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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代祠廟信仰의 類型과 展開樣相
金 相 範*
目 次
1. 서언
2. 국가제사형 사묘
3. 준국가제사형 사묘
4. 순수민간형 사묘
5. 결어
中文提要
1. 서언
중국인의 전통적인 종교신앙문화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타이완이나 홍콩지역을 지나다 보면, 불교나 도교와는 다른 계통의 신들을 主神으로 섬기고 있는 크고 작은 종교 건축물들을 도처에서 접하게 된다. 기층행정단위의 수호신적인 역할을 하는 土地公를 비롯해 ?祖神ㆍ關羽神ㆍ東嶽神ㆍ城隍神等 다양한 神性과 能力을 갖춘 것으로 믿어지는 수많은 신들이, 흔히 “祠” 혹은 “廟”라 칭해지는 장소에서 기층민들에 의해 폭넓게 숭배되고 있다. 春節ㆍ端午節ㆍ仲秋節 등 일반적인 명절 외에도, 마을 앞 공터나 가두에서 거의 매일같이 접할 수 있는 축제의식과 퍼레이드 역시 실은 이러한 사묘신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렇게 볼 때, 祠廟信仰이라는 것은 단순한 신앙의 차원을 넘어 중국인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 중국인의 기층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인의 이러한 사묘신앙은 언제부터 어떠한 전개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을까? 宋元이래 대다수 地方志의 編者들은 한 지역의 종교예배장소를 보통 佛敎寺院ㆍ道敎宮觀과 祠廟로 나누어 기술하곤 했다. 이렇게 볼 때 宋代에 이르면 祠廟 가 당시 지역社會에 있어서, 佛寺ㆍ道觀以外의 제3의 宗敎예배장소로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卽 불교, 도교 등 所謂 制度化(institutionalized-religions)宗敎와 더불어 민간에 있어서 중요한 신앙의식의 거점으로써 한 축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몇몇 학자들은 송대를 사묘신앙이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기고 있다. 9-10세기이래 불교와 도교가 쇠퇴기에 접어들게 됨에 따라 민간의 토착신앙이 유교와 더불어 약진을 하게 되었다는 의견이다. 물론 唐宋變革期에 일어난 급속한 社會ㆍ經濟적인 변화가 民間祠廟信仰의 전개에 있어서도 질적, 양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했음은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唐代의 民間에 불교와 도교이외의 다른 종류의 신앙체계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송대 이후에는 지방지?통속문학작품등 기층민의 생활을 전해줄 수 있는 여러 자료들이 급격히 증대하는데 반해, 당대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자료라는 것이 주로 정치사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함께 고려해 보아야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唐의 중앙정부와 지방관들에 의해 주도된 인가되지 않은 祠廟 즉 淫祠에 대한 대규모의 禁毁조치는 주목할만하다. 우선 狄仁傑은 垂功4년(688)에 江南安撫使에 취임하여, 강남지역에서만 무려 1700餘個所의 淫祠를 폐기시켰으며, 長慶2년(822)에는 李德裕가 浙西觀察使로 부임하여 浙西四郡내에서만 1010餘個所의 淫祠를 폐지시키기도 하였다. 唐代에 진행된 淫祀禁毁 조치로는 이 두 사건이 널리 인구에 회자되지만, 唐太宗이 武德9년(626)에 이미 相關詔勅을 반포한 적이 있으며, 高宗시기에 張文琮, 玄宗시기에 韋景俊, 德宗연간에 于?, 代宗시기에 羅珦, 宣宗시기에는 韋正貫 등 적지 않은 지방관들이 각자 부임지에서 淫祠를 근절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國史補』에는 매년 해당 관리들이 행해야 하는 제사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매 鄕과 里마다 반드시 祠廟가 있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위에서 언급한 淫祠 외에 당시 국가제사체계에 속하면서도 官民이 함께 제사를 받들었던, 嶽海鎭瀆ㆍ名山大川ㆍ歷代帝王ㆍ先賢 등의 합법적인 祠廟까지 합친다면 唐代 민간에는 상당수의 祠廟가 존재하였고, 이러한 祭祀場所는 기층 민중들의 신앙활동에 있어 중요한 據點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唐代이전의 祠廟信仰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 사묘신앙의 起源과 演變문제 외에도, 國家權力과 祠廟信仰과의 관계, 도교ㆍ불교 등 기성종교와 祠廟信仰과의 상호영향 및 결합, 충돌의 문제, 村落共同體와 祠廟信仰과의 관계 등 많은 부분이 연구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本稿는 우선 가장 기초적인 작업으로, 불교와 도교의 전성시대로 불리는 唐代의 基層社會에 도대체 어떤 종류와 유형의 사묘가 유행하였는가를 살펴보고, 사묘신앙의 역사적인 전개과정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들이 국가권력과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정부의 대응은 향후 民間祠廟信仰의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民間信仰의 유형에 대해 宗敎史學者들이나 民俗學者들은 숭배대상의 특성에 따라 自然神崇拜?祖先崇拜?人鬼崇拜 等으로 분류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分類方法은 祠廟信仰의 전개과정 속에 보이는 歷史적인 의의를 분석해내는데 한계가 있다. 이런 까닭에 本稿는 祠廟信仰과 國家禮制간의 關係를 위주로 唐代의 祠廟를 國家祭祀型?準國家祭祀型?純粹民間型으로 분류하여, 國家權力과 祠廟信仰과의 상호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국가제사형 사묘
본문에서 말하는 國家祭祀型祠廟는 唐代國家祭祀體系에 속하거나 이에 상응하는 조정의 인가 하에 正式으로 國家의 管理를 받는 祠廟를 지칭한다. 唐禮의 規定에 따르자면,唐代의 國家祭祀는 種類도 많고 매년 행해야 하는 제사의 횟수도 적지 않은데, 기본적으로 祭祀對象에 따라 大ㆍ中ㆍ小 三祀로 나누어진다. 이중에서 中祀에 속하는 先代帝王, 嶽鎭海瀆과 小祀에 속하는 山林川澤은 唐代에 이르면 이미 祠廟形態의 固定된 祭祀場所를 갖게 되고, 점차 官民이 함께 숭배하는 特性을 갖게 된다. 이런 까닭에, 禮制上의 運用原理와 禮制자체의 變化는 唐代民間祠廟信仰의 전개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상대적으로 禮制理論의 外延에 있어 이러한 國家祭祀型祠廟 역시 점차 民間信仰的인 性格을 자연스레 흡수하게 된다. 필자는 嶽鎭海瀆과 山林川澤을 모시는 곳을 自然神祠廟로, 先代帝王부분은 후에 前代의 聖王이외에 賢臣이 제사의 對象으로 첨가되기에 聖賢祠廟로 나누어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자연신 사묘
우선 자연신에 대한 국가제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嶽鎭海瀆과 山林川澤제사의 기원과 연변에 관해 간술해보면, 이러한 제사는 商代의 卜辭資料가운데 이미 빈번하게 출현하지만, 周代에 이르면 신격에 변화가 발생하는데, 점차 社會적 성격이 강화되어 地域保護神적인 特徵을 갖게 되고, 一般的인 宗敎活動으로의 성격 뿐 아니라 等級制와 分封制를 강화하는 手段으로 이용된다. 秦始皇은 天下를 통일한 後,즉각적으로 統一國家에 부응하는 祭祀體系를 건설키 위해 民間과 諸侯들의 祭祀權을 회수하여,皇帝權力을 기초로 諸神의 등급을 다시 정리 조정케 했으며,全國各地의 지방관들에게 當地 山川神을 제사 지내도록 명했다.
漢代에 이르면 산천제사에 있어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생기는데, 宣帝神爵元년(B.C.61)에 이르면,五嶽四瀆의 제사가 正式으로 祀典에 편입 常禮化되어,泰山과 黃河는 매년 다섯 차례, 江水는 매년 네 차례, 그 밖의 것은 매년 세 차례 제사 드린다고 규정하였다.또한 郊祀制度가 점차 完備됨에 따라,五嶽四瀆을 위시한 山川祭祀 역시 점차 郊祀制度의 일부로 편입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周代 ?望祭?의 傳統을 계승했다는 측면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점차 人格神적인 特性을 상실하고, 추상적 의의를 증가시키게 되었다. 好幷隆司氏는 이점에 대해,禮制化의 進展이 山川神 神性의 抽象化를 불러 일으켰고, 이로 인해 民衆들은 점차 이러한 祭祀를 이탈하여,合法적인 與否를 불문하고,地方官을 숭배하는 祠廟나 국가로부터 승인을 얻지 못한 淫祠等 人格神崇拜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後漢時代에 널리 流行한 城王景王祠는 그 대표적인 例 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山川祭祀가 주로 壇祭의 형식으로 제사를 드리는 郊祀에 편입되었다고 해서, 이 시기에는 山川神을 제사 드리는 고정된 가옥형식의 제사장소 즉 “祠廟”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자연신 숭배에 있어 이러한 山川神들을 인격신으로 여기고 祠廟形態의 祭所에 모신 것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漢書地理志』에는 당시 泰山郡에 泰山廟,穎川郡에 太室?少室山廟, 廣陵國에는 江水祠, 左馮翊에는 河水祠가 있었다고 기재하고 있다. 이렇게 비교적 知名度가 높은 山川神 外에도,全國各地에 수많은 山川廟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郊祀制度의 중요성이 점차 증대되면서, 이러한 祠廟에서 이루어진 祭祀活動은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國家차원에서 山川神 等 自然神제사를 祠廟에서 드리는 방식에 정식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北魏時代 이후의 일로 여겨진다. 『魏書ㆍ禮志』는 泰常三년(418)에,首都 附近의 祭地에 五嶽四瀆을 제사드리는 廟宇를 건립하였고, 지방에는 324개 所의 현지 自然神을 제사 드리는 廟宇를 지정하여 每年 十月에 禮官을 파견 祭祀儀式을 주도케 하였으며, 太延元년(435)年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명의로 ?嶽?華嶽?嵩嶽等 五嶽神의 所在地에도 祠廟를 두고 관리하였다고 명기하고 있다.이러한 추세는 隋代에 이르면 더욱 擴大되는데,諸鎭과 南海?東海 等 其他 自然神의 소재지에도 政府주도하에 祠廟를 설립하였고, 附近의 巫師 한 명씩을 뽑아 祠廟의 管理를 책임지게 하였다. 이렇게 전반적인 추세를 보면 北魏이래 국가제사차원에 있어서 祠廟에서 드리는 자연신제사가 점차 중요성이 증대되게 된다.
그렇다면,唐代에는 山川祭祀에 어떠한 변화가 생겼을까? 이러한 변화는 어떠한 意義를 지니며, 이후 民間祠廟信仰의 전개에는 또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 唐初 國家祭祀 차원의 山川祭祀는 대략 비정기적인 것과 정기적인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비정기적인 祭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天災地變이 발생할 때 거행되는 것으로,京師지역에 孟夏以後에도 旱災가 발생하면, 우선 北郊에서 望祭의 형식으로 嶽瀆鎭海와 山林川澤의 신께 비를 내려줄 것을 기원하고, 계속해서 社稷과 宗廟에서 다시 기우제를 지내는데 七日을 한 주기로 삼는다. 만약 여전히 비가 내리지 않으면,嶽瀆神을 시작으로 다시 제사를 드리고, 가뭄이 아주 심할 경우에는 大雩禮를 거행한다. 또 다른 비정기적인 제사는 皇帝의 巡狩중에 名山大川을 지나게 될때 官吏를 파견해서 드리는 제사이다. 永徽年間에 반포된 祠令에 따르면 이때 嶽鎭海瀆의 신에게는 大牢, 中山川에는 少牢, 小山川에는 特牲의 예우로 희생을 드린다.
