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놀라운 21세기다. 인터넷 환경이야말로 그러한 놀라움을 만드는 요소의 핵심이다. 인터넷 때문에 젊은 층의 글쓰기가 본 궤도에 올라섰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가 되었다. 인터넷 구석구석이 젊은 글들로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신 공격적 글 폭력이 없는바 아니지만, 사이버 세상에는 자기를 잘 드러낼 방법을 찾는 수백, 수천만 호기심들의 진지한 탐색이 지금 이 시간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다종다양의 이런 글쓰기 가운데 진지하기로 가장 윗길에 드는 것 중의 하나가 시 쓰기이다. 시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을 겨냥한다. 그런데 그 삶이란 것이 어디 쉽게 제 본 모습을 잘 보여주는 물건이던가. 그러니 문학이 혹은 시가 어렵고 진지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시의 목표가 삶이라는 건 나중에 알아도 아무 상관없는 지식일 뿐이다. 단지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시들이 결국 하나의 어휘나 구절 혹은 거기에 실린 작은 생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소박하게 말해 시의 출발은 수수께끼나 삼행시 혹은 개인기로서의 재미있는 위트를 즐기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시란 말장난[pun]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시의 세 가지 싹 시가 우리에게 오는 경로는 대개 세 가지다. 그 중 하나가 자기 내면의 정서를 밖으로 드러내려는 욕구. 어떤 이에 대한 그리움, 미움, 절망이나 분노, 일상의 쓸쓸함 따위의 정서를 우리는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쌓아두기만 하고 살아갈 수 없다. 마음의 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게 마음속에 쌓이면 우리는 수다나 폭식, 과격한 운동 따위 갖가지 방법으로 그 마음의 울혈을 풀려고 한다. 하지만 덧난 마음의 상처들이 그래도 다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우리를 괴롭힐 때, 우리는 그 감정의 세목(細目)들을 구체적으로 종이에 적어보고 싶어 한다. 객관화하여 들여다봄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얻고 싶은 것.
그런데 자기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려는 욕구로 시작된 이러한 시들의 성공 여부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마음을 얼마나 잘 감추는가에 달려있다. 표현욕이란 어떤 이에게 전달됨으로써 목표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마음이 아파 못살겠다”거나 “슬퍼 죽겠다”라고 고함만 지른다면 어느 누가 계속 들어주려고 할까?
그러니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까지 내 아픔이나 슬픔이나 사랑하는 마음 따위를 전달하려면 특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특별한 방법이란 다름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는 한편으로 그러한 감정을 의탁해 간접적으로 암시할 수 있는 구체적 대상물을 찾아 제시하는 것이다. 정지용이 시 ?유리창.1?에서 극한의 슬픔을 ‘물먹은 별빛’에 비겨 표현했다는 사실은 이미 문학사의 한 상식에 속한다.
시가 오는 두 번째 길은 말의 발견을 통해서이다. 어느 날 문득 입에 붙어 하루 종일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처럼, 정말 무릎을 치게 만드는 빛나는 말이 내게 다가왔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한 음절일 수도 있고 어휘나 구절 혹은 완전한 문장일 수도 있으며 제법 연의 꼴을 갖춘 문장의 덩어리일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어느 날 문득 내게 다가온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게 되면, 그 말 주위에 그 말에 적합한 상황을 씌워 덧붙이면 시가 된다.
이 말의 발견이란 우선은 다른 시인들의 좋은 작품을 많이 읽고 그 가운데 자기만의 좋은 구절을 가슴에 심어두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한 모방이 나중에 진정한 자기 말을 만들게 해주는 힘인 까닭이다. 다만 한 가지, 어느 날 지하철에서 문득 어떤 말이 떠올랐다면 또 문득 사라져버릴 위험도 높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생각은 쉽게 휘발한다. 메모하고 기록하는 습관이 중요한 이유이다.
세 번째 시의 길은 상황의 발견으로부터 온다. 살아가다 보면 한 번은 겪은 듯한 기시감(旣視感)에 빠지는 날도 있듯이 “아, 이건 정말 예술이야. 시다 시”하고 이마를 치게 되는 날도 있다. 무척이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어떤 장면 앞에서거나 반대로 너무나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장면들 앞에서, 혹은 너무나 역설적이며 아이러니컬한 상황 앞에서 우리는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좋은 축도(縮圖)로군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그러한 상황이나 장면을 요약적인 말로 옮겨 놓으면 그것은 그대로 시가 된다.
시의 숲을 키우기 위한 조건 이미지다 비유법이다 어조다 아이러니다 뭐다 하는 어려운 용어들은 사실 시의 싹을 틔워 크게 자라게 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알면 좋지만 우선 당장은 뭐 그리 조급하게 다가갈 필요가 있는 지식이 아니라는 뜻. 그보다는 말 자체를 즐기려는 마음이 중요하고 그러한 표현의 묘미를 오래도록 느끼기 위해 스스로의 관심에 집중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 시에 대한, 아니 시를 이루는 말에 대한 사랑이 요체라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시작(詩作)의 시작 단계에서는 좋은 시들을 베껴 적어보는 경험도 요긴하다. 비교적 최근의 시들(왜냐하면 나와 관심이 중복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을 두루 겪어보고 마음에 드는 시들을 몇 편 골라 수십 번씩 종이 위에 깨끗이 옮겨 적어 보라. 그러는 사이에 상대방 시인의 마음씀과 말의 길들이 자연스럽게 내게 옮겨오게 될 것이다. 그러한 자산, 즉 내게 남은 남들의 유산이 많아야 그것들을 새롭게 엮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지 않을까? 단언하건대 하늘 아래 새로운 말은 없다. 묶는 방법, 결합하는 대상의 새로움이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러한 추구의 목표가 궁극적으로는 진지하고 고귀하고 자유로운 삶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시의 길과 그것을 이루는 말의 길에 반쯤 미쳐 있다면 언젠가는 삶의 진정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시로 고민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무 조바심 낼 필요는 없다. 그저 느긋하게 말을 즐기자. 입속으로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혹은 검정콩 푸렁콩 하고 가만히 주문을 외워 보라. 어느 새 시가 빈폴 자전거처럼 내 가슴에 박혀 삶의 한 때가 금빛으로 물들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두 패로 나뉜다. 시를 아는 인간과 그것도 모르는 생목숨.
이 말씀[言]의 절집[寺] 안에서 영혼이 그윽해지는 체험으로 젊음의 이 한 시절을 누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