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클래식] 전망 좋은 방-푸치니의 오페라 <자니 스키키>의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영화 속 클래식]
제임스 아이버리 감독
전망 좋은 방
A Room with a View 1985
헬레나 보헴 카터(루시), 줄리안 샌즈(조지)
1900년대 초 피렌체를 배경으로 잔잔하게 사랑이 펼쳐지는 영화
Full Movie "A Rọọm with a Vịėw" (I985)
꿈에서 본 것을 말해주랴?
햇빛 반짝이는 고요한 언덕에
어두운 나무숲과 누런 바위 그리고 하얀 별장
골짜기에 놓인 도시.
하얀 대리석 성당들이 있는 도시 하나가
나를 향해 빛을 발한다.
그곳은 피렌체
지금 그곳 좁은 골목에 둘러싸인 오래된 뜰 안에서
내가 두고 온 행복이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
독일 시인 헤르만 헤세의 ‘북쪽에서’라는 시이다. 그는 이 시에서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두고 온 행복’이라고 했다. ‘꽃의 도시’라는 이름의 피렌체(영어로는 플로렌스). 아르노 강변에 위치한 이 도시에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산타 크로체 성당, 산 로렌초 성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우피치 미술관, 바르젤로 미술관,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키오 궁전, 베키오 다리 등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건축물과 그 시대의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들이 즐비하다.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간직한 고색창연한 건물들, 과거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아기자기한 골목길, 푸른 하늘과 조화를 이루는 따스한 붉은빛 지붕들,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했던 위대한 예술 후원 가문 메디치가의 문장들 그리고 마치 후광처럼 이 도시를 비추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라파엘로와 같은 천재들의 환영들. 그리하여 해마다 중세의 어둠을 뚫고 화려하게 번성했던 이 도시의 매력을 만끽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전망 좋은 방>의 주인공 루시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영화의 배경은 1900년대 초 피렌체. 영국 출신의 루시 허니처치는 사촌인 샬롯과 함께 피렌체로 여행을 온다. 노처녀인 샬롯은 루시의 보호자 격으로 그녀를 따라온 것이다. 두 사람은 베르톨리니 여관에 도착해 여장을 푼다. 그런데 창문을 열어보니 기대와 달리 창밖으로 보이는 전망이 좋지 않아 실망한다. 저녁식사 시간.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도 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때 옆자리에서 이들의 대화를 우연히 들은 에머슨 부자가 자기들이 묵고 있는 전망 좋은 방과 바꾸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에머슨 씨는 몽상가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루시는 그의 아들 조지에게 은근히 마음이 쏠리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는다.
어느 날, 루시는 혼자 도시 구경을 하러 나갔다가 광장에서 사람들이 심하게 싸우는 광경을 목격한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심하게 피를 흘리며 쓰러진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녀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데, 바로 그 순간 우연히 근처에 있던 조지가 쓰러지는 그녀를 받아준다. 그로부터 며칠 후, 루시와 샬롯, 에머슨 부자는 피렌체 근교로 나들이를 간다. 주홍색 양귀비꽃과 황금빛 보리가 넘실거리는 들판에서 마주친 루시와 조지는 격렬한 키스를 나눈다. 하지만 이들의 키스는 그 광경을 목격한 샬롯에 의해 금세 중단되고 만다. 루시의 보호자 자격으로 여행을 온 샬롯은 이 일에 심한 책임감을 느끼고 서둘러 짐을 정리해 영국으로 돌아간다.
피렌체에서 우연히 만난 루시와 조지는 서로에게 이끌린다.
