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곳이 동방과 서방의 무역 교차로라는 사실을 즉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1180년경 이 도시에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한 6만여 명의 외국인들이 도시의 상업 구역들에 살면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큰 창고와 시장들마다 갖가지 일상용품들은 물론 값비싼 비단, 아름다운 보석, 오색으로 빛나는 칠보 금속 공예품, 섬세하게 조각된 상아, 향수, 향료, 가죽 제품 등이 넘쳐났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 조프루아 드 빌라르두앵은 "이 세계를 통틀어 이토록 많은 부를 차지한 도시가 있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감탄하였다.
이 어마어마한 도시를 다스리는 책임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독, 곧 시장이었다. 황제 다음가는 제 2의 권력자인 총독은 법정에서는 최고 판관이었으며, 제조업과 무역업에 있어서는 유일한 귄위자였다. 912년 무렵 출간된 총독의 책은, 총독은 상품의 가격과 이자율, 임금은 물론 무게, 도량형을 결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 도시를 들고 나는 모든 상품들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으며, 외환시세를 조정하였고, 모든 상인들에게 무역을 할 수 있는 허용 기간을 정하였다.
수천 명에 이르는 총독 휘하의 공무원들은 상법을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에스파냐 여행가 루이 데 클라비로는 법을 어길 경우 어떤 법을 받는지 알려주고 있다.
거리 한복판에는 차꼬가 묶인 대가 굳건히 세워져 있고, 흉악범들이 묶인 채 감옥으로 이송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국은 법률의 강력한 집행으로 번성해 나갔다. 12세기 무렵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한 곳에서 거둔 관세만으로 현 시세로 약 2000만 달러의 금이 황실 금고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역사가들 중에는 제국이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무역의 자유화와 총독 권력의 부패에서부터 그 원인이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다.
1) 황금만큼 중요한 비단
1042년 부활절 날 새 황제 미카일 5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가를 행진할 때 온 도시는 축제에 빠져들었다. 거리는 수많은 군중들의 물결로 덮였고, 상인들은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부터 황궁에 이르는 그 먼 길에 자주색 비단을 깔았다. 자주색 비단은 제국법에 따라서 오로지 황족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제국에서 가장 귀중한 상품인 비단은 황금과 동일한 가치를 지녔다. 총독은 비단 생산자와 상인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비단 생산에 관여하는 길드는 수입자, 상인, 마무리 직공, 비단 직조인, 비단 제작자 등 오직 5개만이 허용되었다. 비단을 투기매매하거나 법이 정한 이상의 이익을 남기거나 자주색 비단을 황제의 대리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파는 일은 불법이었다. "비단 상인은 자주색으로 특별하게 염색된 비단을 도시의 이방인에게 팔아서 제국 밖으로 수출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를 어긴 자는 채찍질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법령은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최초의 비단은 매우 단순한 형태였지만, 6세기 경에 이르면 제국의 비단 직조인은 여러 실들을 섞어 패턴을 반복한 훨씬 복잡해진 문양의 비단직조기술을 발전시켰다.
14세기에 이르면 비단 직조 기술은 한층 더 진일보해서 은사와 금사를 섞어 질감이 더욱 풍부해지고 문양도 복잡해진 브로케이드의 발달을 이끌어 냈다. 귀족을 비롯한 상류 계층은 비단 커튼이나 소파 덮개로 실내를 장식하였으며, 비단 옷을 입는 사치를 누릴 수도 있었다.
2) 장신구와 성물에 쓰인 상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41년 개혁의 일환으로 많은 관직들을 폐지하였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제국의 집정관은 장인들에게 딥티크를 종종 주문하였다. 딥티크는 2개의 상아 현판을 경첩으로 연결하여 접을 수 있는 화판으로, 보통 한쪽 면에는 집정관의 얼굴을, 그 반대쪽 면에는 풍경이나 비명에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이런 딥티크는 집정관이 자신의 지위가 상승했음을 친구들에게 알려주는 정교한 명함 구실도 하였다.
공동 황제 테오도시오스 2세와 발렌티니아노스 3세가 테오도시오스 법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던 429년처럼 이른 시기부터 법전에는 종교적 예술품과 세속적 세공품에서 상아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한 자세한 규정이 들어있었다. 이 법전에는 상아 조각가가 기술의 연마 및 전수를 할 수 있도록 다른 일꾼들에게 부과된 시민의 모든 의무를 면제한다고 명시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인도산과 아프리카산 상아들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며, 7세기 전까지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쌌다. 그러나 619년 알렉산드리아 항구가 페르시아인들의 손아귀에 떨어지자 제국은 상아를 실어오던 캐러밴들과 상인들의 연결망을 잃게 되었고, 이로써 제국의 상아 조각품 제작은 일순간에 중단되었다. 그 후 9세기 말엽에 이르러서야 상아 무역이 재개되기는 했지만, 이 때는 상아가 너무 귀해서 제국의 상징물과 종교 작품에만 사용할 수가 있었다.
3) 최고의 금은 세공품
제국의 금화는 1000년 동안 국제 외환의 표준으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귀중한 금속으로 만든 다른 물건들도 시장에서 현금과 같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예를 들어 은 그릇과 은 술잔 등의 은 제품은 러시아, 시리아, 스칸디나비아 등과의 교류에서 안전한 공채로 이용되었다.
제국의 어디서건 부유한 가정에서는 은으로 만든 수저, 책 표지, 가구를 사용하였으며, 교회의 제단 위에는 은 성잔과 파테나 등 전례용 은 제품들이 올라갔다. 금은 메달이나 가정용 접시는 물론, 전례 시 사용하는 용기들로 만들어졌다. 황제는 커다란 황금 접시로 식사를 하였다.
제국의 교환 가치로서 금과 은의 순도를 보장하는 문제에 대한 황제의 관심은 매우 지대해서 총독의 책에는 경화를 녹여 다른 물건을 만들면 누구든지 손이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은 세공인은 자신의 집이 아닌 메세에 있는 공방에서, 그것도 검시관들의 철저한 감시를 받으며 일을 해야 했다. 금 세공인은 한 번에 1파운드 이상의 금을 구입할 수가 없었다. 이런 강력한 규제로 AD 300년~700년 사이에 만들어진 제궁의 은 접시는 98%의 순도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제국이 자랑하는 가장 정교한 금속공예는 뭐니뭐니해도 황금과 칠보공예이다. 이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바로 팔라도로(paladoro)인데, 황금과 에나멜, 진주, 보석들로 만들어진 이 제단의 장식은 찬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 『음모와 반역의 천년 제국사』 중에서
첫댓글 끝이보입니다
뭔가 안타깝군요... ^^ 다는 안봐도 재밌게 보고 잉능뎅 끝나가다니...
한국도 저때즈음 많이 사치스럽게 놀고 그러지 않았나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