이 개인에게 속아 무지라는 도피를 하게 된다. 누군가 그런 개인에게, 그렇게 온전이 개인적인 체험을 하고 있는 존재에게 구원의 손길 뻗겠는가. 개인이 거울 속 선택과 욕망이라는 늪의 빠져 둥둥 떠다니는 낙엽, 혹은 벌레 시체처럼 생긴 저이를 보고 누구라고 유추라도 할 수 있을까.
내가 나인 것을 모르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섬뜩한 무지에 빠진 개인은 나도 나에게서 고립되어 구원 따위는 없는, 바랄 수도 없는 고립무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