定期的인 祭祀는 祭祀場所에 따라,郊地에서 거행하는 祭祀와 嶽瀆鎭海의 所在地에서 시행하는 祭祀로 구분할 수 있다. 郊地에서 거행되는 山川祭祀는 百神중에 하나의 名目으로 或은 地祇의 附屬神적인 성격으로 제사를 받는 것인데, 기본적으로 漢代이래 郊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通典, 禮六, 沿革六』편에 따르면 嶽鎭海瀆의 所在地에서 거행되는 山川祭祀는 東嶽 泰山은 ?州에서, 東鎭 沂山은 沂州에서;東海는 萊州에서;東瀆淮水는 唐州에서, 南嶽衡山은 衡州에서;南鎭會稽山은 越州에서;南海는 廣州에서;南瀆 大江은 益州에서 각각 제사 지낸다. 또한 中嶽嵩山은 洛州에서, 西嶽華山은 華州에서;西鎭吳山은 ?州에서;西海와 西瀆大河는 同州에서, 北嶽?山은 定州에서;北鎭醫無閭山은 營州에서;北海와 北瀆濟水는 洛州에서 제사올린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때 當地의 都督과 刺史가 祀官을 兼任하게 되고, 祭祀는 傳統 望祭의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祭壇에서 거행된다. 이렇게 보면 정기적, 비정기적인 것을 불문하고 唐初의 모든 산천제사는 대부분이 望祭의 형식에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唐代에 있어 국가제사 차원에서 祠廟에서 드리는 산천제사가 정식으로 채택되는 것은 武則天의 時期이다. 垂拱4년(688) 4월에, 洛水에서는 돌위에 “聖母臨人,永昌帝業”의 예언을 새긴 ?寶圖?가 발견되었다. 武則天은 이에 우선 郊祀典禮를 거행하여 至上神 昊天上帝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린 후에,스스로 ?聖母神皇?의 尊號를 더하고, ?寶圖?를 하늘이 내린 天授寶圖라 칭했으며,年號 또한 예언에 보이는 바처럼 ?永昌?이라 개명하였다. 이어서 武則天은 洛水神에 ?顯聖侯?의 봉호를 내리고,附近의 神嶽 嵩山神은 天中王 에 봉했으며 이들 신을 모시는 祠廟를 건립하였다. 사실 이 사건은 武則天의 조카인 武承嗣가 武后에게 황제즉위의 구실을 提供키 위해 날조한 政治적인 事件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국가차원에서 山川神에게 廟宇를 건립해주고 封號를 내린 일은 禮制理論과 民間祠廟信仰의 전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에 대해 禮學大師로 칭해지는 秦蕙田도 “山川의 神에게, 人爵封號를 더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는바, 非禮의 시말을 연 자가 바로 武則天이다.……고대의 四望山川에 대한 제사는, 壇은 있으되 廟(屋)는 없었는데, 廟號로 바꿨으니 옛것이 아니다.……”라고 비평하고 있다.
비록 玄宗은 卽位初期에 顯聖侯廟를 일시적으로 철폐시키지만, 전체적인 추세로 볼 때, 玄宗以後 唐朝의 皇帝들은 基本적으로 武則天이 몇몇 神들에게 취한 立廟와 封號의 政策을 계승 확장하게 된다. 우선 玄宗은 先天二(713)年 八月에,華嶽神을 제사드리는 廟宇의 건립을 명령하였고,華嶽神을 金天王에 封했다. 開元13년(725) 에는,泰山에서 封禪典禮를 거행한 후,泰山神을 天齊王에 봉했고,담당 官員들로 하여금 泰山神 神廟를 보수하게 하였다. 이러한 趨勢는 天寶年間 以後에는 더욱 擴大되는데, 天寶五載(746)에서 天寶十載(751)에 이르는 기간동안에,玄宗은 嶽鎭海瀆과 全國의 名山에 廟宇를 설립하고 封號를 하사하는 命令을 연이어 선포하였다. 嶽鎭海瀆에 대한 立廟와 封號의 下賜를 매듭지은 후에는, 天寶十載(751)에는 직접 皇族과 高官을 파견하여 전국의 嶽鎭海瀆廟를 제사 드리게 하였다. 사실 天寶十載에 이들을 파견하여 제사를 주재케 한 것은 같은 달에 發生한 運船의 대규모 失火事件과도 모종의 관련을 맺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사건을 통해 國家祭祀 차원의 自然神祭祀에 있어 현지의 祠廟에서 거행하는 祭祀儀式이 祭壇에서 望祭의 형식으로 山川神을 제사하는 方法보다 점차 주목을 받게됨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馬端臨은 오히려 “舊禮는 모두 郊祀禮에 따라 望祭로 올렸지만, 天寶년간에 이르러 관리를 현지에 파견해 사묘에서 제사를 올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非禮를 바로잡은 것이다”라고 칭송하였고, 歐陽修 역시 嶽鎭海瀆의 제사는 그 廟에서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天寶年間까지의 이러한 사례는 여전히 嶽鎭海瀆等 비교적 지명도가 높은 名山大川方面에 집중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唐代後期에 이르면 주목할만한 변화가 생겨나는데, 비록 小山林?小川澤이라도 백성들에게 功德이 있는 것으로만 판명되면 國家의 認可하에 立廟 或은 修廟의 機會를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江南道 福州에는 白馬三郞廟라는 작은 연못의 신을 모시는 祠廟가 있었는데, 貞元十年(794)에 심한 가뭄이 들어 관찰사가 祈雨祭祀를 드렸는데, 廟神이 이에 즉각적인 靈驗을 드러내어 비를 내리자 觀察使가 직접 本廟를 확장 수리케 했다고 한다.
또한 장안의 근처에 있는 終南山은 예로부터 京師에 가뭄이 들 때마다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린다는 전설이 전해지지만 山神을 모시는 祠廟는 없었다고 한다. 이에 文宗은 開成二年(837)에, 終南山神에게 廣惠公이라는 봉호를 내리고 당시 長安縣令인 杜造에게 명하여 산밑에 祠宇를 세우고 매년 季夏土王日일에 정기적으로 제사드릴 것을 명령하였다.
江南道 睦州에는 馬目이라는 연못신의 祠廟가 있는데 『淳熙嚴州圖經』에 따르면 唐文宗 시기에 刺史인 呂述이 建立했다고 한다. 開成年間에는 當地에 심한 가뭄이 들어 祈雨제사를 올렸는데 역시 곧바로 비를 내리는 영험을 드러내어 묘신을 위해 새로운 祠廟를 지어주었고, 이후 재앙이 있을 때마다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武則天?玄宗時期以後 國家祭祀차원의 자연신제사에 있어서, 祠廟에서 진행하는 祭祀儀禮가 郊祀의 旁系로써 郊壇祭祀에 참여하던 方式보다 점차 중요성이 증대됨을 발견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古代의 山川神은 의인화된 人格神의 神性을 가지고 있었는데,西漢末年에 山川祭祀가 抽象적 神格을 강조하는 郊祀制度에 편입된 후 점차 이러한 형상을 잃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武則天?玄宗시기의 山川祭祀에 보이는 몇몇 變化는 人格神의 形象을 갖춘 山川神의 復活로 볼 수 있다.
사실 唐代에는 많은 사람들이 山川神은 곧 人格神이라는 심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당시 人口에 膾炙되던 ?山神이 李淵의 唐軍을 陰助하는 설화에서도 ?山神의 使節이 白衣老人 卽 人格神의 모습으로 唐高祖 앞에 출현한 바 있다. 또한 唐朝가 山川神들을 위해 ?祠宇?形態의 祭所를 건립함과 거의 동시에 封號를 하사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한데, 원래 封爵이라는 것은 宗室 세력이나 國家에 커다란 공을 세운 백성들에게 내리는 것인데, 武則天?玄宗時期를 거치면서 封爵의 對象이 人界를 뛰어넘어 山川神等의 神界에 까지 확대된다. 물론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國家역시 自然神의 人格神的 神格을 인정하고 아울러 禮制에 있어서도 이에 상응하는 ?式을 찾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다.
(2) 聖王?賢臣의 祠廟
唐代 國家祭祀의 차원에서, ?祠廟? 形態의 祭所가 暴增하는것은 山川神을 위시한 自然神제사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聖王과 賢臣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祖先의 魂靈에 속하기 때문에 歷代이래로 ?廟祭? 형식의 제사가 있어왔지만,隋, 唐대에 이르면 국가차원에서 직접 관여하는 제사의 範圍가 擴大되고, 祭祀의 定期化가 이루어지는 등 몇 가지 새로운 變化가 나타난다.
먼저 聖王?賢臣祭祀의 起源에 대해 잠시 살펴보면 『吳越春秋』에는 吳王夫差가 群臣들을 거느리고, 江濱에서 伍子胥를 제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秦蕙田은 이것이 忠臣을 처음으로 제사한 사례라고 했다.또한 『史記?始皇本紀』에는 始皇재위 三十七年(B.C210)7월 출유했을 때 雲夢에 가서는 九疑山에서 虞舜에게 望祀를 드렸고, 會稽에 도착해서는 大禹를 제사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 비록 이 두 사례에는 ?祠廟?라는 말이 나타나지 않지만, 『漢書?郊祀志』에 보이는:“漢興,高祖初起……,後四歲, 天下已定, 令祝立蚩尤之祠於長安.”이나 『後漢書?章帝本紀』의:“(元和二年二月,85年),丙辰,巡狩.……使使者祠唐堯於成陽靈臺.”와 같은 기록을 보면 적어도 漢代에 이르면 聖王, 賢臣의 出生地나 陵墓附近에 이미 이들을 제사하는 ?祠廟?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魏晉以後의 皇帝들은 기본적으로 漢代의 方式을 계승하여 巡狩時에 官吏를 파견하여 聖王이나 賢臣의 廟를 제사드린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北魏 孝文帝 시기에 이르면 역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생겨나는데, 사실 孝文帝時期는 國家禮制의 發展史에 있어 매우 重要한 意義를 지니는 시기로써 拓跋氏의 傳統祭典인 “西郊祭天”等의 儀式을 폐지했을 뿐 아니라(太和18年, 494),儒家經典에 근거하여 中原式의 祭典을 새로운 면모로 가다듬고 정리하던 시기였다. 성왕과 선현의 祭祀 역시 이 시기의 일련의 整理를 거쳐 체계를 갖추게 되는데, 唐堯는 平陽에서, 虞舜은 廣寧에서, 夏禹는 安邑에서, 周公은 洛陽에서 공식적으로 제사드림을 확정지었다. 隋代에 이르면 성현제사에 관한 규칙이 더욱 완비되는데, 祭祀期日?配神?犧牲등에 관한 세부적인 禮儀節次가 개선되었다. 이에 대해 邱濬은 효문제에 이르러 정식으로 조칙을 내려 堯、舜、禹, 周公을 제사 드리기 시작하지만, 이때의 성현제사는 단지 淸酌尹祭에 불과하였고 수대에 이르러 정식으로 정기적인 제사로 자리잡고 太牢의 禮로써 제사드리기 시작하여 당에게 계승된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唐代에 이르러 高祖는 武德三年(620)에 蒲州를 순행할 시에 當地의 지방관에게 舜廟를 제사할 것을 명한바있다. 太宗 역시 貞觀11년(637)에 洛陽宮으로 갈 때 사람을 보내 漢文帝를 제사드리도록 했고, 다음해에는 新橋로부터 河北縣으로 순행할 시에 夏禹廟를 제사케 하였다. 그러나 當時의 國家禮典에는 先代帝王에 관한 祭祀가 아직까지 정식으로 편입되어 있지 않았는데, 顯慶2년(657)6월에 禮部尙書 許敬宗는 상주문을 올려 『禮記?祭法』편을 인용 성왕제사가 국가예전에 편입되어야 하는 정당성을 주장하고 祭期?祭場?配臣에 관해서도 자세히 언급하였다. 원래 永徽二年(651)에 고종은 『貞觀禮』가 완전치 못하다는 이유로 群臣들에게 脩補를 명한바 있는데, 당시 許敬宗은 실제적인 책임자로써 顯慶3년(658)에 『顯慶禮』 130권을 완성 고종에게 올리게 된다. 『顯慶禮』의 編纂時間과 서두에 보이는 “貞觀之禮, 無記先代帝王之文”을 함께 고려해 보면, 許敬宗의 顯慶2년 上奏文이 『顯慶禮』 脩撰의 주요한 원인을 제공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어쨌든 성현제사는 『顯慶禮』를 시작으로 정식으로 國家禮典에 편입되게 된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玄宗時期는 唐代 國家祭祀型祠廟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매우 重要하다. 名山大川等 自然神祭祀에 있어 祠廟를 세우고 封號를 하사하는 범위가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聖王과 賢臣祭祀에 있어서도 祭祀對象과 祭場을 확대하는 傾嚮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향은 開元七年에 頒佈된 祠令에 명백히 나타나는 데, 황제의 車駕가 巡倖중인 장소로부터 20리 이내에 성왕의 陵墓와 祠廟가 있거나, 10리 이내에 名臣?將相의 陵墓와 祠廟가 있을 시에는 현지 州장관에게 제사를 드리게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永徽年間에 頒佈된 皇帝巡狩와 관련된 祠令만해도 名山大川의 祭祀만을 규정해 놓았을 뿐, 聖王?名臣?將相의 廟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한 바가 없다. 사실 이러한 조짐은 天寶元年(742)에 이미 나타나는데, 玄宗은 秦始皇이 많은 儒家들을 파묻었다고 하는 장소에 祠廟를 세우고 遭難諸儒들의 영령을 위로한 바 있다.사실 玄宗시기 以前까지만 해도, 唐朝의 聖賢祭祀는 前代帝王에만 제한되었을 뿐, 名臣들은 기껏해야 配神의 地位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이러한 趨勢는 天寶六載와 七載(747)를 거쳐 본격적으로 확대되는데, 天寶6載에는 長安에 三皇五帝廟와 三皇以前帝王의 廟를 세워 정기적으로 祭祀드릴것을 명한바 있고, 天寶七載에는 歷代 創業帝王이 왕조의 기초를 닦은 땅 가운데 아직까지 祠宇가 없는 곳에도 廟를 세우고 제사할 것을 명령하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天寶七載의 詔令에서 德行이 높은 역대 忠臣?義士?孝婦?烈女에게도 祠宇를 세워주고 제사를 드릴 것을 명령했다는 것인데, 정부가 주동적으로 忠臣?義士?孝婦?烈女의 祠廟를 건립하고 相關祭祀禮儀를 규정한 것은 史上 처음으로 보여지는 사례로써, 구체적으로 12인의 開國之君, 16인의 忠臣, 8인의 義士, 七인의 孝婦, 14인의 烈女의 명단과 立廟地點, 祭祀禮儀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반포하였는데, 이번 조치는 國家차원 뿐 아니라 民間祠廟信仰의 전개에 있어서도 相當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祠廟의 祠主와 立廟地點등을 747년 5월에 頒佈된 詔令에 따라 간단한 表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祠主 配神 所在地 祠主 配神 所在地
夏王禹 益秩?夷 夏縣 後漢光武帝 鄧禹?耿? 南陽
殷王湯 伊尹?仲? 穀熱縣 晉武帝 苟彧?鍾繇 ?
