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기스게에 글을 처음 써보는 장기눈팅회원입니다.
어제 한기주 선수가 오랜 재활을 마치고 예전 등번호가 아닌 17번 - 현 조계현 수석코치의 현역시절 등번호-을 달고 돌아온 장면을 보고 급울컥해서 글을 올려 봅니다.
조계현 수석코치는 제가 야구라는 스포츠에 관심과 애정을 가질 수 있게 해줬던 분입니다. 제 어머니께서 고향이 군산이시고 당시 군상상고의 열정적인 팬이셔서 제 온전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최초시청 야구경기가 당시 조계현/장호익/백인호 트로이카가 활약하던 군상상고의 경기였습니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체구도 작은 선수가 시원시원한 강속구를 포수미트에 공격적으로 꽂아 넣던 모습이 아직도 제 기억 속에 선합니다.
그러던 조계현 선수가 한일야구 정기전을 마치고 어깨에 보조깁스를 하고 귀국하던 모습을 신문지상을 통해서 봤던 기억이 남아 있고, 또한 대학졸업을 마치고 빨리 프로에 입단하길 바랬는데 88년 서울올림픽 참가를 위해 입단이 1년 유예되고 (당시 올림픽에는 프로선수 출전이 불가했습니다) 농협에서 실업팀 생활을 1년 더 한다는 소식에 실망했던 기억도 남아 있습니다.
드디어 조계현선수가 1989년에 프로에 등장합니다. 당시 해태팬들은 이광우/이강철/조계현의 대표팀 트로이카가 입단해서 기존의 선동렬 선수와 무적의 투수왕국을 이루기 시작할거라는 기대감이 컸습니다. 저 또한 친구들에게 제 우상 조계현에 대해 설레발을 쳤습니다. 그런데 프로에 온 조계현 선수는 제가 기억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작은 체구지만 역동적인 투구폼에서 나오던 강속구가 사려져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150km를 상회하던 강속구는 볼 수가 없었고, 직구가 간신히 140km정도 나오는 평범한 구위를 가진 투수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입단 동기인 이강철/이광우에 비해 김응룡 감독의 신뢰도 얻지 못했고 기존의 선동렬/김정수/문희수 등에 밀려서 선발로테이션도 거르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 기대와 기다림이 컸던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다들 예상하시듯이 조계현 선수는 고등학교/한일정기전 국가대표/연세대/농협에서 말 그대로 혹사를 당했던 것입니다. 어깨와 팔꿈치가 거의 재기 불가 상태로 프로에 왔던 겁니다. 안쓰러움이 있었지만 제 어릴적 우상의 달라진 모습, 그것도 실망스런 모습에 점차 관심이 멀어져갔습니다.
그러던 조계현 선수가 우리 나이 서른살인 93년 "싸움닭" "팔색조"라는 별명과 함께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당시는 지금과 다르게 대다수 선수들의 쇠퇴 및 은퇴시기인 서른살에 또 다른 전성기가 찾아옵니다. 93년/94년 다승왕과 95년 방어율왕을 차지한 타이틀 홀더로서 뿐만 아니라 선동렬선수가 92년 건초염 발발 이후로 마무리로 옮기면서 해태의 선발에이스 역할을 합니다. 당시 엘지의 김태원 선수와의 라이벌리는 해태와 엘지팬 모두에게 정말 대단했던 추억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시절의 불꽃같은 강속구는 사라졌지만 딜리버리의 순간까지도 직구인지 변화구인지도 구분이 안 되는 디셉션과 지저분한 공끝, 그리고 절대 피하지 않는 투쟁심으로 화려하게 돌아온겁니다.
IMF로 해태가 부도가 나면서 조계현 선수는 삼성으로 적을 옮기고 후에 두산으로 옮겨서 2001년 두산의 유니폼으로 은퇴를 합니다. 다행히 두산시절 잠실에서 마지막 선발등판을 직관할 수 있었습니다. 제 어린 시절 영웅의 뒷모습에 울컥했었습니다.
조계현선수와 마찬가지로 고교시절 혹사의 희생양 - 사실 조계현선수나 한기주 선수는 이 희생양이라는 말을 싫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정말 H2의 히로처럼 야구가 좋아서 던져대던 야구바보들일테니까요 -이었던 한기주선수가 오랜 재활을 마치고 조계현의 등번호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조계현이 부활했던 서른보다 한 살 어린 스물 아홉의 나이로 말입니다. 155km를 상회하던 강속구는 사라지고 140km를 간신히 넘는 직구를 가지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뒷 모습에서 조계현의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한기주 선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첫댓글 조계현 정말 훌륭한 투수였죠. 당시 해태에이스면 말다한거죠. 한기주선수는 잘하진 못해도 부상없이 꾸준히 등판만 해도 바랄게 없네요
예 64년생 조계현 선수가 2001년우리나이 38에 은퇴했으니까 기주선수도 10년만 건강하게 더 던졌으면 좋겠습니다
조계현은 어렸을때 해태에서부터 봤던지라 원래부터 변화구위주의 컨트롤로 승부하는 선수였던줄 알았는데 고등학생때 이미 150이상을 뿌리는 파이어볼러였군요. 최정상권 1선발로 오랫동안 활약했던 것이 더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당시 엘지의 김태원, 정삼흠하고도 자주 맞대결했었는데 투수전 양상으로 가다가도 한끗차이로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은 어렴풋한 기억이 나네요.
당시 조계현 VS 김태원의 잠실경기는 무조건 직관이었죠. 덕분에 출석 빵꾸가 매우 심하긴 했습니다.
한기주에겐 서현만 있으면 꾸준히 던질 힘이 나질않을까요.. ;
조계현 코치님에게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저 당시에 강속구라면 보통 144 정도였을텐데요. 빨라봐야 147-8 정도? 조계현이 150대 나왔던 것 같진; ;
뭐 고교시절 속구파 투수였다가 대학 실업 거치면서 강속구 잃고 변화구 투수되는 경우는 많았죠. 당장 엘지감독 양상문이 한 예겠군요.
제 어린시절 기억이라 왜곡됐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데로 부산고 양상문도 그렇고 후에는 경남고 차명주 대전고 구대성 등등...좌완 파이어볼러들이 특히나 혹사가 심했던 것 같습니다
@Good Bye Kobe 조계현 선수 어깨 부상후에도 145 정도는 던졌습니다. 물론 보통은 130 후반에서 140 초반 이었지만 말이죠.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은 150 가까이 던지던 파이어볼러였죠. 제가 가장 좋아하던 투수였기에 답글 달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