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산업미술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공업디자인을 전공했다. 미국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 대학원에서 두 번째 석사를 취득하고, (주)대우전자 디자인연구센터에서 근무했다. 현재 한성대학교 제품디자인전공에 재직 중이다.
디자이너, 이탈리아가 가진 창의성의 원천을 찾아 여행을 떠나다
이탈리아의 본질을 찾아가는 느리고 깊은 여행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디자인을 가르치는 교수가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패션과 명품의 나라로 여행을 간 디자이너에게 그 나라의 디자인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책은 이탈리아 디자인 기행이 아니다. 이탈리아인들의 일상으로 들어가 깊이 있게 관찰하고 진솔하게 그려 낸 이탈리아 문화 스케치이다. 저자가 보고 싶었던 것은 이탈리아의 디자인 자체가 아니라 ‘이탈리아 디자인을 탄생시킨 이탈리아라는 나라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 책 《슬로우 이탈리아》는 저자 문찬이 밀라노에서 시칠리아까지 열네 개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이탈리아의 공기를 만끽하고 이탈리아 사회의 소소한 모습들을 포착한 여행의 기록이다. 디자이너의 눈에 비친 이탈리아인과 이탈리아 문화를 이야기하면서 그 속에서 그들이 가진 창의성의 원천을 찾아내려는 동기에서 시작된 이 여행은, 점점 깊숙이 이탈리아 사회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배운 여유와 비움의 가치를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탈리아와 한국을 대비시켜 잡아 낸 주제들이 생각거리를 던져 주는 동시에, 까칠하고 빠릿한 한국인이 여유 있고 느릿한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깨알 같은 재미를 준다. 디자이너인 저자가 손수 그린 일러스트는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느슨하지만 철저한, 불편하지만 행복한 나라 이탈리아에서
그려 낸 유쾌하고 쿨한 이탈리아 문화 스케치
고대 세계의 중심이던 로마, 물의 도시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 세계 패션의 중심지 밀라노, 그 외 아름다운 풍광을 대표하는 토스카나 지방과 마피아의 섬 시칠리아까지, 이탈리아는 나라 전체가 관광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와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많은 이 축복 받은 나라는 우리가 선호하는 관광지 리스트에도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그 결과 어디를 가든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 없고, 당연히 도둑과 불친절과 바가지가 뒤따른다. 땅만 파면 발굴되는 유적 때문에 교통은 불편하고 준법정신이 느슨한 국민들은 탈세를 일삼는다. 수많은 관광객을 맞아들이며 바쁘게 돌아갈 것 같은 이탈리아는 사실 관광객들의 편의와 상관없이 이탈리아 국민들의 여유로운 기질에 맞춰 느긋하게 흘러간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국인들은 이탈리아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도둑과 얌체 공무원과 영악한 상인들의 좋은 타겟이 된다. 얼핏 보면 관광대국 이탈리아의 불편한 진실이라고 흥분할 만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문찬은 그게 별로 화내고 흉볼 일은 아니라고 쿨하게 말한다. 어느 나라든 사회 특성에 맞게 국민들의 의식과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이탈리아를 변호하기 시작한다. 저자 자신은 험한 꼴 안 당하고 곱게 여행을 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 역시 로마 상인에게 바가지를 쓰고 나폴리 노숙인들에게 시달리고, 기차역 역무원에게 돈을 떼일 뻔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사회가 지닌 낙천성과 곳곳에서 발견되는 국민들의 높은 안목, 즐거운 열정에 녹아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헤쳐 나온 이탈리아 사람들의 질긴 근성과 장인 정신, 긍정적 에너지에 동화되면서 이 여행은 오히려 숨가쁘게 돌아가는 우리 사회를 반추하는 기회가 된다.