周文王 ?熊?齊太公 咸陽縣 魏武帝 張華?羊(祜) 洛陽
周武王 周公?召公 咸陽縣 魏道武帝 長孫嵩?崔元伯 雲中
秦始皇 李斯?王剪 咸陽縣 周文帝 蘇綽?于謹 馮翊
漢高祖 張良?蕭何 彭城縣 隋文帝 高??賀若弼 長安
種類 祠主 所在地 種類 祠主 所在地
忠臣 殷, 傅說 汲郡 忠臣 殷, 箕子 汲郡
宋, 微子 ?陽郡 殷, 比幹 汲郡
齊, 管夷吾 濟南郡 齊, 晏平仲 濟南郡
晉, 羊舌叔嚮 絳郡 魯, 季孫行父 魯郡
鄭, 里子 滎陽郡 燕, 樂毅 上谷郡
趙, 藺相如 趙郡 楚, 屈原 長沙郡
漢, ?光 平陽郡 漢, 蕭望之 萬年郡
漢, ?吉 魯郡 蜀, 諸葛亮 南陽郡
義士 周, 吳太伯 吳郡 義士 周, 伯夷?叔齊 河東郡
吳, 季札 丹陽郡 魏, 段幹木 陝郡
齊, 魯仲連 濟南郡 楚, 申包胥 富水郡
漢, 紀信 華陽郡
孝婦 周, 太王妃太薑 新平郡 孝婦 周, 王季妃太任 扶風郡
周, 文王妃太? 長安縣 魯, 大夫妻敬薑 魯郡
鄒, 孟軻母 魯郡 陳, 宣孝婦 ?陽郡
曹, 世叔妻大家 扶風郡
烈女 周, 宣王齊薑 長沙郡 烈女 衛, 太子恭姜 汲郡
楚, 莊樊姬 富水郡 楚, 昭王女 富水郡
宋, 公伯姬 ?陽郡 梁, 宣高行 陳留郡
齊, 杞梁妻 濟南郡 趙, 將趙括母 趙郡
漢, 成帝班?? 扶風郡 漢, 元帝馮昭儀 咸陽郡
漢, 太傅王陵母 彭城郡 漢, 御史大夫張湯母 萬年縣
漢, 河南尹嚴延秊母 東海郡 漢, 淳于?塋 濟南郡
물론 聖賢廟의 건립을 주도한 후, 비록 祭祀의 직접적인 시행과 廟宇의 管理는 當地의 地方官에게 위임했다고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이러한 모든 일들은 기본적으로 中央政府의 主管하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天寶十四載(755)에 安史의 亂이 發生한 후, 政局의 不安과 財政의 惡化는 더 이상 中央政府로 하여금 이러한 일들에 관심을 기울일수 없게 했다. 심지어 上元元年(760)에 이르면, 조정은 中祀以下 모든 國家祭祀의 거행을 잠정적으로 중지한다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聖賢에 대한 立廟 或은 修廟運動이 완전히 중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武則天에서 玄宗시기에 보이는 정부의 적극적인 행동은 점차 地方官들과 士人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당대후기에는 그들의 主導下에 祭祀의 地點과 對象이 더욱 擴大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예를 들면, 代宗 永泰元年(765)에 道州刺史인 元結은 전설상의 虞舜임금 葬地라는 九疑山이 道州 영내에 속하는지라 祠廟를 세웠으니, 근처 한 두 집의 세금을 免해주어 廟의 관리를 맡기게 해달라고 上奏文을 올렸다. 이에 대해 정부는 奏請을 받아들여 다음해 오월에 廟가까이 사는 兩戶의 課稅를 면해주어 廟의 管理와 祭祀의 準備를 맡기는 것을 허락한다는 공문을 내렸다. 일반적인 절차라면 地方官이 먼저 보고를 올리고 禮官의 토론을 거쳐 祠廟를 세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위에 보이는 사실은 당대후기에 이르면 地方官 스스로가 建廟와 修廟를 결정하는 것이 이미 相當히 普遍化되어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원래 季札廟는 東漢代에 會稽守 第五倫이 淫祠철폐를 주도할 때만 해도 禁毁의 주요표적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天寶年間의 칙령이 季子를 歷代 義士로 추존하여 정식으로 丹陽郡에 묘를 세울 것을 명령한바 있기 때문에, 唐代에는 이미 國家에 의해 정식으로 인가된 正祠로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至順鎭江志』 등에 따르면, 延陵 西北九里지점에 있던 季子의 祠廟 역시 代宗 大歷14년경(779)에 潤州刺史 蕭定의 명령에 의해 改修되어졌다고 한다. 이밖에 憲宗 元和年間에는 建平刺史 沈傅師가 屈原의 舊宅에 소규모의 祠廟를 건립하고 神像을 안치한 바 있는데 屈原 역시 天寶七載의 조칙에 의해 역대충신으로 추존되어 국가에 의해 사묘의 건립이 추진된 바 있다.
이렇게 中央政府나 地方官들에 의해 建立된 聖賢廟외에도 筆者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唐代의 全國各地에는 無數한 聖賢廟가 존재했는데, 중국인에 의해 숭배되는 대표적인 전설상의 성인인 堯와 舜을 예로 들자면 河南道?州?汝州?滑州?河北道定州?河東道晉州?江南道湖州等地에 堯祠가 있었고, 舜祠 역시 舜임금의 葬地로 전해온 江南道 道州九疑山과 武德?貞觀年間에 皇帝가 직접 제사를 명했던 河東道蒲州외에도, 河南道淸州?江南道越州?永州?嶺南道桂州等地에 祠廟가 보인다.
天寶年間에 歷代義士로 편입된 吳泰伯의 祠廟 역시 江南道 常州와 蘇州등지에 존재했던 것으로 사료되며, 비록 唐代禮典과 天寶年間에 정해진 忠臣?義士의 반열에는 끼지 못했지만, 唐代전반에 걸쳐 國家祭祀型祠廟에 필적하는 대우를 받았던 伍子胥廟 역시 當時 江南道 일대에서 매우 流行하여 蘇州?常州?杭州?睦州등지에 사묘가 산재했는데, 祭祀圈이 확대되어 別廟까지 생겼는데 本廟와 모종의 連繫關係도 存在했을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淮南道楚州?山南道?州等地에도 伍子胥廟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렇게 歷代政府가 正式으로 指定한 장소 외에도 성현을 제사하는 祠廟가 무수히 존재했던 것은, 出生地?葬地?舊宅?封地 等 그들의 傳說이나 實際活動과 관련 있는 장소에 끊임없이 大?小祠廟가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聖賢祭祀 자체가 현실세계의 皇權을 神界에까지 연결시키려는 國家祭祀의 內在적인 目的 외에, “祠於聖賢, 所以訓人崇德也”라는 白居易의 말처럼 黎民을 교화한다는 또 다른 목적을 내포하고 있는 까닭에, 역대 政府가 비교적 관대한 態度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밖에 唐代前期이래 政府가 적극적으로 聖賢祭祀의 범주를 前代帝王에서 忠臣?義士?孝婦?烈女의 차원까지 확대하고, 또한 이들 祠廟의 건립을 주도한 것은, 당연히 地方官이나 民間에까지 보이지 典範의 작용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唐代後期에 이르면, 國家의 사회에 대한 통제력이 점차 쇠미해지는 상황 하에서 國家祭祀型 聖賢廟의 수가 급증할 뿐 아니라 祭祀의 世俗化와 民間化 傾嚮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當時 이러한 경향이 어느 정도에까지 이르렀는지 『國史補』 ?敍祠廟之弊?에 보이는 내용을 일례로 들면 다음과 같다.
매년 해당관리가 행해야하는 제사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모든 鄕과 里마다 반드시 祠廟가 있어 사람들의 禍福을 주재했는데, 그 폐해가 매우 컸다. 남쪽에 샘이 있는데, 동굴에서 흘러나올 때 항상 계수나무잎(桂葉)이 떠내려와, 일벌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를 流桂泉이라 불렀는데, 後人들은 여기에 廟宇를 세우고(단순히 흐를流와 漢高祖 유방의 劉가 협운이라는데 착안하여) 漢高祖를 신으로 섬기기 위해 神主를 모시고 제사 올렸다. 또한 伍員廟라 칭해지는 곳도 있는데, (神像의) 반은 반드시 수염으로 뒤덮이곤 했는데, 이를 五?鬚神이라고 불렀다 (50%가 수염이라는 뜻의 五?鬚가 祠主인 伍子胥의 발음과 흡사하기 때문에 神像도 수염이 많은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식이다 보니 영험있는 신들이 많아지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원래 국가제사적인 성격을 가진 聖賢廟에도 이렇듯 世俗化?民間化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면서 正祠와 淫祠간의 구분이 애매모호해 지게 되고, 아울러 祠廟의 수 또한 暴增하게 됨에 따라, 정부측에서는 이전처럼 淫祠를 불사르고 폐지시키는 직접적인 금지조치 이외에도, 神祇의 世界를 제어할 수 있는 또 다른 適切한 ?式을 고려할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당 후기이래 神界에 封號와 廟額을 내리는 횟수가 점차 증가되는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한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상세히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3. 준국가제사형 사묘의 전개
唐代의 祠廟는 대략 國家祭祀體系에 속하는 祠廟와 純粹民間信仰型祠廟로 구분할 수 있겠지만, 民間人이나 지방관에 의해 건립된 적지 않은 수의 祠廟가 當代政府의 正式 認可와 相應하는 保護管理를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國家祭祀型祠廟를 모방하거나 결합하면서 발전해왔는데, 본고에서는 이를 ?準國家祭祀型祠廟?라 지칭토록 하겠다. 물론 이 중에는 이미 前代에 세워진 것도 있고 唐代에 이르러서 세워진 것도 있겠지만, 이들 祠廟에서 신봉하는 신들은 적어도 表面的으로는 백성들에게 功德을 베풀었다는 共通點을 지닌다.