집으로 돌아온 루시는 평소 알고 지내던 청년 세실 바이즈와 약혼을 한다. 세실은 조지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청년이다. 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다리 없는 안경을 코에 걸치고,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다니는 신사 중의 신사이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루시의 양해를 구하지 않으면 가벼운 입맞춤조차 할 수 없는 소심한 남자인데, 이미 조지의 격렬한 키스를 경험한 루시는 이런 세실에게서 묘한 정서적 결핍감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옆집에 에머슨 부자가 이사를 온다. 이 기막힌 우연에 루시는 몹시 놀란다. 활동적인 조지와 루시의 동생 프레디는 이내 좋은 친구가 되고, 루시의 집 정원에는 이들의 테니스 시합이 자주 벌어진다. 이렇게 서로 허물없이 지내던 두 사람은 어느 날, 또다시 갑작스럽게 키스를 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조지는 루시에게 세실이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루시는 냉정한 말로 조지를 거부하지만 그때부터 비로소 자신과 세실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현실을 직시한 루시는 세실에게 파혼을 선언한다.
[왼쪽] 루시의 약혼자 세실 바이즈. [오른쪽] 루시와 조지와 세실.
세실과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루시는 조지와의 사랑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를 피하기 위해 그리스 여행을 계획한다. 한편 루시에게 거절당한 조지는 이사를 준비한다. 조지가 이사를 떠난다는 것을 알고 슬픔에 잠긴 그녀에게 조지의 아버지가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제야 비로소 루시는 자신의 알 수 없는 슬픔이 조지와의 사랑을 숨기려고 한 데서 왔음을 깨닫고 그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 후 조지와 루시는 함께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피렌체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에머슨 부자가 양보했던 바로 그 ‘전망 좋은 방’의 창가에서 황혼을 배경으로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며 달콤한 신혼의 첫날밤을 맞이한다.
푸치니의 오페라 <자니 스키키>의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영화 <전망 좋은 방>에서는 푸치니의 오페라 <자니 스키키>에 나오는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가 주제곡으로 쓰였다. 이 노래를 주제곡으로 선정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자니 스키키>의 공간적 배경이 피렌체라는 것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푸치니의 오페라 <자니 스키키>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에 나오는 자니 스키키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다. 원작인 <신곡>의 ‘지옥편’에는 자니 스키키라는 피렌체 사람이 유언장을 위조한 죄로 지옥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만 나와 있는데, 푸치니가 대본작가 포르차노와 손잡고 이 단순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한 희극으로 만들었다.
오페라의 배경은 1299년 피렌체. 이 지역의 부호 부오조의 집에 친척들이 모여 있다. 부오조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그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모인 것이다. 친척들은 하나같이 “불쌍한 부오조”라고 슬퍼하지만 사실 이것은 거짓 슬픔이다. 그들의 머릿속은 부오조가 남길 막대한 유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부오조가 전 재산을 수도원에 기증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부오조가 숨을 거두고 친척들은 서로 유언장을 찾으려고 난리 법석을 떤다.
부오조가 죽자 친척들은 그가 남긴 막대한 유산에 관심이 쏠린다.
그러다가 치타의 조카 리누치오가 금고 안에서 유언장을 찾아낸다. 유언장에는 그들의 우려대로 모든 재산을 수도원에 기증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친척들이 유언장을 읽고 실망하고 있는 동안 리누치오는 이 문제를 자니 스키키와 상의하자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리누치오의 말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리누치오는 친척들로부터 자니 스키키가 촌구석에서 온 졸부라고 흉보는 소리를 듣고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른다.
피렌체는 꽃피는 나무와 같죠.
줄기와 잎새는 시뇨리 광장에 있지만
그 뿌리는 맑고 비옥한 계곡으로부터
새로운 생기를 빨아들이죠.
별들까지 닿을 듯한 장엄한 대저택과
미끈한 탑들과 더불어 피렌체는 꽃핍니다.
아르노 강은 바다로 들어가기 전에
산타 크로체 광장에 입 맞추며 노래하죠.
개울들도 모두 모여 함께 하는 그 노래는
너무나도 달콤하고 부드럽죠.
그처럼 여기저기서 모여든
여러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이
피렌체를 풍요롭고도 화려하게 만들지요.
멋진 탑을 세우기 위해 엘자 계곡의 성채에서 온
아르놀포를 환영합시다.
수풀이 우거진 무젤로에서 온
조토를 환영합시다.
통 큰 거상인 메디치를 환영합시다.
