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리 모인 기생 여덟명… 동질감으로 우정 나누며, 고난의 삶 이겨낼 몸부림
영화 ‘게이샤’에서 빚 때문에 게이샤가 된 에이코(왼쪽)는
선배 게이샤 미요하루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가도카와 제공
한시에서 우정은 사랑보다 즐겨 다룬 주제였다. 하지만 여성들의 우정을 읊은 한시는 찾아보기 어렵다. 특수 신분인 기생의 우정은 더욱 그렇다. 1879년경 팔도 각지에서 온 여덟 명의 기생은 한양에서 수계(修禊) 모임을 갖고 우정을 기리는 시를 남겼다. 월하(月下, 1860∼?)의 시는 다음과 같다.
◇ ‘팔선루(八仙樓) 수계에서 지은 시’
차례로 성명과 고향 적으니,
좋은 날 여덟 신선이 수계를 하는구나.
아홉 명 백거이 모임에서 하나 빼 벗하고,
다섯 귤사(橘社)에 셋 더해 이웃하네.
여기까지 온 거리는 모두 4300리,
나이는 합해서 130여 살.
바라건대 천모산 신선 한없는 수명 가지고,
영원히 강녕하고 늙지 말기를.
記姓書鄕次第人(기성서향차제인),
八仙修契屬佳辰(팔선수계속가신).
香山除一猶爲伴(향산제일유위반),
橘社添三自작린(귤사첨삼자작린).
地共四千三百里(지공사천삼백리),
年惟一百卅餘春(연유일백삽여춘).
願將天姥無疆壽(원장천모무강수),
永作康零不老人(영작강령불노인).
수계는 본래 3월 상사일에 그해 액운을 쫓기 위해 베푸는 제사로, 이를 기념한 문인들의 모임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왕희지(王羲之)가 주도한 ‘난정(蘭亭)’ 모임이 유명하다.(‘蘭亭記’) 본명이 이연화인 시인은 평양 출신으로 모임에 참여한 동료들의 이름과 출신지를 기록해 기념하고 건강과 젊음이 영원하길 기원했다.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 감독의 영화 ‘게이샤’(A Geisha; 원제 ‘기온바야시(祇園囃子)’·1953년)에선 기생처럼 특수한 신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이샤(芸者)의 신산한 삶을 보여준다. 문인들이 많이 드나들기로도 유명한 전통의 화류가인 교토의 기온 거리. 이 거리에서 오랫동안 게이샤로 일해 왔던 미요하루의 집에 어느 날 어린 여자아이가 찾아온다. 그녀의 이름은 에이코. 어머니를 잃은 그녀는 무희(마이코)가 되기를 원해 미요하루에게 찾아온 것이다. 무희로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하지만 어떤 고생이라도 감수하겠다는 에이코의 열성에 감탄한 미요하루는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게이샤들이 오가는 골목 풍경은 공간의 깊이가 강조돼 그들의 폐쇄된 처지와 삶의 질곡을 암시한다. 게이샤들의 우의는 고민을 공유하는 어린 견습생 간에도 드러나지만, 선배 게이샤인 미요하루와 그의 보살핌을 받는 신세대 에이코와의 관계에서 더 잘 드러난다. 자신들의 처지를 잘 아는 미요하루는 기예와 웃음은 팔아도 자신을 팔지는 않겠다는 당돌한 에이코를 지켜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https://tv.kakao.com/v/8953006
한시에 그려진 기생들의 우정은 한결 밝고 낭만적이다. 팔선루에 모인 열다섯 살부터 스무 살 남짓한 기생들은 자신들이 의리는 친구와 같고 정은 형제와 같다고 자부하고(‘八仙樓集序’), 서로 떠나온 거리와 나이를 합쳐 동질감을 고취시켰다. 또 이백이 흠모했던 천모산 신선을 떠올리며 천상에서 내려온 여덟 선녀(八仙)로 자처했다.
제도적 질곡 아래서도 팔선루의 기생들은 연대 의식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긍정했다. 그들의 수계는 남성 문인을 흉내낸 것이지만 우정을 통해 고난과 불행에서 빠져나오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박영민) 그들의 시는 후일 모임의 막내 소운의 연인인 미산거사의 도움을 받아 ‘팔선루집(八仙樓集)’이란 시집으로 엮어진다. 기생들의 희귀한 모음 시집을 통해 그들만의 우정을 마주한다.
[출처 및 참고문헌: < 동아일보 2023년 07월 20일(목)|문화 [한시를 영화로 읊다]〈62〉기생의 우정(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Daum · Naver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