우선 前代에 세워져서 唐代에도 여전히 융성하고 있던 祠廟에 대해 예를 들자면, 河北道 相州 ?縣과 劍南道 澎州 導江縣에는 각각 西門豹祠와 李?祠가 있었는데, 알려진 바대로 前者는 章水를 끌어들여 ?지역의 灌漑에 이용함으로 原來 過多한 鹽分을 함유하고 있던 황무지를 良田으로 변화시켜 土壤개량사업의 模範처럼 추앙 받는 인물이고; 後者는 岷江流域의 水利사업을 주도하여 成都平原이 하늘이 내려준 땅으로 불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두 사람 모두 大型의 水利事業을 통해 民衆의 生活水準을 높이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江南道 湖州 烏程縣과 武康縣에는 銅官廟가 있는데,廟神은 趙姓監官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漢末 吳王鼻가 銅鑛山을 개발할 때 工程을 감독하던 趙姓監官은 백성들을 학대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인자한 관리였다고 한다. 후에 산사태로 목숨을 잃자, 백성들이 사묘를 세우고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데, 이 廟는 특히 심한 가뭄이 들 때마다 영험을 드러내어 官民이 함께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河南道 蔡州 新息縣에는 賈君祠가 있는데, 東漢시기에 新息縣의 縣長을 맡았던 賈彪를 廟主로 받드는 사묘이다. 당시에는 生活이 매우 貧窮하여 적지 않은 농민들이 아이를 낳으면 양육하지 않고 버리는 惡習이 있었는데, 賈彪는 이러한 풍습을 嚴禁하여 수천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후에 百姓들이 그를 “賈父”로 존칭하고, 사후에는 祠廟를 세워주고 숭배했다고 한다. 물론 이 밖에도 祠主의 姓名조차 잊혀진 더 많은 祠廟들이 존재했는데, 예를 들면 당시 江南道 越州에서 지역의 수호신처럼 받들어지던 顯應廟는 孫吳 赤烏二년(239)에 건립되었다고 하지만 廟神의 이름은 이미 잊혀졌고, 다만 지방관으로 재임했을 시에 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의 제사를 받게 되었다고 전해 질 뿐이다.
唐代에 건립된 準國家祭祀型祠廟들도 대략 前代에 세워진 것들과 마찬가지로 선정을 베풀었던 지방관들에 대한 숭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예를 들자면, 武則天時期에 劍南道 彭州에 서 長史를 지낸 劉易從은 水利事業을 일으켜 九??唐昌地域의 田地를 관개시키는데 큰 공헌을 세웠는데, 후에 주민들이 이에 보답코자 祠廟를 세우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고 한다.
江南道 明州 ?縣 남쪽에는 小江湖가 있어서 八百頃의 田地에 물을 댈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원래 開元年間에 縣令을 역임했던 王元緯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후에 주민들이 선정에 감사하는 뜻에서 사묘를 세우고 제사를 올렸는데, 『延祐四明志』 等 몇몇 地方志資料에 의하면 이 묘의 廟神인 王元緯는 太和年間(827-835)에 善政侯에 봉해진다고 한다. 이 밖에 江南道 杭州 新城縣과 鹽官縣에는 許遠廟가 있는데, 安史의 亂이 發生했을때 許遠은 雎陽太守로써 張巡과 힘을 합해 安慶緖軍에 항거했는데 결국은 힘에 부쳐 두 사람 모두 순직했다고 한다. 후에 그의 아들인 許玟이 ?州司馬로 재직할 때 雎陽에 사묘를 세우고 張巡과 함께 모셔 ?雙廟?라고도 칭해졌는데, 후에 그의 善政과 용기를 기리는 백성들에 의해 숭배되어졌다.
이렇듯 당대 후기에는 지방관의 공덕을 기리는 사묘가 급격히 증가되는데, 淮南道 敭州 江陽縣에는 康令祠가, 江南道 杭州에는 李泌廟, 明州에는 吳刺史廟, 潤州에는 張僕射廟, 關內道 坊州에는 崔騈祠 等이 있었고, 심지어 일부의 郡民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지방관을 제사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들 祠廟들은 비록 대부분이 국가의 지시나 허락없이 當地의 기층민중들에 의해 主動的으로 建立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儒家의 祭祀精神, 즉 『禮記?祭法』에 보이는 “法施於民則祀之, 以死勤事則祀之, 以勞定國則祀之, 能禦大災則祀之, 能旱大患則祀之.”의 제사원칙에 부합하기에 평상시에는 국가로부터 직접적인 탄압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準國家祭祀型祠廟와 관계 있는 傳統資料들 대부분이 地方官 자체의 善政과 報恩식의 立廟過程을 강조하여, 유가제사적 성격을 지나치게 고양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善政을 베푼 地方官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 같은 것이 立廟의 動機를 제공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前代의 지방관리가 다수의 기층민들에게 널리 그리고 오래도록 崇拜의 對象이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그 裡面에 기층의 心靈을 끌어들일 수 있는 강력한 종교적인 要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韓愈가 柳宗元廟를 위해 쓴 ?柳州羅池廟碑?의 비문은 이러한 추측에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데, 여기 원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A〕羅池廟者, 故刺史柳侯廟也. 柳侯爲州, 不鄙夷其民動以禮法; 三年,民各自矜奪: “?土雖遠京師, 吾等亦天氓, 今天倖惠仁侯, 若不化服, 我則非人.”於是老少相敎語, 莫違侯令.……於是民業有經, 公無負租, 流逋四歸, 樂生興事; 宅有新屋, 步有新船, 池園潔脩……先時民貧以男女相質, 久不得贖, 盡沒爲?; 我侯之至, 按國之故, 以傭除本, 悉奪歸之. 大脩孔子廟, 城郭巷道, 皆治使端正, 樹以名目. 柳民旣皆悅喜.
〔B〕常與其部將魏忠?謝寧?歐陽翼飮酒譯亭, 謂曰: “吾棄於時, 而寄於此, 與若等好也.明年吾將死, 死而爲神, 後三年爲廟祀我.” 及期而死. 三年孟秋辛卯, 侯降于州之後堂, 歐陽翼等見而拜之. 其夕, 夢翼而告曰: “館我於羅池.” 其月庚辰, 廟成大祭, 過客李儀, 醉酒慢侮堂上,得疾,扶出廟門卽死. 明年春, 魏忠?歐陽翼使謝寧來京師, 請書其事於石.……
위의 내용 가운데, A段은 주로 首都에서 멀리 떨어진 邊疆地域인 柳州에 柳宗元이 刺史로 부임해와 惠政을 베품으로써, 주민들이 生活環境을 개선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文化적으로도 점차 陋習을 버리고 中原式의 文明社會에 점차 접근해 갈 수 있었다는 내용을 묘사하고 있다.
B段의 內容은 地方官을 제사하는 祠廟가 어떤 경과를 통해 宗敎信仰적인 神?性과 매력을 갖추게 되는가를 예시해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위의 內容 중에, 당시 柳宗元이 경험했던 政治的인 不倖을 감안한다면, 그가 幕僚들에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곤 했다는 내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臨終 前에 자신이 세상을 떠날 時間을 알려주고 그들에게 자신을 위해 祠廟를 세워줄 것을 당부했다는 내용은 당연히 허구성이 짙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자신이 예언대로, 사후 삼 년 후에 幕僚들 앞에 다시 나타나, 자신의 神靈을 羅池에 안치하라고 당부했다는 故事와 廟가 완성되어 大祭祀를 지낼 때 客이 술김에 그 廟를 모욕했다가 질병을 얻어 급사했다는 내용은 신뢰도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과 같은 신비로운 故事를 널리 퍼뜨리는 것은, 民間차원 祠廟의 立廟過程에서는 늘상 보여지는 일로써, 고대 중국인들 사이에는 특히 억울하게 죽음을 맞거나 비명에 橫死한 死者들은 종종 스스로 顯現하거나 周邊人物이나 무당(巫者)의 몸에 붙어 자신의 뜻을 전하고 神力을 과시함으로 世人들의 注意를 끈다고 믿어져왔다.
이밖에 廟碑의 마지막 단락에 韓愈가 柳州 百姓들을 위해 남긴 ?迎享送神詩?의 詩文內容 역시 재차 고찰해 볼만 한데, 그 중에 ?……侯之船兮兩旗……侯乘駒兮入廟……?라는 구절에 대해 陳景雲은 五嶺이남지역에서 民間諸神을 제사 드리는 옛 풍속이라고 해석했다. 이렇게 볼 때 羅池廟는 표면적으로는 前任 地方官의 惠政에 감사하는 뜻으로 세워졌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 묘의 經營者나 巫者들에 의해 날조되고 유포되었을 조금은 허황되고 신비로운 故事의 內容을 통해 그 儀式의 裡面에는 이미 當地에 원래부터 존재했던 民間信仰적인 성분을 함유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이점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감히 假設을 세워본다면, 現地 주민들에 의해 원래부터 信奉되던 民間神祇가 전임 地方官 柳宗元의 功德에 기탁 儒家적인 제사원칙에 적응한 새로운 모습으로 信徒들 앞에 다시 출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지방관 출신의 神主와 巫者와의 관계를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杭州 諸葛使君廟와 관련된 전설 역시 언급할만한 가치가 있다. 『祥符舊志』에 따르면 東漢代에 河閒太守를 지낸 諸葛琮은 매우 어질고 덕망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사후에도 當地 무당(巫者)에게 降神하여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려주는 등 神力을 베풀어주어 주민들이 廟를 세워주고 널리 신봉하여, 後梁 乾化五年(915)에는 永昌侯의 封號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듯 지방관의 賢德을 기리는 제사가 현지의 순수한 民間信仰的要素와 결합하거나 巫者들에 이용되는 경우는 의외로 많은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廟神은 점차 神力이 증가되고 종종 祠廟의 祭祀圈 역시 확장될 수 있었다. 만약 이 지역에 극심한 자연재해가 발생하거나, 혹은 신도들이 개인적으로 不倖한 事件을 직면했을 때, 신통한 靈驗까지 드러낼 수 있다면, 이 廟의 명망은 당연히 더욱 높아질 것이고 향로에 꽂힌 향불 역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해가게 되는 것이다. 이점을 당지에 원래 존재하였던 순수 민간신앙의 측면에서 본다면 백성들에게 공덕이 있는 자는 제사를 올린다는 유교적 제사원칙과 결합함으로 유가사회에서의 異端 즉 淫祠로 박해받을 위험을 최소화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準國家祭祀型祠廟는 唐代後期이래 매우 확대되어 일부는 한 지역의 보호신으로 성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매우 주목할만한 현상으로써 본고는 이미 國家祭祀型祠廟와 관계된 討論中에서 몇몇의 山神廟와 伍子胥廟等 일부 聖賢廟에 分廟(行廟)가 생겨났고 本廟와 分廟간에 모종의 連繫關係가 존재했을 가능성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추세는 準國家祭祀型祠廟에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몇몇 祠廟의 神力은 이미 村界나 縣界를 뛰어 넘어 점차 몇몇 지역의 民衆들이 공통으로 신봉하는 地域保護神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당시 江南道 ?州 ?縣에는 汪王神廟가 유행하였는데 廟神인 汪華는 원래 隋末의 割據勢力 중에 한 사람으로 당시 이 지역 근처의 다섯 州를 근거지로 스스로 吳王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후에 형세가 불리해지자, 武德四年(621)에는 唐朝에 토지를 바치고 투항했는데, 『新安志』에 따르면 그는 당시 일반적인 割據勢力들과는 달리 善政을 베풀어 勢力圈내에서 昇平의 국면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死後에 많은 郡民들이 모여 祠廟를 세우고 제사를 올렸다고 하는데, 大歷年間(766-779)에 이르면 廟를 烏聊山으로 옮기고 廟神을 越國公?汪王神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후에 刺史였던 薛邕?範傳正等도 廟宇의 改修사업에 앞장섰으며 기타 縣界內에도 도처에 汪王神廟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江南道 潤州에는 趙城明王廟가 있는데, 唐 中和二年(882) 鄕貢進士 林雲이 썼다고 하는 ?廟記?에 따르면, 大歷年間에 義興縣의 毫民인 張度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 묘의 廟神이 신력을 발휘하여 驚風駭浪을 일으켜 도적을 물리치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또한 이 지역에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에도 靈驗을 드러내어 단비를 내렸다고 하는데, 이런 까닭에 점차 이 지역의 土地神 즉 地域保護神으로 받들어 졌다고 한다.
