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서체를 잇는 영남 서예가 도연(陶然) 김정(金正)선생 글씨 !!
아래에 붓글씨 작품은 도연(陶然) 김정(金正)선생의 글씨다. 도연(陶然) 김정(金正) 선생님은 필자에게 서예를 4년간 가르쳐 주신분이다. 추사 김정희의 영남지방 제자 중에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가 있다. 경상남도 통영출신이다.
성파(星坡) 선생이 앞에 소개한 곤명면(昆明面) 다솔사(多率寺)에 자주 오셔서 필자의 스승인 도연(陶然) 김정(金正)선생님을 알게 되어 사사(師事)하게 된 것이다.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 선생은 경남지방에서 유일한 추사의 제자로 전해진다.
성파(星坡) 선생아래 수제자(首弟子)로 사천시(泗川市) 곤양면(昆陽面) 출신 도연(陶然) 김정(金正)과 진주(晉州) 출신(出身)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 선생이시다.
진주 촉석루의 남쪽 남강물이 흐르는 방향의 현판(懸板)은 촉석루를 복원후 이승만 대통령이 쓴 것이었으나 자유당이 몰락하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후에 이승만이 쓴 현판을 내리고 유당(惟堂) 정현복(鄭鉉福)이 쓴 글이 지금까지 걸려 있다. 촉석루 누각에 오르면 남쪽 방향으로 남장대(南將臺)라는 아주 잘쓴 글씨가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 선생의 글씨다. 남장대(南將臺)는 임진왜란 때 촉석루의 군(軍) 지휘부 이름이다.
필자는 도연(陶然) 김정(金正) 선생의 첫 제자다 1959년 무렵 부터 방학 때와 토일요일을 틈타서 4년간 붓글씨를 배웠다. 언젠가 그곳에 있는 면사무소에서 차트(Chart)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필자의 붓글씨를 본 도연(陶然) 김정(金正) 선생이 “너 나에게 붓글씨 배워라” 하시면서 “네가 나의 1호 제자다”하시었다. 필자의 나이 19~20세 무렵이다. 그때 도연 선생님은 60세를 갓 넘은 연세로 기억된다. 그 당시는 붓글씨를 가르치는 일정한 장소도 없었다.
그 동네에 기생출신 여주인이 (이름이 옥?) 점잖은 사람만 상대하는 술집을 차리고 있었다. 그 술집 문간방을 빌려서 그 여주인과 필자가 같이 배웠다. 화선지가 귀하던 시절이라 신문지에 글을 썼다. 도연 선생님과의 붓글씨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벌써 60년 전 일이기 때문에 그냥 추억일 뿐이다.
그때 도연(陶然) 선생님은 출생신고 사망신고등을 써주는 “대서소(代書所)”를 하고 계셨다. 그 후 필자가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제대한 후에 바로 서울로 왔다.
세월이 흐른 후 명절에 고향을 찾으니 도연(陶然) 선생님이 서실(書室)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붓글씨를 가르치고 계셨다. 그때 선생님의 춘추가 80세 무렵이라고 기억된다. 한 가지 우습다고나 할까 명절에 고향을 찾을 때 도연선생님께 배운 붓글씨 쓰는 한사람이 아주 희한한 서체를 쓰면서 추사체를 전수 받았다는 말을 듣고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었다.
추사체(秋史體)를 안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추사체는 예서(隷書)의 조형미(造形美)기 중심이다. 외람스런 말이지만 은초나 도연 선생님도 “운필(運筆)이나 정신은 추사체”에 있겠지만 글씨 어디서도 추사체(秋史體)를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선생님께 평생에 죄송한 것은 필자에게 집에서 연습하라고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 선생의 글씨 한 폭을 주셨는데 필자가 군대에 있는 동안 집에서 그 글씨의 소중함으로 모르고 분실한 것이다. 이제 도연(陶然) 선생님도 95세에 돌아가시고 필자도 죽을 나이가 되었으니 저승에 가서 다시 사죄를 드려야 겠다.
이래글씨는 인터넷에서 도연(陶然) 김정(金正) 선생님의 글씨를 모은 것이다. 대부분 80세 이후에 쓰신 것이 많다. 필자는 글씨를 보면 도연(陶然) 스승님의 글씨를 금방 안다. 도연(陶然) 스승님의 붓글씨는 붓을 내릴 때와 운필(運筆)할 때와 거두어들일 때 특이한 점이 있다. 도연 스승님의 글씨에 훤히 나타나는 것을 필자는 안다.
농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