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이 마리아의 티없는 성심을 거스르고 모독하는 것에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셨다.
그런 까닭에 성모님은 다섯번의 첫토요일을 당신의 티없는 성심을 아프게 한 죄를
보속하고 배상하는 지향으로 지내라고 하셨다.
(1)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에 대한 모독을 배상하는 마음으로
환희의 신비 제1단을 기도합시다.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
묵주기도의 첫 신비는 성모님의 원죄없는 잉태에 관해서도 깊이 생각하도록 해준다.
프랑스 파리 남쪽 150마일 지점에 있는 오래된 마을인 느베르에 위치한 노트르담 수녀원
소성당의 감실 앞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120년이 넘도록 부패되지 않은 한 유해가 모셔져있다.
바로 1858년 루르드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을 본 성녀 베르나데트 수비루의 거룩한 몸이다.
또한 그 수녀원의 거실에는 한 개의 빈 흔들의자가 놓여있는데 그것은 그곳을 방문하는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그 의자는 베르나데트 성녀가 어릴 때부터 앓아왔던 천식이 악화되어
폐출혈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계속 앉아 있던 자리다.
성녀는 자신의 생명이 조금씩 꺼져 가는 내내 그 의자에 똑바로 앉아 있었다.
마침내 팔을 의자에서 늘어뜨리고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성녀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 불쌍한 죄인을, 이 불쌍한 죄인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수천 명이 치유되었고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례지 가운데 하나가 된 루르드에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를 만났으며, 또한 시성의 영광에 오를만큼 희생과 믿음의 생애를 살았던 성녀가
어떻게 해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그것도 불쌍한 죄인으로까지 여길 수 있었던가?
그 이유는 1858녀 3월 25일 루르드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을 만난 것으로 찾을 수 있다.
베르나데트 성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모님은 장미덤불 위에 서 계셨으며 기적의 메달에 있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내가 세 번째 질문을 드렸을 때 성모님은 근심스럽게 보였으며 하느님 앞에 당신 자신을 대단히
비천한 이로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성모님은 당신의 손을 들어 가슴 위에 서로 엇갈려 놓으시며
하늘을 올려다보셨습니다. 그런 후에 천천히 손을 내려 놓으시고 나를 향하여 허리를 굽히시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르나데트 성녀는 성모님의 그 겸손하신 모습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되신 표정과 동작으로 손을 모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모습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죄가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그와는 대조적으로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죄가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은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었는데 그 이전인 2월 11일부터 발현때마다 성모님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던 베르나데트는 그때까지만 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강생의 첫 신비, 즉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저희 가운데 계시나이다." 라는 말씀의 의미도 그날 비로소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베르나데트 성녀는 어릴 때부터 천식을 앓았으며 성모님의 발현을 본 이후에도 그리고 수녀원에 들어가서도
천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질병으로 심한 고통을 당했었다. 그런 그녀에게 성모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는 약속하지 않지만 저 세상에서는 약속해 주겠다."
천상 어머니의 약속대로 그녀는 "원죄 없으신 잉태"의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그 성녀는 그 의자에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불쌍한 죄인을, 이 불쌍한 죄인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들도 묵주기도 중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라며 천사가 아뢴 그 거룩한 말씀이 내포하는 원죄 없는 잉태의 거울 속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성녀 베르나데트의 눈앞에 계속 남아 있었던 모습, 즉 원죄에 전혀
물들지 않으셨고 지극히 겸소하신 성모님의 그 모습을 내안에서 계속 지니고서 그 거울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어야겠다.
흔들의자의 베르나데트 성녀가 보여 준 겸손함으로 성모님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하고 탄원할 수 있어야겠다. 겸손은 나는 누구이며, 하느님의 선하심과 순수하심에 비추어
볼 때 나는 과연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거룩함과 죄 없음 그 자체도
겸손에 대한 인식의 정도에 달려 있다.
원죄없는 잉태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다른 한 관점은, 인간이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죄에서 비롯된
사탄의 통치로부터 해방되고 구출되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성모님께서 원죄없이
잉태되셨다는 점이다. 따라서 원죄 없으신 잉태는 바로 우리 각자의 영광이며, 우리 모든 인류의 영광이다.
"마리아는 타락한 인간 본성의 유일한 자랑거리"라는 개신교 시인 워즈워드의 말처럼 우리의 자랑인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를 직관한 베르나데트 성녀가 죽음에 직면해서 자신을 불쌍한 죄인으로
지칭할 정도로 원죄의 결과를 자기 자신 안에서 볼 수 있었다면, 우리의 원조들은 성모님처럼 원죄 없이
잉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불복종함으로써 죄를 지었으므로 그 죄의 결과가 어떠할지는
우리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렇게 큰 영예를 우리 인류에게 주셨는데도 우리 중에는 이 영예를 부인하려는 이들이있다.
하느님께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그들은 "마리아는 원죄 없이 잉태되지 않았고 우리와 같은 죄인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인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당신의 은총으로
이 품위에 꼭 맞갖게 만드셨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또한 그것을 천사가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루카1,30-31)라고 하신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부인하는 이들은 진리에 무지한 까닭에 그런 오류를 저지르고 퍼뜨린다.
그것이 하느님과 성모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는 두분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지 않았던가.
그것은 또 천사가 알려준 대로 성령으로 잉태하신 성모님과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성모송을 드릴 때마다, 특히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 첫 단을 기도할 때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 아드님과 성령께 이에 대한 배상을 드리도록 하자.
성모님의 이 위대한 특전을 부인하는 이들을 위하여, 또한 인류의 이 위대한 영예를 부인하는 이들을 위하여
배상을 드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묵주기도를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바쳐 드리자.
<왜 첫토요일을 지켜야 하는가?/티없으신 마리아 성심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