이밖에 江南道 福州에는 漢代에 ?王으로 봉해진 劉?을 모시는 ?王廟가 있었는데, 당시 ?王은 ?城의 개발에 커다란 貢獻을 남겨, 사후에 주민들이 廟를 세우고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陳?의 『烏石廟記』는 大歷年間까지 전체 ?城地域에서 전반적으로 崇拜되던 祠廟에는 대략 네 가지가 있다고 지적했는데, 南臺?善溪?城隍과 더불어 ?王廟가 바로 그 중에 하나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주의해야 할 문제는 당대 후기이래 準國家祭祀型祠廟도 국가로부터 封號와 廟額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王元緯廟가 太和年間(827-835)에 善政侯에 봉해진 일과 杭州 諸葛使君廟가 後梁 乾化五년(915)에 永昌侯에 봉해진 것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바 있다. 이밖에 廟神의 神性이 확실치는 않지만 準國家祭祀型祠廟로 추정되는 京兆府 藍田縣의 石門將軍廟 역시 乾符年間(874-879)에 祈雨祭祀에 즉각적인 영험을 드러내어 濟衆侯로 封해지는데, 당시 唐朝廷은 封號를 내림과 동시에 石門將軍의 廟宇를 보수 확장해 주었다고 한다. 사실 石門將軍廟는 京城에 근접해있기 때문에, 首都近傍에서 旱災가 발생할 때 京兆府 首長을 위시한 高級官僚들이 자주 이곳의 祈雨祭祀에 참석하곤 했는데, 第五琦?楊知등 유명관료들도 이곳에서 기우제사를 드린 적이 있다고 한다. 武則天과 玄宗時期에 당대에 있어 처음으로 신계에 까지 封爵의 原理를 적용할 때까지만 해도, 그 범위는 대략 國家祭祀型祠廟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唐代後期이래 封號를 내리는 對象이 점차 擴大되는 양상을 보이는데,國家祭祀의 原則을 모방하거나 흡수, 결합하면서 성장해온 몇몇의 準國家祭祀型祠廟 역시 점차 封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이전처럼 國家祀典속에 명확히 포함되어있는 祭祀인가가, 정통성문제 즉 正祠와 淫祠를 판별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神이 靈驗을 드러내어 백성의 생활에 도움이 되었는지, 또한 이것이 상부에 보고되어 국가에서 내린 封號나 ?額을 받았는지가 점차 사묘의 합법적인 존재여부를 확정지을 수 있는 근거로 변해감을 보여 주는 것이다.
4. 純粹民間型 祠廟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唐代 기층촌락의 신앙거점가운데 하나를 형성하였던 祠廟는 國家祭祀型?準國家祭祀型과 純粹民間型의 세 가지 類型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비록 立廟의 動機와 主體?관리?存在의 目的등이 각각의 祠廟마다 차이를 보이지만, 전자의 두 유형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유가의 제사원칙에 부합하는, 즉 기본적으로 國家祭祀制度와 儒家傳統祭祀理念의 영향아래 존재하는 祠廟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민간에 존재하는 수많은 祠廟들은 이와는 거의 상관없이 또 다른 背景과 觀念下에 생성, 발전해 왔는데 본고에서는 이를 純粹民間型祠廟라고 지칭한다. 唐代 순수民間型祠廟는 祠主의 神性에 따라 대략 ?鬼類?神仙類?職業神類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중에 本考는 수적으로 가장 많고 민간에서의 영향력 역시 가장 지대하다고 볼 수 있는 ?鬼類를 중심으로 純粹民間型 祠廟의 전개과정에 보이는 역사적 의의를 검토하고자 한다.
『禮記?祭法』에 따르면, 王은 七祀를 지내는데 그 중에 泰?가 있고, 諸侯는 五祀를 드릴 수 있는데 그 중에 公? 라는 것이 있고, 大夫는 三祀를 드리는데 그 중에 族?가 있다고 한다. 泰?는 帝王중에, 公?는 諸侯중에, 族?는 大夫가운데 각각 後嗣가 없는 자를 가르키는 데, 사후에 이 귀신들은 依歸할 곳이 없기에 백성들에게 화를 입히기 때문에, 제사를 올려 미리 위로를 하는 것이다. 孔穎達은 이에 대해 고대에 帝王?諸侯?大夫등이 後嗣가 없는 것은, 자식을 두지 못했다는 단순한 原因외에도, 敵對者에 의한 살해가 적지 않았고, 그밖에 기타 古代文獻을 참조해도 ?가 어떤 때는 “無病强死” 즉 橫死하거나 被殺된 鬼를 가르키기 때문에, ?라는 것은 개략적으로 後嗣가 없는 자 뿐 아니라 橫死?寃死등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한 鬼를 총칭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史記?封禪書』, 『漢書?郊祀志』, 『漢書?地理志』, 『續漢書?禮儀志』, 『續漢書?祭祀志』 등에 기재된 바를 보면 兩漢時期에 官方에서 드린 人鬼祭祀는 기본적으로 帝王? 聖賢?名人들을 위주로 하고, 民間 차원의 人鬼祭祀 역시 自己의 祖上과 功德이 있는 地方官들이 주류를 이룰 뿐 ?鬼와 관련된 紀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東漢末期이후,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六朝志怪小說과 正史資料에 ?鬼와 관련된 紀錄이 급속히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變化가 생기게된 원인은 대략 宗敎信仰의 內的?外的 兩 方面으로 나누어 검토해 볼 수 있는데, 우선 내적인 면부터 탐색해 보자면 兩漢과 비교할 때 六朝人들에 의해 신봉된 神鬼世界의 세계는 훨씬 다양한데, 佛敎와 道敎가 가지고 있는 鬼神의 系譜와 당시 中原文化에 본격적으로 편입된 北方民族과 南方土著民들의 固有한 神靈의 影響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秦漢以來 점차 政治적인 地位를 잃고 民間으로 자연스레 轉移되던 巫師의 活動과 지역사회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던 社神에 대한 숭배가 里共同體의 붕괴와 함께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점등도 당시 신앙생활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종교 외적인 요인에 관해 논하자면, 東漢末期에서 六朝에 걸치는 時代는 전쟁이 그치지 않고 疾病이 수없이 流行하는 시기로써, 이러한 亂局下에 兇死?枉死?疫死?客死 심지어 家無後嗣의 상황이 전대와 비교할 수 없이 증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依歸할 곳 없이 사방을 떠도는 영혼들 즉 ?鬼들이 숫자도 相對的으로 急增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아마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前代에 동일한 운명에 처해 이미 ?鬼가 되었을 著名한 人物들에까지도, 소급하여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되는 심리가 일반 민중들에게 있어서는 보편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非自然的인 死亡을 당하거나, 非正常적인 死後處理로 인해 ?鬼가 된 者들도 원한을 풀어주는 의식이나 再安葬?冥婚等의 과정을 거치면 정상적인 死後世界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少數의 비교적 강력한 靈力을 지니고 不安定狀態에 머무르고 있는 ?鬼들은 근본적으로 방어하고 쫓아낼 수 있는 儀式을 동원하거나, 그들을 懷柔하여 祭祀를 올림으로 영혼을 달래주는 非常的인 手段이 반드시 필요하다.
中國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鬼를 막아내고 쫓아내는 防衛驅除의 儀式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儺禮?인데, 六朝이래 이미 世俗化?娛樂化 되어 원래 지니고 있던 驅鬼?送瘟의 목적은 많이 상실된 경향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이들을 회유하여 祠廟를 세워주고 제사를 드려주는 방법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는데, 宮川尙志씨의 연구에 의하면 특히 田??鄧艾?伍子胥?大夫 種?項羽?蔣子文?蘇侯?卞壺等에 대한 신앙이 魏晉南北朝時期에 널리 유행했다고 한다. 사실 이들은 지명도가 높고 祭祀圈 또한 비교적 광범위한 예이고, 이밖에도 전사하거나, 출가도 못하고 사망하거나, 혹은 怨恨이나 虐待를 받아 죽음을 맞은 적지 않은 ?鬼들이 규모가 작은 향촌사회에서 當地 민중들의 신봉을 받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鬼들은 어떠한 過程을 통해 祠廟에서 정식으로 숭배를 받는 神祇로 變化되어 제사를 받게 되는가? 원래 ?鬼에 속하던 蔣子文이 후에 南朝政府로부터 직접 제사를 받는 最高權威의 神格으로 변해 가는 과정은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의 神格化 과정은 干寶의 『搜神記』에 비유적으로 잘 나타나 있는데, 그 내용은 大略 前?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앞부분에서는 주로 蔣子文이 地域保護神이 되어 가는 過程을 묘사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蔣子文은 漢末에 ?陵尉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한 전투에서 적을 쫓다가 鍾山이라는 곳에서 적으로부터 일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본다면 장자문은 ?鬼중에 戰死將軍類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사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마치 살아 있을 때의 모습처럼 부하에게 갑자기 나타나서는 자신이 이 지역의 土地神이 되려고 하니, 주민들로 하여금 祠廟를 세워 제사케 하라고 명하고는, 만약 이를 듣지 않으면 바로 재앙을 내리겠다는 경고했다. 전반부 뒷부분에 ?몰래 섬기는 자가 매우 많았다(頗有竊祠者)?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蔣子文信仰은 초기에는 官方의 인가를 얻을 수 없었지만,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은밀히 숭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후반부의 내용은 子文이 朝廷과 거래하는 내용인데, 그는 巫者통해 그가 陰兵으로써 오(孫吳)를 도운 적이 있는지라, 朝廷이 반드시 그를 위해 祠廟를 세우고 제사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만약 그렇지 않을 시에는 작은 해충들을 백성들의 귀에 집어넣겠다는 황당한 위협을 가한다. 후에 많은 백성들이 이로 인해 사망했다고 하는데도 군주가 이를 믿지 않자, 이번에는 大火災를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는데, 실제로 하루에 수 십 차례씩 화재가 발생하고, 심지어 불이 궁성에까지 번지자, 조정도 마침내 使者를 파견하여 그를 中都侯에 封하고, 그의 弟子인 緖는 長水校尉로 임명했으며, 祠廟를 세워주고 蔣子文에게 정식으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故事는 당연히 巫者들에 의해 날조 된 것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적어도 당시의 민중들이 ?鬼가 질병과 환란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믿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위해 반드시 祠廟를 세워 제사로써 위로해 주어야 한다는 집체적인 심리를 가지고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계속되는 蔣子文神의 危脅過程을 통해, 蔣子文이 ?鬼에서 區域神,후에는 國家에서 認可하는 正祠의 蔣神으로 변해 가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 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國家에서 公認하는 地域保護神이 된 후에, 蔣神은 계속해서 魏晉南朝 統治者들의 尊禮를 받게 되는데, 위에서 언급된 바처럼 孫吳 시기에는 中都侯로 封해졌지만, 劉宋時에는 鐘山王에, 심지어 齊昏侯 시기에는 蔣帝라는 帝號까지 追尊 받게된다. 물론 이것은 당시 江南과 北方政府가 對立狀態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당시 江南의 수도인 建康지역의 保護神적인 性格을 지니고 있던 蔣子文神에 대한 신앙이, 南朝勢力에게는 일종에 精神적인 支持勢力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고, 民衆들간에도 精神的인 共同紐帶를 통해 단합을 도모하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南朝政府는 前秦과의 ?水之戰이라든가 北魏와의 鍾離전투처럼 北方王朝의 군사들이 南下하여 대규모 공세를 취할 때는, 蔣神에게 관직과 작위를 높여주었고 황제 스스로 제사를 올리기도 했는데, 당시의 관계있는 巫者들은 아마도 蔣神이 南朝軍隊를 陰助했다는 奇蹟의 고사를 시기 적절하게 유포 시켰을 것이다. 이에 대해 呂思勉氏 역시 梁武帝와 陳高祖 같은 인물들이 鍾山의 蔣帝廟를 배알하고 직접 제사를 올린 것이 실은 士氣를 진작키 위함이었다고 피력한 바 있다.