느슨하고 불편하지만 호되게 당하고 떠났던 사람조차 다시 끌어들이는 마력을 지닌 나라, 그것이 문찬이 말하는 이탈리아이다. 이 책에 그려진 유쾌하고 쿨하고 때로는 엉뚱하기도 한 저자의 모험은, 이탈리아가 가진 여행지로서의 매력은 물론 이탈리아 사회의 빛과 그늘도 함께 보여 준다. 이 책을 읽고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조금 더 이해하고 여행을 간다면 보다 편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통념과는 다른 매력과 좀 더 깊은 본질을 볼 수 있는 즐겁고 뜻 깊은 여행이 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또다시 이탈리아를 찾는다. 이 느슨한 사회의 나른함을, 단단히 조여진 허리 벨트를 헐렁하게 늦추었을 때 느끼는 편안함 같은 이탈리아의 공기를 그리워하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당했다. 노련한 빌 브라이슨도 당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매일 당한다. 바로 이탈리아에서 도둑을 맞은 방문자들이다. 브라이슨은 집시 소녀에게 재킷 안주머니의 지갑을 소매치기 당했고 무라카미는 눈 뻔히 뜨고 보는 앞에서 아내의 손가방을 날치기 당했다.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그 손가방에는 부부의 돈과 신용카드, 두 사람의 여권까지 있었다고 하니 그 낭패가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모두가 공공연하게 다 아는 상식(?) 중 하나. 이탈리아에는 도둑이 많다.
「나는 이 나라를 좋아하니 훔치지 말아다오, p14」
이탈리아 사회는 적당히 대충대충 돌아가는 면모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가만히 뜯어보면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철저하다. 아니, 철두철미하다기보다는 깊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배어 있다고 해야겠다.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천재들은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고 이런 사회 전체가 만들어 낸 사람들이다. 그 비범함을 알아보고 지원하며 갈채를 보내 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빛을 보지 못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디자인의 본질, p88」
나폴리는 교통난이 아주 심각한 도시이다. 아니, 나폴리뿐 아니라 이탈리아 모든 도시가 교통과 운송에 큰 곤란을 겪고 있다. 옛날에 건설된 좁은 골목과 건물들이 국가 유산이라 구시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보니 도로를 확장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니 서울이나 도쿄처럼 지하철을 촘촘하게 설치하는 것이 대안일 것이다. 그런데 공사를 하려고 노선을 만들다 보면 어김없이 유적이 나온다는 것이다. 발굴 가치가 별로 없는 경우라면 그대로 공사를 진행하겠지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유적은 복원해서 유물을 꺼내야 할 중요한 장소로 판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공사가 중단되었겠지.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교통문제의 조속한 해결은 요원하다. 한마디로 대책이 없다. 이런 상태를 부러워해야 할지, 동정해야 할지 나도 심정이 복잡하다.
「우리는 지금 시위 중, p161-162」
경찰 A는 허리를 펴고 뚜벅뚜벅 빠른 걸음으로 자기 모터사이클로 향하는데 그 자세는 패션모델들의 워킹과 정확히 일치한다. 조금 전 흥분했던 자태는 어디로 갔는지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헬멧을 쓰면서 턱 끈을 조이고, 가죽장갑까지 침착하게 끼고 나서야 먼저 출발한 경찰 B를 따라 추격에 나서는 것이다. 감탄스러울 정도로 의연한 자태였다. 그리고 역시 폼을 잡는 것도 잊지 않는다. 멋 부리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이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경찰의 기호를 읽을 수 있었다. ‘너희들, 이제 주우~욱었어!’
「이탈리아 경찰의 자부심, p170-171」
잠시 후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보니 너무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슬며시 고개를 들고 둘러보니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남자, 여자, 할머니, 단체여행 가는 어린이들, 심지어 수녀님까지 모두가 준엄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이들의 눈빛은 분명히 나를 책망하고 있었다.
또 다시 당황스럽다. 내가 실수를 한 모양이다. 1순위가 여자이고 그 다음이 개, 남자를 사회의 맨 꼴찌로 취급하는 나라에서 내가 방금 여자를 화나게 했다. 아차, 게다가 여기는 보수성이 강한 남쪽의 시골이다. 어서 여기를 벗어나고 싶은데 기차는 왜 이리 더디게 오는 걸까.
「여행 그리고 로맨스, p232」
첫댓글 문찬 지음 / 출판사 컬처그라퍼 | 2013.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