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해병대 가족모임 카페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 좋은글·감동글 스크랩 가슴에 내려앉는 시 모음11 [BGM有]
1142기 허비 추천 0 조회 46 12.02.07 00:1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자살/류시화

 

눈을 깜박이는 것마저
숨을 쉬는 것마저
힘들 때가 있었다
때로 저무는 시간을 바라보고 앉아
자살을 꿈꾸곤 했다
한때는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
내가 남을 버리는 것보다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가 흙 위에 쓰러지듯
그렇게 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당신 앞에
한 그루 나무처럼 서 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이외수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 건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십상이지

 

화투판 끗발처럼 어쩌다 좋은 날도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그때 뿐이지
어느 날 큰 비가 올지
그 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개똥같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 건 행복한 거야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임이 오시던 날/노천명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
늦으셨다 노여움이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너는 아프냐, 나는 무섭다/임영준


너는 삶이 아파서 어찌 했더냐
세상이 아프고 힘겨울 때 무엇이었더냐

 

반응이 없는 하늘을 향해 대갈하고
눈 부른뜬 채 새벽을 맞이했더냐
어둠속에서 모반에 떨다가 재만 남았더냐
하고 싶다 라는 말 대신에
피끓는 시 한편 남겨놓았더냐
시인으로서 카랑카랑하게
제대로 된 화두 하나 던져 놓았더냐

 

풀리지 않는 매듭을 보면
너는 어떠냐, 나는 무섭다
행동하지 않고 입만 나불거리는
너와 내가 늘 무섭다

 

 

 

 

 

미안하다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남편/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썩어야 사랑이지/박창기


세상에 좋은 말도 많지만
사랑한다는 건
날마다 너를 위해 나를 죽이는 것

 

지고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드는 일인지 잘 알지
자존심 상하면 금방 토라지고
제 뜻에 맞지 않으면 짜증내는
너를 위해 내가 살아가는 길은
나를 죽여 썩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것
어찌 보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여겨지지만
사랑하지 않고는 잠들 수 없다면
사랑하면서 스스로 썩는 것이
어쩌면 더 향기로운 아름다움일지도 몰라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것
돋보이고 싶어하는 건 죄다
사랑하지 않는 거다
겨울 가뭄에 봄비 같은 사랑이라면

 

 

 

빨랫줄/신미균


이불 하나 널었는데도
빨랫줄이 휘청거리며
축 늘어진다
아이들 청바지와 양말 옷옷 몇 개 너니까
내 치마와 수건은 널 수도 없다
생활이 너무 무거웠구나
바지랑대를 받쳐
겨우 줄을 조금 올려본다
우리 식구 모두
그에게 물 묻은 몸을 널어 말리면서도
그가 얼마나 무거워하는지
몰랐다
퉁기면 퉁퉁 소리가 나는 기타줄처럼
항상 그렇게
팽팽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쳐다본
그의 이마에
빨랫줄 하나
길게 늘어져 있다

 

 

떠난 애인에게/양애경


네가 먼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시간
나는 강의실로 들어가고 있었어
잘 가, 잘 살아,라고
바닥에 뒹구는 잎새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숨겨 나는 말했어
하늘도 한 번 바라보았어
구름이 한두 뭉치 있지만 푸르더군

 

우린 화를 내다 여러 해의 그리움을 마감해 버렸어
신부가 바뀌었다고 생각지 않니?라고 나는 마음 속으로 물었어
들렸어
슬프게,
그래, 라고 하는 네 마음

 

우린 매정한 체 하느라고 애를 썼어
사실은 자신이 없어서였을 뿐인데
그게 효과가 있었지
충분히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거지
세상에 충분한 사랑이 있다는 것처럼
아주 거만했지

 

물론 돌이킬 순 없지
그냥 이렇게 말하는 거지
어제부터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고

 

우리에게 그동안 배워온 세상 사는 기술이 있지
(배신하고 배신당한 일이 한 번 뿐인가
살다 보면 만나고 헤어지고 그러는 거지)

 

그게 좋아
아무쪼록 우리 죽을 때까지 그 가면 뒤에 숨어 있자
맨 얼굴 내밀지 말자

 

나머지 삶도 살아야 하니
잘 가, 다시는
이승에서 부르지 않을 이름

 

살아가는 일이 견뎌내는 일이 될지라도
잘 가, 잘 살아,
우리 이렇게 살아 가


 

 

 

개같은 가을이/최승자


개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있는 기억의 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안도현


속을 보여주지 않고 달아오르는 석탄난로
바깥에는 소리없이 내리는 눈


철길 위의 기관차는 어깨를 들썩이며
철없이 철없이도 운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하는 거니?
울어야 네 슬픔으로 꼬인 내장 보여줄 수 있다는 거니?


때로 아무 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번 목숨을 걸 때가 있는 거다
침묵 속에도 뜨거운 혓바닥이 있고
저 내리는 헛것 같은 눈, 아무것도 아닌 저것도 눈송이 하나하나는
제각기 상처 덩어리다, 야물게 움켜쥔 주먹이거나


문득
역 대합실을 와락 껴안아 핥는 석탄난로
기관차 지나간 철길 위에 뛰어내려 치직치직 녹는 눈



 

오늘도/김용택

 

 오늘도 당신 생각했습니다
문득문득
목소리도 듣고 싶고
손도 잡아보고 싶어요
언제나 그대에게 가는 내 마음은
빛보다 더 빨라서
나는 잡지 못합니다
내 인생의 여정에
다홍꽃 향기를 열게 해 주신
당신

 

내 마음의 문을 다 여닫을 수 있어도
당신에게 열린 환한 문을
나는 닫지 못합니다
해 저문 들길에서
돌아오는 이 길
당신은
내 눈 가득 어른거리고
회색 블럭담 앞에
붉은 접시꽃이 행렬을 섰습니다

 

 

 

 

 

 

 

 

기다림/이생진


너만 기다리게 했다고 날 욕하지 말라
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만큼 기다렸다
이상하게도 같은 세월에
엇갈린 입장을
물에 오른 섬처럼
두고두고 마주 보았다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고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詩,

시는 원체 주관적이여서 추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저는 한 시인의 시를 모아둔 시집보다는 여러 시인의 시가 묶인 시집을 구입하는 편인 터라-이 경우 호불호가 심하겠지요-제 개인적으로 권해드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카페에 스크랩 된 시 모음이 올라오는 걸 보면 뿌듯해요. 이거 내가 올린 건데, 하고 우쭐거리기도 하고요. 아무튼 한분이라도 시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는 게 즐겁습니다. 그리고 오타 같은 것을 발견하면 수정을 하긴 하는데, 이미 스크랩한 것들은 어쩔 수가 없으니 보셔도 너그럽기 넘겨주시길 바래요. 10탄의 bgm은 봄날은 간다ost였고, 이번 편의 bgm은 유니스 황의 '마음'이란 곡입니다.

 

출처 : 엽기 혹은 진실..(연예인 과거사진)  |  글쓴이 : 마성의 여동생 원글보기

 

 

 

 
다음검색
댓글
  • 12.02.07 14:43

    첫댓글 문득 여고시절때의 생각들이 새록새록나는것은 아름다운 시를 눈으로 담을때 많이 나네요~
    그땐 모든시를 다 품을것처럼 마음도 컸던것같은데....지금은 ㅠㅠㅠㅠ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