이처럼 魏晉南北朝時期 全時期에 거쳐 널리 信奉 받았던 蔣子文神은 唐代에 있어서도 강남일대에서 널리 숭배되었는데, 비록 權威와 祭祀圈은 이전만 못했지만 江南道 潤州?睦州等地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수의 蔣子文廟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蔣子文神외에 項羽神에 대한 崇拜 역시 漢末에서 魏晉南北朝에 이르는 시기에 江南 吳興地域을 中心으로 폭넓게 유행하였다.널리 알려진 바처럼 西楚覇王 項羽는 秦朝를 멸망시켰지만 후에 유방에게 밀려 결국은 悲憤慷慨하여 烏長亭이라는 곳에서 자결하였다. 이처럼 정치적인 연유로 非命에 죽은 사람들이 死後에 모종의 怪異한 징조를 나타내고, 사람들에게 커다란 災難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민중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던 심리로써, 그의 영혼을 안위하기 위한 祠廟가 곳곳에 세워 졌다.
項羽神信仰의 展開過程에 있어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宋書?孔季恭傳』이나, 『南史?蕭思話傳』 등 많은 正史資料에 보이는 것처럼 원래 民間에서 滋生한 項羽神이 이 시기에 이르면 卞山王,즉 吳興의 地域保護神的인 姿態로써 심지어 郡政에 까지 影響力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이들 사료에 의하면 심지어는 郡太守가 執政하는 官廳에도 項羽神을 모시는 祭所가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梁書?蕭琛傳』에도 “遂於郡聽事安施牀幕爲神座, 公私請禱.”라고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 당시 項羽神의 뒤에는 당연히 實際적으로 行政권을 장악하던 胥吏와 項羽廟의 제사와 관리를 담당하며 項羽神에 영험에 관한 故事를 날조하던 巫者들이 배후세력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현지에서 項羽神을 공통으로 숭배하며 形成된 民衆들의 紐帶를 기반으로 太守에 대해 일정한 견제를 가해 왔는데, 이렇게 볼 때 中央으로부터 파견된 太守가 정상적인 統治權을 행사키위해서는, 項羽神에 대해 제사를 올림과 동시에 이러한 背後勢力과 적절한 妥協을 체결해야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宮川尙志氏는 項羽神信仰의 本質을 中央對地方?貴族對寒門?北人對南人?太守政治對項羽神政治의 對立관계로 파악했다. 즉 『宋書?孔季恭傳』에 보이는 “二千石常避之”와 『梁書?蕭琛傳』의 “前後二千石皆於聽拜祠, 而避居他室”의 의미는, 新任太守가 項羽神에 올리는 禮物을 상징할 뿐 아니라, 太守와 在地勢力간에 妥協의 條件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 간에 妥協이 성립치 못하면 蕭琛과 같이 意外의 죽음을 당하는 상황까지 생겼다. 물론 正史에 등장하는 孔季恭?蕭惠明?李安民?蕭琛등의 예는, 모두 吳興太守에 취임한 후 項羽神의 神政에서 벗어나 中央政府의 威嚴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한 일면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일찌감치 當地 項羽神信仰과 背後의 在地勢力을 인정하고 적당히 妥協하였던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위진남북조시기에 이처럼 성행하였던 項羽神 숭배는, 唐代에 이르러서도 江南道 常州? 湖州? 越州등지에서 널리 유행되어 곳곳에 祠廟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狄仁傑이 강남지역에서 淫祠의 폐기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檄告西楚覇王文”이라는 격문까지 작성하여 項羽의 역사적인 죄상을 낱낱이 열거했던 것을 보면, 당시 項羽神이 정부의 예상보다 훨씬 널리 신봉되어졌고, 이에 따라 예기치 못한 저항에도 부딪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 기실 狄仁傑의 淫祠禁毁措置와 관련된 자료가운데, 項羽神과 관련된 說話가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데, 심지어는 項羽가 狄仁傑의 꿈속에 등장하여 “내가 바로 서초패왕이다, 唐이 나라를 일으킬 때나, 高句麗를 정복키 위해 遼東을 원정했을 때에도, 陰兵을 동원해 도와주었거늘, 오늘에 이르러 도리어 나의 祠廟를 불살라버리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고?”하며 꾸짖었다는 내용까지 보인다. 이 설화의 앞부분에는 당시 향촌의 父老들이 項羽廟 (項王廟)를 불사르지 말라고 간곡히 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項羽信仰은 唐代에도 여전히 강남의 여러 지역에서 기층민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써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사실 項羽神을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조치가 당대에 처음으로 시행된 것은 아니다. 劉宋 永初二年(421)에 宋武帝가 淫祠에 대한 금지조치를 취할 때, 항우묘 역시 폐지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때의 위기를 넘기고 南朝전대에 걸쳐 융성하게 된 것이다. 물론 唐朝와 劉宋은 중앙정부의 地方에 대한 장악능력에 있어 현저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狄仁傑의 淫祠廢止 行動中에 項羽神崇拜가 어느 정도의 타격을 입었음은 쉽게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기층민중들의 心性 깊숙한 곳에서 유지되어온 民間信仰은 의외의 강렬한 生命力을 보이곤 하는데, 후에 顔眞卿이 직접 썼다는 ?項王碑陰述?에 “지금까지도 廟食이 끊이질 않고, 神靈한 事蹟들이 곳곳에 보인다”이라는 구절까지 언급되는걸 보면 項羽神信仰 역시 이러한 면모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고, 宋元地方志들도 唐末에 이르기까지 項羽廟가 湖州?常州?越州等地에서 여전히 신앙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唐代에는 江南의 常州?潤州?杭州?睦州?蘇州?臺州등지에서 陳果仁을 제사드리는 祠廟가 널리 성행하고 있었다. 陳果仁은 원래 隋末 吳興地域의 지방세력가운데 하나로써, 吳興太守를 지냈던 沈法興이 자신의 딸을 주며 회유하자 그의 세력 하에 들어가 主力戰將으로 활약했지만, 후에 내분이 생겨 沈法興에 의해 독살되었다. 新, 舊唐書에 따로 列傳이 설정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역사적인 영향력이 그리 높았던 인물은 아니지만, 어쨌든 관련사료를 보면, 당시 陳이 뛰어난 인품으로 부하들과 현지 주민들에게 존경을 한 몸에 받아 후에 祠廟가 세워지고 널리 신봉되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지극히 儒家的인 것이고, 陳果仁이 沈法興에게 배반을 당해 毒殺되어 온전한 상례를 치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게 되면, 역시 영혼이 저승까지 인도되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질병이나 재앙을 내리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民衆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巫者들이 祠廟를 세워 그의 영혼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민중들을 끌어들이고 점차 이곳을 자신들의 福錄까지 비는 기도도량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蔣子文?項羽?陳果仁은 生前의 명망이나 신분적 地位가 비교적 높았던 경우에 해당된다. 실은 이러한 상류층의 인사들 외에도 鄕吏?庶人?女性등 사회적 지위가 그리 높지 못한 수많은 寃魂들이 선례와 유사한 신격화의 과정을 통해 多數의 基層民들에 의해 崇拜되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중국인의 신앙세계에 있어서는 現實世界의 社會分配를 결정짓는 權力?階級?性別等의 요소가 死後世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비록 그들을 모시는 祠廟의 수는 많지만 神力은 역시 한계가 있어, 이와 관련된 사실이나 설화 역시 正史에는 거의 출현치 않는다. 본문에서는 주로 方志와 筆記小說에 보이는 예를 중심으로 이러한 小神들의 立廟過程과 전개상황을 보충하고자 한다.
먼저 唐代 江南道 明州와 越州등지에서는 주민들이 鮑郞祠를 신봉했는데, 鮑郞은 東漢時代에 縣吏를 지냈다고 한다. 당시 鮑郞과 中央에서 파견된 縣令사이에 마찰이 생겼다고 하는데, 결국 命令에 따르지 않다가 죽음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埋葬한지 三十年이 지났을 때,鮑郞이 갑자기 妻子의 꿈속에 등장하여 “내가 다시 살고자 하니 관을 열라”고 수 차례 당부하여, 후에 정말로 棺을 열자 시체가 썩지 않고 살아있는 듯 했고, 冥器역시 그대로 整潔한 상태였기 때문에, 郡民들은 그의 寃魂을 달래고자 祠廟를 세워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고 한다. 梁 大通年間(535-545)에 노비 益誕唱이 반란을 일으켜 會稽?永嘉지역을 점거했을 때는, 갑자기 現身하여 巫者에게 토벌을 돕겠다고 하기도 했다는데, 後에 預言대로 삼일 내에 적군이 大破되자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祠廟를 보수해 주었다고 한다어쨌든,鮑郞祠는 이러한 神蹟의 유포를 통해 자신의 神力을 과시함과 아울러 祭祀圈을 확대할 수 있었고, 淫祠로써의 부정적 이미지도 상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唐代에 이르러서도 明州、越州 等地에서 널리 유행했는데, 當地의 地方官 가운데 묘역의 보수를 주도하거나 廟記를 남긴 자도 있었다.
