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우스 7세가 종교 개혁을 단행한 계기는 플랑드르의 백작 로베르트 1세가 교황청의 허가를 거치지 않고 테루안느의 람베르트를 주교 서임을 했기 때문입니다. 매관매직을 한 거죠. 뭡니까, 대립 교황인가요? 크킹에서도 이 짓을 했다간 파문당하기 십상이죠.
그레고리우스는 이 문제를 쉽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지속적으로 테루안느 지방을 개혁하려 간섭했습니다. 너 파문 당할래, 개혁할래? 하면서 협박이란 이름의 개혁을 시도한 겁니다.
하지만 카노사의 굴욕의 주인공인, 하인리히 4세의 파문 당시의 상황을 보면 성직매매는 세속 군주들 사이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고 교황청과 꾸준한 마찰을 일으켰습니다. 세속 군주들에게 성직을 산 이들은 성직자가 기본적으로 가져야할 법도를 무시했습니다.
결혼을 금지 하지만 결혼을 하고, 사유 교회는 화원을 해야 하지만 화원하지 않고, 성직매매가 금지인데 매매를 하는 등, 교황 레오 9세가 무덤을 박차고 일어날 일들을 저지르고 다녔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러한 성직의 규율을 어지럽히는 성직 매매를 개혁하고 싶었던 거죠.
하지만 세속 군주만 조진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럽 대륙에 퍼진 교회들이 세속화 되어 세속 군주들과 유착한 상황이었습니다. 즉, 그레고리우스의 적은 세속 군주들뿐만 아니라 세속화된 교회와 고위 성직자들이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적절한 법령으로 그들을 파문 때리고 교황청과 협력적인 세속 군주들의 힘을 빌려 종교 개혁을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레고리우스는 교회의 법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교회 법학을 겉핥은 열정만 앞서는 풋내기 개혁가였죠. 당연히 그의 성명문과 편지들에는 정당한 근거가 없었습니다. 명분은 있는데 근거가 없다니... 그래서 그레고리우스는 성경 내용을 자주 인용했습니다. 그런다고 없는 법적 근거가 나올 리 만무하지만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레고리우스의 개혁 방향은 본인 만 알고 주변에선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체계적인 논법 없이 감정을 호소하니 개혁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도 책 좀 봤겠지만 세속 봉건 군주들과 세속 교회들은 음모와 책략의 달인들이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그들을 적그리스도라 불렀지만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레고리우스는 때 쓰듯이 모든 직위 중 최고는 교황이며 군주들은 교황의 말을 따라야 하고 모든 보편성은 교황에게 있고 황제도 폐위 가능함 ㅇㅇ 등의 심히 참피스러운 `교황 법령`을 포고합니다. 대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저승에서 땅을 치고 통곡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요. 그레고리우스 1세는 분명 보편성이란 교황의 것이 아니고 총주교의 것도 아니며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라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즉, 그레고리우스 7세의 행동은 이제 것 유지해온 질서를 무너트리는 짓이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가 원하던 아니던 이건 종교 개혁이 아니라 흩어진 교회의 권위를 한군데 모으고 권력 기반을 다지려는 권력 싸움이었던 거죠.
논리가 안 되니 그레고리우스 7세에겐 파문 혹은 이단. 이 둘 뿐이었던 겁니다.
하인리히 4 세시여 그레고리우스 대갈통을 부셔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