옹색한 심술과 미움은 이제 됐습니다.
새로 온 이주민들과 자니 스키키여 영원하라!
여기서 리누치오는 산타 크로체 성당과 피렌체 대성당, 베키오 궁전을 설계한 아르놀포와, 두오모 광장에 있는 종탑을 설계한 조토 디 본도네 그리고 유명한 예술 후원 가문인 메디치를 찬양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본래 피렌체 사람이 아니고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인데, 피렌체로 와서 문화와 예술의 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목적은 역시 외지인인 자니 스키키를 추켜세우기 위한 것이지만 은연중에 문화예술의 도시 피렌체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부오조의 유언장을 찾아 읽고 실망하는 친척들.
이 노래를 부른 리누치오와 자니 스키키의 딸 라우레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리누치오는 유산을 상속받으면 라우레타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상황이 불투명해진 상태다. 어려서부터 리누치오를 키운 치타는 자니 스키키에게 지참금 없이는 결혼시킬 수 없다고 말하고, 이런 치타의 말에 기분이 나빠진 자니 스키키는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라우레타가 매달리며 리누치오와 결혼시켜 달라고 애원하자 딸의 결혼을 위해 유산을 나누는 일에 개입하게 된다.
자니 스키키는 부오조가 죽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니 자기가 부오조로 위장을 해서 새 유언장을 작성하겠다고 한다. 그러자 친척들은 자기가 받고 싶은 유산이 어떤 것인지를 말한다. 자니 스키키는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기로 약속한다. 그러면서 만약 속임수를 썼다는 것을 들키는 날에는 모두 오른손을 잘린 후 추방당하게 된다고 겁을 준다.
부오조로 위장한 자니 스키키는 공증인 앞에서 유산 분배에 대한 유언을 한다. 그런데 친척들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재산만 물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자니 스키키에게 준다고 유언한다. 이 말을 듣고 친척들이 모두 격분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니 스키키는 오른손이 잘리고 추방당할 가능성에 대해 암시한다. 친척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나중에 공증인이 나가자 친척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덤벼든다. 하지만 자니 스키키는 이 집의 주인은 이제 자기라고 하면서 친척들을 쫓아낸다. 그리고 관객들을 향해 부오조의 재산이 더 좋은 목적으로 쓰일 것이라는 것과, 청중들이 딸의 행복을 위해 죄를 지은 자신에게 무죄 판결을 내릴 것으로 믿는다고 말한다.
영화에 나오는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는 라우레타가 자니 스키키에게 매달리며 리누치오와 결혼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에서 부르는 것이다.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저는 그를 좋아해요.
그는 정말 잘생겼죠.
저는 결혼반지를 사기 위해
포르타 로사 거리로 가길 원해요.
그래요. 그래요. 정말로 가기를 원해요.
제가 만약 헛되어 그이를 사랑했다면
베키오 다리로 가서
아르노 강물에 몸을 던질 거예요.
저는 조바심 나고 고통스럽답니다.
오! 주여!
저는 죽길 원해요.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제목만 보고 이 노래를 아버지에게 자신의 사랑을 애원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부드럽고 서정적인 멜로디 역시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한몫을 한다. 하지만 이 노래는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면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겠다고 아버지를 협박(?)하는 내용이다. 형식적으로는 애원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협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가 낭만적인 영화의 배경음악이 된 데에는 가사의 불손함을 초극하는 멜로디의 힘이 크다. 아무리 내용이 불손해도 멜로디가 워낙 아름다우니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는 자니 스키키가 유언장을 위조한 죄로 지옥에 떨어진 것으로 나오지만, 푸치니의 오페라를 보면 그가 지옥에 떨어졌을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죽은 후에 지옥에 떨어졌을지언정 내세에는 부정하게 상속받은 유산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정한 행위는 재산을 좋은 목적에 쓸 것이며, 이 모든 것이 딸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말로 면죄부를 받는다. 아름다운 멜로디 덕분에 가사의 불손함이 상쇄되는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처럼.
글 진회숙(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바다님 아름다운 음악과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