江南道 睦州에는 仁安靈應王廟가 있었는데, 이 廟名은 北宋 神宗 熙寧8년(1075)에 朝廷에서 下賜한 封號에 의거한 것으로, 唐代의 명칭은 알 수 없다. 『淳熙嚴州圖經』 ?廟記?에 보이는 “性倨傲, 不拘小節, 隱烏龍山” 등의 내용을 살펴보면 廟神인 邵仁詳은 隱者의 形象에 가깝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鬼의 신격화 過程에 있어 종종 출현하는 것으로, 生前의 廟神의 모습을 隱者나 道人의 形象으로 치장함으로써, 神通力과 神?性을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에 巫師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廟記〕의 내용에 따르면 邵仁詳은 縣令에게 무례를 범했다가 笞殺 되었다고 한다.〔廟記〕의 내용만을 본다면 邵仁詳이 범한 죄는 烏龍山에 은거했다는 사실인데, 이는 外地에서 經商?求學?求仕等 特別한 目的 없이 본업을 폐하고 유랑한 것인데, 사회경제에 부담을 주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人身支配에도 불리하기 때문에, 엄밀하게 『唐律』의 규정에 따는다면 ?浮浪他所? 罪에 해당될 것이고, 邵仁詳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처벌은 杖一百에 해당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그를 살해한 것은 지방관의 월법행위로써 邵仁詳은 그야말로 寃死、橫死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그는 다른 ?鬼 설화에 종종 등장하는 것처럼, 천둥?번개?뱀 등을 동원한 怪異한 방법으로 加害人에 보복을 하고, 주민들에게 廟를 세워 제사를 올리라고 요구하는데, 이렇게 成立된 邵仁詳廟는 唐代後期以後 江南 睦州지역을 중심으로 祭祀圈을 형성하고, 자연재해가 있을 때마다 靈驗을 발휘하여, 後梁代에 이르면 “證應王”이라는 封號까지 얻게된다. 순수민간형사묘에도 封號와 廟額의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鬼類의 민간사묘 가운데는 女性을 廟神으로 삼는 곳도 적지 않은데, 女性人鬼와 관련된 說話와 그들의 祠廟, 神像등이 본격적으로 출현하는 것은 대략 六朝時期 이후로 추정된다. 당시 女性人鬼의 死亡과 神格化過程에 대해서는 林富士와 劉宛如氏에 의해 자세히 다루어졌는데, 그들에 의하면 女性人鬼는 明顯하게 女性적인 색채를 드러낸다고 한다. 즉 丁姑는 가혹한 가사노동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며느리로써 死後 고향에 혼령으로 나타나 주민들에 의해 廟가 세워지고 제사를 받은 경우이다. 梅姑는 남편에 의해 살해된 뒤 강에 버려졌는데, 후에 巫者에게 降神하여 그들을 통해 숭배를 되기 시작했다. 紫姑는 학대받은 小妾인데 본처가 끊임없이 괴롭히자 견디지 못하고 墳死한 경우다. 義陽公主는 전란시기의 公主로써, 적장의 능욕에 반항하다 自殺했는데 후에 民衆들이 동정하여 제사 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淸溪小姑는 出嫁하지도 못한 채 사망한 여성으로 역시 사람들의 동정을 사서 祠廟가 세워지고 제사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唐代에 出現하는 女性神을 廟神으로 삼는 사묘들이, 새로운 면모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六朝시대 女性祠廟에 보이는 特徵에 기본적으로 부합하며, 설화의 내용이나 신격화과정도 六朝의 것과 대략 일치한다. 일례로, 당시 蘇州에는 洞庭聖姑廟가 있었는데, 『吳郡圖經續紀』와 『吳郡志』가 牛肅의 『紀聞』과 作者未詳의 『辯疑志』에 근거해서 기재한 내용을 살펴보면, 祠廟의 위치와 廟神의 명칭을 제외하곤, 설화의 기본적인 뼈대(情節)는 놀라우리 만치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남편에 의해 殺害되어 依歸할곳이 없어 ?鬼가 되는 이런 類의 故事가, 六朝에서 唐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에 民間에서 광범위하게 流傳되었고, 혹자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는 주민들에 의해, 혹자는 巫者들이 바로 기층민중들의 이러한 심리를 이용하여 곳곳에 祠廟를 세우고 祭祀를 드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辯疑志』에 보이는 내용 가운데 특별히 주의를 끄는 점은,祠廟의 명칭이 갑자기 佛敎式인 昇姑寺로 바뀌었다는 점과, 後半部의 故事가운데 士人의 形象으로 묘사되는 李七郞이라는 者가 聖姑와 관련된 神?로운 설화가 모두 날조된 虛構임을 밝히는 장면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당시 洞庭湖 근처의 聖姑祠는 唐末 大曆年間을 전후로 存亡의 危機에 봉착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조금 대담하게 추측해 보자면 佛敎 菩薩神계통에 진입하는 方法을 통해 生存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民間祠廟信仰과 佛敎와의 융합, 혹은 民間祠廟 廟神의 佛敎附屬神化는 魏晉南北朝이래 상당히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六朝事蹟編類』 ?菩提王廟?에는 楚의 名臣인 屈原을 살해한 ?尙을 숭배하는 淫祠에 대해, 僧人이 菩提戒를 내려 佛敎護法神인 菩提王으로 삼음으로써 그의 廟 또한 捿霞寺 옆으로 옮겨지고,菩提王廟로 개칭했다는 내용이 출현한다. 또한 『宋高僧傳』 ?唐湖州佛川寺慧明傳?에도 慧明이 당시 湖州 佛川寺 근처에 있던 吳王古祠의 廟神에게 戒를 내려 불제자로 삼고 원래의 祠廟 역시 佛寺의 부속으로 변하는 내용이 보인다. 佛敎는 이러한 祠廟와의 결합을 통해 傳統적인 文化意識과 긴밀하게 整合할 수 있었고,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불교와의 淫祠들은 긴박한 경우에 있어서는 생존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도 중국종교신앙의 혼합적 성격을 형성하는 원인의 하나가 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물론 隋唐代에 있어 女性신을 모시는 祠廟가 완전히 魏晋南北朝에서 전승되어온 神들만을 섬긴 것은 아니다. 혹은 새로운 민간여신이 廟神이 되기도 하고 혹은 원래 있었던 사묘에 새로운 女性?鬼가 추가되며 변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당시 建康의 靑溪夫人廟에는 세 부인의 神像이 있는데, 靑溪小姑와 陳朝의 마지막 妃嬪이었던 張麗華? 孔貴嬪의 것이다.원래 이 묘는 出嫁를 못하고 죽었다고 하는 靑溪小姑를 모시는 곳이었다. 사실 傳統中國社會에서는 결혼을 했느냐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당시 女性의 마지막 歸宿이 父家가 아니고 夫家이기 때문에, 死後에 제사도 당연히 夫家의 후손들을 통해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南朝時代에 특히 영험했다고 하는 靑溪小姑의 廟에 왜 갑자기 張麗華?孔貴嬪의 鬼魂이 모셔지게 되었을까? 우선은 두 妃嬪이 晉王廣(隋煬帝)에 의해 베어진 뒤에 靑溪小姑廟 근처의 다리에 걸려졌기 때문에, 이들의 鬼魂을 인도하여 祭祀드리게 된 것이 아닌가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陳書』에 보이는 張貴妃의 生平을 살펴보면 좀 더 자세히 추적해 볼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원래 張貴妃는 名門世家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民間의 祠廟信仰과 관련된 설화들을 직접 듣고 접촉하며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張麗華는 入宮한 후에도 巫術을 깊이 숭배하였고, 심지어는 宮中에서도 淫祀를 일으키고, 늘상 巫者들을 모아 놓고 各種各樣의 法術을 발휘하게 했다. 만약 靑溪小姑廟의 地理적 位置와 “南朝甚有靈驗”이 암시하는 知名度를 생각한다면, 이 廟의 巫者가 張貴妃에 의해 主導된 宮中宗敎集會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으며, 當時 張麗華?孔貴嬪 두 사람과 외부의 巫者集團사이에 비정상적인 연계관계가 있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아마도 이러한 연고가 원래 靑溪小姑만을 제사하던 祠廟에 張?孔 두妃嬪의 鬼靈을 안치하여 제사케 한 것이 아닌가 추정해본다. 사실 後主의 沈皇后에 대해서는 그리도 관용을 베풀었던 隋煬帝가 張麗華와 孔貴嬪의 목을 베고, 그들의 屍體를 靑溪中橋에 걸게 된 것도 실은 그들에게 “惑君之罪“를 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女性을 廟主로 삼는 民間型 祠廟들이 비록 女性을 信仰對象으로 삼는다고 해서 반드시 女性들에게만 속하는 宗敎信仰의 대상으로는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이와 유사한 경우를 당하거나 비슷한 신분을 가지고 있던 婦女者들은 이러한 女性人鬼類의 說話에 대해 공감을 가졌을 것이고, 女性神에 대한 제사를 통해 그들의 고독?굴욕?분노?소원 등을 달래고 기원했는지도 모르겠다.
5. 결어
지금까지 중국인의 종교신앙에 관한 연구는 주로 도교와 불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隋唐史의 영역에 있어서도 通史類의 저작 뿐 아니라 唐人의 생활문화를 주제로 하는 전문서적들조차 종교신앙의 부분에 이르면 당시 불교와 도교가 크게 번성했던 사실을 기술하고, 다음부분에서는 어김없이 네스토리우스교?회교?조로아스터교?마니교 등 당시 서방에서 전래된 신종교만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사료의 제약과 唐文化의 국제성을 강조하려는 작자들의 의도와 관계 있지만 기본적으로 제도화종교의 틀로써 종교신앙문제를 접근해온 고정적인 관념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시각으로 인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각지의 華人社會에서 폭 넓게 숭앙되고 있는 祠廟信仰은 저질의 의식행위로 간주되어 백성을 미혹하는 속임수나 맹목적 미신으로 비판받아 왔다. 물론 祠廟를 주요한 儀式據點으로 삼는 중국인의 민간신앙이라는 것이, 어떤 특정한 敎理도 없고, 보편적인 사회윤리나 행위준칙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敎團조직 같은 것도 발견하기 힘들다. 그러나 基層民衆의 생활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문화의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으며, 장기적인 역사변천과정에 있어 일반민중들의 思惟方式과 社會關係?政治行爲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고, 帝國의 상층상징체계와 미묘한 충돌과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여 왔다. 그러므로 민간 祠廟信仰에 대한 연구는 중국의 社會文化를 基層의 시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할 뿐 아니라, 중국사회의 全貌를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의의를 지님에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일본과 구미학계에서 통속문화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이 분야도 서서히 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데, 아쉬운 점은 아직도 연구성과가 송대이후의 시기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본문에서 잠시 언급한 바처럼 漢末에서 魏晉南北朝에 이르는 시기는 중국인의 정신적 토양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로써, 道?佛로 대표되는 기성종교의 발전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는 점 외에도, 지역사회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던 社神에 대한 숭배가 里共同體의 붕괴와 함께 변질되기 시작하였고, 中原文化에 본격적으로 편입되기 시작한 北方民族과 南方土著民들의 固有한 神靈이 중국인의 종교신앙에 影響을 주게 되었으며, 아울러 政治권역에서 立地를 잃은 巫師들의 民間活動이 더욱 왕성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신적 환경과 전쟁?기근?질병이 어느 때 보다도 많았던 급속한 외부환경의 변천과 맞물려, 祠廟信仰도 기층의 공동체에서 종교신앙적인 空間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唐代는 이렇게 진전되기 시작한 祠廟信仰이 더욱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여러 새로운 변화들이 생성되는 시기로써, 이러한 변화의 諸樣相 가운데 우선 가장 주의를 끄는 것은 祠廟의 수와 종류가 크게 늘어났다는 점이다. 唐代에 들어 전대미문의 淫祠 철폐조치가 여러 차례 시행된 것도, 대당제국의 全國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정부의 認可를 받지 못한 사묘, 즉 淫祠자체가 폭발적으로 증대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민간차원의 제사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고, 국가제사체계 내부에도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데, 嶽鎭海瀆, 山林水澤 等 국가차원의 자연신제사에 있어서, 郊祀의 일부로 숭배하거나 巡倖길에 제단에서 望祭를 올리던 방식이 서서히 중요성을 상실하고, 이들 신의 소재지에 직접 祠廟를 세우고 제사 드리는 방식이 점차 관건적인 지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북위이래 생겨나기 시작한 이러한 추세는, 당대에 있어서는 武則天 시기를 거쳐 특히 玄宗 시기에 최고조에 이르는데, 玄宗은 祠廟를 세우고 祭祀를 드림과 동시에 이들 신에게 爵位도 封해 주었다.
국가차원의 聖賢祭祀에도 주목할 만한 변화가 생기는데, 唐初까지는 국가에서 정한 前代의 몇몇 帝王에게만 제사를 올렸을 뿐이지만, 玄宗대에 이르면 그 범위를 역대의 忠臣?義士?孝婦?烈女에 까지 확대하였고, 대대적으로 그들의 祠廟를 건설하는 立廟運動과 양상이 출현하게된다. 물론 安史의 난 이후 정국불안과 재정압박에 시달리게 되는 唐정부로써는 더 이상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고, 일시적으로 中祀以下 모든 국가제사의 중지를 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주도적인 자세는 후에 많은 士人들에게 영향을 주어, 지방관들의 주도 하에 國家祭祀型祠廟의 立廟地點과 對象은 더욱 확대되었다.
