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박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타악기 소리를 한다. 잎은 소리를 감상하듯 눈을 감는다. 백인백인百忍百忍 하는 기도문이라도 중얼대나 보다.
비 오는 여름 한낮, 어머니는 가끔 밀가루를 주물러 부침개를 부치셨다. 부추와 고추며 어떤 날은 조갯살을 넣어 맛을 내었다. 손으로 죽죽 부침개를 뜯어먹는데 비 오는 마당을 가로질러 두꺼비란 놈이 엉금엉금 장독 울타리 쪽으로 가고 있었다. 부침개 대신 콩을 볶는 날도 있었다. 구수한 콩을 우물거리며 도롱이를 몸에 감고 비 오는 밭둑에서 소꼴을 베었다.
빗방울에 얼룩지는 유리창에서 소박한 추상화를 보는 재미도 있다. 주르륵 흘러 어디론가 살짝 선을 그으며 사라지는 놈, 동그만 방울이 되어 맺히는 놈을 보는데 물방울 그림이 걸려 있던 어느 화랑이 생각난다. 물방울의 음향을 물방울 속에 감추고 있는 그림이었다. 물방울 속에 악기가 있다. 서로 부딪치면 쟁그랑거리는 얇은 금속음이 터질 듯했다. 물방울의 변주곡이 울린다는 느낌이 들어 귀를 기울이는 은근한 재미도 있었다.
빗방울 속에는 은빛이 있다. 유리창은 은방울의 화음으로 달콤하게 쟁그랑거리는 관악기였다. 비와 더불어 은빛 변주곡을 듣는 마음으로 비를 즐겨도 좋았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크레용으로 낙서를 하던 때가 떠올랐다. 유리창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나를 어린 시절로 끌고 간다는 생각을 하면 세월을 거꾸로 되돌려주는 비가 고맙다.
비는 타악기를 치는 연주가다. 그 연주를 들으며 유리창과 후박나무 잎에 떨어지는 비를 번갈아 보고 있다. 광물성 음향과 식물성 음향의 조화라는 말이 떠오른다. 비 속에는 실내악단이 있다.
2
뜨끈한 물이 배꼽 아래를 데우는 동안 반신욕이란 말을 혼자 우물거린다. 때로는 발을 대야에 담그고 족욕이란 말을 하며 시원해 한다.
되돌아보면 엉덩이를 담근 채 첨벙첨벙 물놀이를 하던 서너 살 무렵의 내가 물대야 안에서 등물을 하고 있다. 어디서 매미가 운다. 어디서 송아지가 길게 울고 있다. 햇빛이 톡톡 등에 땀띠를 꽂을 때마다 뭉게구름이 햇빛을 가려주고 있다. 딸꾹질이 한두 번 나올까말까 한다.
밤에는 발끝에서 아랫배까지 홑이불을 덮는다.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무릎께가 허전하여 이불을 걸치지 않으면 쉬 잠이 들지 않는다. 이불을 덮고 잠드는데 새벽녘에는 홑이불처럼 가벼운 꿈을 꾸다가 깬다.
아랫배까지만 덮는 홑이불은 반신욕법이다. 그렇게 보면 홑이불은 물이다. 잠자리에서조차 반신욕을 하다니 뜻밖이다.
어느 새벽에는 모로 누워 마당에 또닥또닥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곤 했다. 발치에 떠밀린 이불을 다시 끌어올리고 늦잠을 즐기는데 싸한 바람 냄새가 코에 닿았다. 새벽 일찍 들에 다녀오신 아버지의 바짓가랑이에 묻은 이슬 냄새와 흙내였다. 그 냄새가 우리 집의 실내악이었다.
나에게 가족이 딸리게 되자 어느새 나는 실내악단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