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요한계시록은 상징의 책이다. “지시하신 것이라- 알게 하신 것이라”(1절)로 번역된 헬라어가 “상징으로 기록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그 내용이 거의 성경에서 사용되는 상징을 담아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계 1:7). 이 표현이 자연적인 하나의 사건을 뜻하는지 아니면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살펴야 한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표현은 이곳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기록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야웨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사 19:1).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한다. 이 말씀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성취되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구름을 타고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일은 없었다.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하나님께서 구름을 타고 임하신다고 표현한 것이다. 성경에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임하신다)라는 표현은 결정적인 심판에 대한 전용어이다. 문자적인 사건이 실제로 발생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만약 그러하다면 과거 역사의 한 시점에서 애굽에 하나님께서 구름을 타고 임하시는 일이 발생하였어야만 하지만 그러한 일은 없었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어느 특정한 백성들에 대한 주 예수님의 심판하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구름도 상징적인 표현이다. 성경에서 구름은 천사들에 대한 상징어로 사용되고 있다. 구약 시대에는 천사를 통하여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다. 생명의 물인 하나님의 말씀 전달자가 천사이다. 이는 구름에서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은 성격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수행원이다. 주 예수님께서 천사들을 대동하고서 심판을 수행하신다는 것이다.
‘보다’의 의미
주 예수님의 심판을 보고 애곡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심판을 받게 되는 백성들이 심판을 당하는 것은 심판을 행하시는 주 예수님을 보는 것과 같다. “본다”는 표현이 반드시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경우에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야웨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야웨를 우러러 봄이니라”(슥 9:1). 하나님의 역사로 된 일을 체험하는 것에 대하여서 성경은 “본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주 예수님의 강림을 본다는 것은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언급된 이들의 정체
그렇다면 여기에서 언급된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만 밝히면 된다. 각인이란 심판을 당하는 백성들 각인이다. 그를 찌른 자들이란 심판을 당하는 백성들로서 예수님을 찌른 자들이다. 역사적으로는 로마 군병이거나 아니면 유대인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도 심판을 당하는 백성들 모두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신천지에서는 이만희의 말씀이 전파될 때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각인이라고 한다. 영적 의미로 배도자, 멸망자가 그를 찌른 자라고 한다. 이만희의 사역에 반대하고 핍박한 자들이다. 이런 설명은 전형적인 끼워 맞추기이다. 상징은 인칭대명사나 형용사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는 대명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이다. 다른 대상이 될 수 없다. ‘찌른 자’에서 ‘찌른’도 실제로 찌른 이를 가리킨다. 다른 상징적인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들을 인한 것이기에 찌른 자에 해당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인 경우에 기독교회에서는 본 절을 재림에 대한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각인이 재림주이신 주 예수님의 실체를 보는 것이 되기에 찌른 자를 그와 같이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키워 맞추기이다. ‘찌른 자’는 실제로 찌르거나 찌르는 일에 동참했던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상징의 개념이 적용될 여지가 없기에 명백하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을 통하여 아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땅이란 구약 성경에서 어떤 지역을 가리키거나 언약의 백성들을 상징한다. 구약에서 바다는 이방인들을, 땅은 언약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땅이란 표현 모두가 언약의 백성들을 상징한다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때에는 땅이 언약의 백성들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상징의 책인데, ‘땅’이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면 그 의미는 언약의 백성들이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단어에서 확인된다. ‘모든 족속’에서 족속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휠레’인데, 그 의미는 지파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이 단어는 이곳 외에 14번 사용되는데(계 5:5, 7:4, 5(3), 6(3), 7(3), 8(3), 21:12), 모두 지파로 번역되어 있다. 신약 성경에서 지파로 번역된 단어도 모두 휠레이다. 그 단어들은 계시록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모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약 1:1)로 표현된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므로 바르게 번역하면 “모든 지파”가 되는데, 성경에서 유대인들이 아닌 사람들을 지파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없다.
예수님의 말씀
감람산 강화(마 24장)에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인자의 징조가 보이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30절)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족속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휠라이’(휠레의 복수형)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지파들이다. 땅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땅이고 그 의미는 그 당대의 언약의 백성들이다. 유대인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기에 그들이 통곡한다.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곧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장 7절과 같은 내용이다.
야웨의 날과 주의 날
옛 언약에 대한 주 예수님의 심판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자신의 강림을 뜻한다. 신약 성경에서 ‘주의 날’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구약 성경의 ‘야웨의 날’에 상응하는 표현이다. 야웨의 날은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심판이 집행되는 날이었다. 멸망이다. 모세 언약을 파기하시는 언약적 심판이었다. 주의 날은 야웨의 날의 최종적인 성취이다. 민족적으로 언약의 백성으로 존재하던 유대인들과의 언약을 완전히 단절하시고 하나님의 집에서 완전히 내쫓으시기 때문이다. 야웨의 날이 하나님의 강림이었다면 주의 날은 하늘과 땅의 권세가 주어지고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8).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강림이고 옛 언약의 백성들에게 최종적인 심판을 집행하시는 것이다. 주후 70년에 로마를 도구로 한 예루살렘 멸망과 돌 성전 파괴가 그 방식이었다. 열두 제자들 중에 요한은 주후 70년 이후까지 생존했다.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주의 날에 대해 계속적으로 “곧 오시리라”, “가깝다”고 한 이유이기도 하다. 주의 날을 재림이라고 보고 가깝다는 것을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벧후 3:8)을 대입하여 풀려고 하는 것은 주의 날이 말씀되어진 본문에서 의도하는 바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몇 가지 추가 글들
개혁주의의 요한계시록 풀이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두 가지이다. 미래를 말한다는 미래론이다. 바코드, 베리칩, 3차 세계대전을 말하고 있다는 주장이 여기에 해당된다. 요한계시록이 90년대에 쓰였다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돌 성전 파괴를 말씀한 감람산 강화(마태복음 24장)를 상세하게 기술하였다는 과거론이다. 요한계시록이 60년대에 쓰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둘로 나뉘는데, 철저한 과거론과 부분적 과거론이다. 후자는 지금 이후의 예수님 재림에 관한 내용이 요한계시록 20장 이후에 있다는 입장이다. 나는 이 입장을 따르며 <신천지의 과대망상>에서 어느 정도 설명하였다.
주 예수님의 실체를 보는 재림이라고 말하면 신천지에 빠진 이들을 건져내기 어렵다. 그들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표현이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을 굳게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표현이 상징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본 구절을 재림이라고 보고 바코드, 베리칩, 유럽 연합, 3차 세계 대전 등을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다고 하면 신천지에 빠진 이들을 건져내지 못할 것이다.
이사야 19장이 이사야 당대에나 직후에 이루어진 일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19장에는 야웨께서 보내시는 구원자를 보내셔서 애굽인들을 살리실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20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인데, ‘그 날에’로 시작된다. 같은 날을 가리키기에 이사야 19장이 그 이전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날에’는 같은 시대라는 의미로만 사용하지 않는다. 11장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사는 평화의 나라에 대해 기술한다. 12장에는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이사야 찬송이 기술되었다. 전혀 다른 시대이다. 그런데도 ‘그 날에’로 12장이 시작되었다. ‘그 날에’를 같은 시대로 보면 예수님 시대에 하나님께서 애굽을 치는 심판을 행하신 것이 된다. 예수님의 시대에 무슨 애굽에 대한 심판이 있었단 말인가?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