唐代에 있어서 적지 않은 祠廟들은 비록 민간에 의해 주동적으로 건립되었고,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도 얻지 못했지만, 기본적으로 유가제사의 원칙과 이념을 표방하고 때로는 국가제사형사묘와의 결합을 모색하며 발전하였다. 이러한 準國家祭祀型 祠廟 가운데 원래는 전통적인 民間神을 예배하던 祠廟가 지방관의 공덕에 기탁하여 유가제사이념에 부합하는 형식을 취하여 신도들 앞에 나타나는 사례도 적지 않고, 지방관의 공덕을 기리는 祠廟가 민간 신앙적인 요소를 흡수하여 자신의 神力을 증폭시키고, 祭祀圈을 확대시키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다. 당대에 있어 이렇게 성왕과 현자 뿐 아니라 善政을 베푼 지방관에 대한 제사와 표면적으로 그들을 모방하는 사묘까지 증대하게 된 것은, 성현의 제사를 통해 백성들에게 덕을 숭상하는 마음을 가르친다는 교화의 의미를 내포되어 있어, 이들 사묘에 대해서는 정부가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宋代이후의 많은 祠廟에서도 純粹民間的 성격이 강한 廟神의 전면에 堯?舜?禹등 先賢의 像을 함께 배치한 경우가 많은데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民間祠廟信仰과 도교, 불교와의 결합인데 본문에서는 순수 민간형사묘의 전개과정에 있어 사묘의 묘신이 불교의 부속신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예로 든바 있다. 때로는 불교와 도교의 敎勢 확장의 과정에서, 때로는 정부의 淫祠 박해 조치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결합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흔히 중국종교신앙의 특징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절충적 혹은 혼합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데, 바로 禮라는 틀로써 통속문화에 대해 끊임없이 규제해온 국가의 정책이 이러한 중국적 신앙문화의 특색을 배태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데, 이것은 결국 국가권력과 민간사묘신앙과의 충돌과 상호조율에서 생성된 전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純粹民間型祠廟라는 것은 앞의 두 유형의 祠廟와는 달리, 유가의 제사이념과 관계없이 성장해온 민간에 존재하던 사묘들을 지칭한다. 이 가운데 직업신?신선?은자 등을 숭배하는 사묘들도 수없이 존재했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민간의 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것은 ?鬼類를 제사하는 祠廟들이다. 項羽?蔣子文?陳果仁등 비교적 지명도가 높고, 넓은 祭祀圈을 가졌던 사묘외에, 가혹한 가사노동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여성신이나, 본처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憤死한 小妾의 신을 모시는 작은 사묘들도 이에 해당되는데, 이들은 모두 自殺?戰死?憤死등 非命에 橫死하여 정상적인 상례를 치루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본문에서 살펴본 바처럼 당대에 있어 이런 ?鬼類의 祠廟가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은, 기층민의 心性구석에 비정상적인 죽음을 당한 자 들은 영혼이 저승에 제대로 인도되지 못해 여기저기를 떠돌며 재앙을 내린다는 보편적인 심리가 존재했기 때문인데, 무당(巫者)들은 당시의 이러한 집체적인 심리를 이용 祠廟를 건립하고, 그들의 영혼을 위로함과 동시에 때로는 영험을 드러내는 神力을 날조하여, 자신이 주재하는 祠廟의 향불이 더욱 번성하게 하고자 했다.
이밖에 사묘신앙의 전개에 있어 唐代에 발생한 중요한 변화로써, 몇몇 유명한 祠廟의 제사권이 村界와 縣界를 넘어 세력을 확장 行廟나 分廟를 파생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상호간의 연계관계가 어떤 식으로 발전했는지는 명확치는 않지만, 아마도 후일 몇몇의 神鬼들이 地域保護神의 성격을 넘어 전국적으로 확장해 가는 祠廟의 단초인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封號와 廟額의 하사에 관해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神界에 대해 封爵의 제도가 적용된 것은 남조정부가 蔣子文神에 내린 것이 최초로 사료되는데, 당시에는 북조와 대치하던 남조의 특수한 상황이 당시의 민간신앙을 이용하게 한 것으로 아닌가 여겨지는데, 이것이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唐代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당대에는 국가관할하의 祠廟뿐 아니라, 준국가제사형사묘와 순수민간형사묘 역시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 할 뿐 아니라, 많은 사묘들이 국가제사형 사묘를 모방하거나 결합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또한 국가제사와 관련을 맺고 있는 祠廟들 역시 民間化와 世俗化가 진척되어 正祠와 淫祠간의 구별도 점차 모호해지는 현상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국가가 주관하는 제사를 大?中?小로 三祀로 묶어 관리하는 방법이외에 팽창하는 神界에 대해 또 다른 차원의 관리 방법이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추정해본다. 이로 인해 淫祠에 대한 판정을 하는데 있어서도 이전처럼 단순히 國家禮典에 포함되어 있는가, 즉 “不在祀典者”가 유일한 판단 기준이 된 것이 아니고, 封號나 廟額을 지니고 있는지도 점차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통하게 되었다. 宋代의 士人 鄭剛中이 『北山文集』에서 밝힌 “天子之命, 非但行於明也, 亦行於幽. 朝廷之事, 非但百官受職也, 百神亦受其職”의 관념 역시 이러한 당대이래 민간사묘신앙의 전개과정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封爵의 제도를 확대 적용함으로써 현실세계 뿐 아니라 神界에 까지 통치력을 미치는 절대적인 권위자의 모습을 더욱 강화하게 되는 것이다.
中文提要
宋元以後的地方志編者, 經常把一個地區的宗敎禮拜場所分爲佛寺?道觀以及祠廟來分類記述. 如此看來, “祠廟”可謂是在傳統中國區域社會中, 供奉神祇的?一種宗敎建築, 卽所謂制度化宗敎以外的第三種宗敎禮拜場所. 一般認爲宋代是在祠廟信仰的發展過程中頗爲重要的轉折點, 唐宋變革期社會經濟上的急速變化, 導致民間信仰質?量雙方面的變化. 但我們仍然無法輕易地忽略有關唐代史料所見祠廟信仰已開始興盛的一些證據以及隨之産生的一些新的變化. 譬如垂拱年間, 狄仁傑在江南道撤毁過1700餘所未獲國家承認的祠廟, 幷在一百五十年後, 李德裕也在浙西四郡之內, 禁毁過大略1010所的淫祠. 此外,『唐語林』亦云:“每歲有司行祀典者, 不可勝紀, 一鄕一里, 必有祠廟焉.” 若在淫祠加上這些官方所正式允許的嶽鎭海瀆?名山大川?聖王先賢等正祠, 在唐代民間所奉祀的祠廟, 眞是數目可觀, 使人深深體會祠廟信仰在當時民衆的精神生活中所?的重要位置.
但是, 對唐代祠廟信仰方面的硏究, 還是處於剛起步的階段, 因此本文主要以最基礎的祠廟之類型及其開展過程所見的歷史意義爲探討的對象. 至於祠廟信仰或民間信仰的類型, 宗敎學者及民俗學者們, 常據祠主的神性, 分類成自然神崇拜?祖先崇拜?人鬼崇拜等. 但這種分類方法對於解釋祠廟信仰的社會及歷史作用仍有限制. 因此, 拙稿以祠廟信仰與國家禮制之間的關係爲主, 試把唐代祠神廟分成“國家祭祀型”?“準國家祭祀型”?“民間型”的三個層次, 希望能闡明國家權力與祠廟信仰之間的互動關係.
所謂國家祭祀型祠廟, 專指屬於唐代國家祭祀體系的抑或是在朝廷相應的認可之下, 正式受到國家管理的廟宇. 依唐禮的規定, 國家祭祀可分爲大?中?小三祀. 其中, 屬於中祀的“先代帝王”?“嶽瀆鎭海”及屬於小祀的“山林川澤”, 及至唐代已有“祠宇”形態的固定性祭祀所, ?漸具官民共奉的特性. 自唐代前期始, 政府把聖賢祭祀的範圍從前代帝王擴大到忠臣?義士?孝婦?烈女的層次, 且積極主導建立這些祠廟的行動. 這可能亦對地方官和民間不知不覺中提示一些典範的作用, 而在唐代後期整個國家的管制力量日趨衰微的情況下, 這些所謂國家祭祀型聖賢廟不但數目遽增, 而且出現祭祀的世俗化及民間化的傾向.
在唐代爲數不少的祠廟, 雖是民間或地方官所主動建立, ?未獲得當代政府的正式認可及相應的保護管理, 而基本上?擬或結合國家祭祀型祠廟的理念及原則而發展, 因此拙稿指稱?爲“準國家祭祀型祠廟”. 當然這些祠廟中, 一部分已爲前代所立, ?一部分則爲當代所建, 而這些祠廟的廟神,至少在表面上, 皆有功德於民的共同點. 唐代所建的準國家祭祀型祠廟, 與前代大略相同, 其祭祀對象仍以保護或改善區域人民的生命及生活環境者爲主, 亦卽以有功德於民的地方官最多. 但昰在此無法忽略的是, 雖然大多數有關準國家祭祀型祠廟的傳統資料, 皆强調地方官本身的惠正以及報恩似的立廟過程, 但實際上爲了避免被政府所焚毁的命運, 原爲當地居民所信奉的民間神祇, 寄託於地方官的功德, 以符合儒家信仰觀念的新面貌, 再出現於信徒面前的例子也不少.
除了受到國家祭祀制度及儒家傳統祭祀理念的影響而存在的祠廟之外, 民間尙有無數的祠廟, 在與此完全不同的理念及背景下産生而發展, 拙?通稱這些祠廟爲民間型祠廟. 唐代民間型祠廟, 根據祠主的神性, 大略可分爲?鬼類?神仙類?行業神類等, 而其中數量最多, 意義最重大者, 可說昰?鬼類. 當時一般民衆藏有?鬼具有施降疾疫及禍患的能力, 爲了避免?鬼無歸處而作?, 需要爲他們立廟的基本心態.
在這三類祠廟信仰的開展過程中, 最引人注意的現象是對神祇下賜封號的事情. 原本在武則天及玄宗時期, 唐朝開始對一些神祇援用封爵的原理時, 其施用的範圍較爲集中於國家祭祀型祠廟方面. 但到了唐代後期, 賜封的對象逐漸擴大, 準國家祭祀型祠廟及純粹民間型祠廟中, 亦出現受到政府的封爵及廟額之例子.根據一些宋元地方志所載,唐代後期在江南道常州?杭州?蘇州?睦州?臺州等地, 頗爲流行的純粹民間型的陳果仁信仰, 自僖宗乾符四年(877)首次被封爲忠烈公以來, 其爵位逐漸提高, 甚至到了五代被尊爲帝位. 誠然, 我們無法輕易的斷定, 到了唐末, 政府對神界所採取的下賜封號及廟額的政策已經制度化了. 但是, 我們從不少事列中, 至少可以發現祠廟是否具有封號及?額, 逐步成爲判別淫祠的主要標準之可能性.
?外値得注意的現象是一些祠廟, 從唐代後期開始, 在地理上逐漸擴大其神力所及的範圍, 具有區域保護神的性格. 其實, 一些山神廟及聖賢廟等國家祭祀層次的祠廟, 唐初已經出現分廟(行廟)的形態, ?顯示出本廟與分廟之間的一些連繫關係, 但這種趨勢不限於國家祭祀型祠廟, 不少準國家祭祀型祠廟及純粹民間型祠廟, 也超越村界或縣界, 逐漸成長爲一些區域民衆所共同信奉的區域保護神.
主題語: 祠廟信仰, 禮制, 封號, 廟額, 地域保護神
첫댓글 음...좀 옛날 글이죠.....제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글 입니다. 아마 제가 몇년전에 저장해놓은듯..무슨 학회인듯해요..제가 그런곳에 가서 자료를 많이 다운받았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