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일선 최전방의 OP에서 근무하면서 단편소설 “벽(壁, le Mur)”을 읽은 일이 있다. 이 소설은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쟝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의 1937년 작품이다.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추운 겨울밤 눈이
많이 내려서 사위가 백색의 향연을 벌일 때 젊은 청년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스페인(Spain) 내전(內戰)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20세기 세계 제2차대전 중의 파시즘과 그 광기(狂氣)가 스페인을 뒤 덮었을 때의 풍경이다. 스페인 내전의 반역죄로 잡혀 온 톰, 후앙, 그리고 파블로는 즉결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재판 결과
를 군인 장교가 전달한다.
내일이면 사형이 집행된다. 총살형이다. 사형집행 전날인 오늘 이들 감방에 의사가 배치된다. 그리고 사형수들의 신체적 변화를 책크하게 된다. 파블로는 정신적으로 의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였지만, 신체는 전연 다른 증상을 보인다.
겨울이고 이들이 입고 있는 옷은 반 팔이니 얼마나 춥겠는가! 그러나 이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에서
나약한 인간은 의식과 신체가 별개의 것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톰과 후앙은 사형장으로 끌려갔는데 파블로 만은 장교 사무실에 불려 갔다. 그리고 장교의 제의를 받는다.
같은 레지스탕인 ‘리몽그리’의 있는 곳을 알려주면 사형을 보류하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파블로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군인 놈들 고생이나 시켜볼까?’ 그리고 아무렇게나 ‘무덤가에 가면 있을 것이라’라고 말하였다.
파블로는 30분 뒤에 사형장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게 되고 정식 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파블로는 어리둥절
하였다. 그날 잡혀들어온 빵집 주인의 말을 듣고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군인들은 무덤에서 ‘리몽그리’를 발견하고 사살했다는
것이다. 파블로는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정말 농담으로 군인 놈들을 골탕 먹이려고 한 말이 동지의 죽음으로 연계되었다.
어처구니없는 현실이다.
인류는 산업혁명을 통하여 문명을 발전시켰고 이런 문명은 분명 합리주의에 의한 것이고 추구하는 바는 인류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세계 제1차, 제2차대전을 치르면 인간성 말살과 인간 실존의 상실을 가져왔다. 세계 제2차 대전에서 희생된 사람은
대략 7,500만 명이라고 한다. 싸움터에서 죽은 군인이 아니고 대부분이 민간인 학살이었다. 수천만 명이 홀로코스트(holocaust, 유대인 학살)를 포함한 제노사이드(genocide, 계획적 대량학살), 기아, 학살, 질병 등으로 사망했다.
인간의 문명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사악한 권력 추종자들에 의해서 대량학살이라는 웃지 못할 범죄를 저지르게 하였다.
인류의 문명은 사회 뿐만이 아니라 자연,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구에 대해서도 잘못을 저질러 왔다. 인류의 문명은 분명 인간의
삶의 질을 높여왔다. 그러나 그들의 욕심은 한계를 넘어섰다. 인간은 지구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자연을 파괴해왔다.
병든 지구는 아름다운 별이 아니다. 그리고 치유가 불가능한 한계선을 곧 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요한 록스트룀(Johan Rockstrom)과 오웬 가프니(Owen Gaffney)는 2021년 그의 저서 Breaking Boundaries에서 2030년을 마지막 한계선으로 보고
그 안에 실현 가능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명의 발달은 우리사회에 많은 아노미 현상을 불러왔고 또 다른 면에서는 우리가 사는 집, 지구를 병들게 하였다. 알았든 몰랐든, 의도적이었든 무 의도적이었든 인류의 문명은 인류를 위기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현상이 파블로의 허탈한 웃음을
자아낸 배신으로 끝나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파블로는 무의식적, 무의도적 행위로 동지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인류는 문명이라는 이기를 통해서 더 욕심을 키워갔다. 그 결과는 분명하다. 우리 후세대들은 그들의 선조가 지은 죄과를 어떻게 받을 것인지, 두렵다. 자연의 질서(사회질서를 포함해서)를 파괴하면 그것은 곧 재앙이고 죽음이다. 인간은 그 한계선을 넘어서는 아니 된다.
성경으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제자들의 배신행위는 어떠했는가? 베드로는 예수의 수 제자이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신앙고백도 하였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는 반석으로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을 받고 계실 때 세 번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통곡을 했던 모양이다. 선생에 대한 믿음은 있었지만 상황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부인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고 돌아서는 계기가 있었다.
또 다른 이야기는 가룟 유다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팔았다. 그는 몇 년이나 추종하던 선생님을 왜 팔았을까? 지금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지만 궁금하다. 돈이 필요했을까? 단돈 은 30개에 선생을 팔아버릴 정도로 돈이 필요했을까?
혹시 제자들 사이에 따돌림을 받았을까? 그가 원한 것은 지상에 이루어질 메시아왕국이었는데, 그리고 한자리하려 했는데,
지금 죽는다니 어찌하겠는가? 시험해 보기 위해서일까? 기대가 무너질 때 허탈한 심정이 그를 공황상태로 만들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나를 팔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잡아주는 앞잡이가 되어서 감람산 골고다에 이르렀고 선생 예수에게 입맞춤한다.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 배신(背信)이다. 가룟 유다는 선생 예수를 배반(背叛)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살한다. 상황이 종료되었다.
파블로의 배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졌고 상황도 곧 종료되었다. 그래서 그는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배드로는 순간적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배신이었으나 곧 깨닫고 회개의 통곡을 하였다. 그리고 원래의 자신 위치로 돌아가려고 노력을 한 경우이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계획된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자살한다. 이로써 상황이 종료된다.
원상태로 회복된 경우는 베드로뿐이다.
배신(背信, betrayal)은 가끔 배반(背叛, betray)과 혼용해서 쓰기도 한다. 사전적으로 배신은 믿음과 의리를 저버리고 돌아섬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사회의 질서를 무너지게 하는 행위라고 보인다. 질서 안에서 조화를 이루려면 이런 행위는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는 수많은 배신이 있을 수 있다.
인류가 대자연에 대한 배신은 다음 기회에 한 번 더 말하고자 한다. 파를로와 같은 배신은 의도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 누구를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불행한 일이다. 가룟 유다는 의도적이었고 계획적으로 배신을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선생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불행한 일이다. 더 불행한 것은 유다는 잘못을 깨달았을 때 자살한다.
그에게는 회복(resilience)의 기회가 없었으니 참 불행한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이다. 비록 배신했을지라도 잘못을 깨달았으면
돌이키고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베드로의 배신은 즉시 깨닫고 돌이킨다. 이런 경우 회복(resilience)이 가능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영적 재생(regeneration)을
하게 되고 정상 상태에 이르면 재순환(recirculation)이 이루어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베드로는
선생을 배신했지만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말년에 로마에서 순교하게 된다.
2023년 9월 24일(일)
김정권
대한예수교 장로회
대구침산제일교회 원로장로
대구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