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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크리스천 영성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운영자(고집사)
한국에는 두 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대형교회고 또 다른 하나는 대형교회가 되고 싶은 교회이다. 교회성장에만 집착하는 한국교회의 기형적인 탐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비유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교회의 본연의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한 결과라는 말도 하지만, 실상을 파헤쳐보면 세속적인 성공과 변영을 추구하는 욕망의 또 다름 모습인 경우가 흔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기업주가 재벌회장이 되기를 희망하는 것처럼, 크고 웅장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는 것이 목회성공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게 대부분의 목사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현상이다. 물론 합리적이고 지속적인 성장으로 대형교회가 된 것은 칭찬해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세속적인 목적과 세상적인 방법으로 대형교회를 추구하고 있다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교회이며 목회자도 하나님을 떠난 사람임에 틀림없다.
대형교회에 목매다는 이유
왜 목사들은 모두 대형교회에 목을 매달까?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업이나 투자를 해보면 금방 알게 된다. 얻어 누리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사람의 욕망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주택가에 원룸을 얻어 예배처소를 삼고 있다. 교회인 것은 분명하지만 일반적인 모습의 교회가 아니다. 정규적으로 주일예배나 수요예배도 드리고 있지만 밖에서 보면 간판도 없고 십자가도 걸려있지 않다. 전형적인 가정교회이다. 물론 교인도 몇 명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사역을 하다 보니 가까운 분들이 같이 예배드리자고 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공동체이다. 물론 목회수입이 없어 필자는 생업으로 아내와 화장품 방문 판매업을 병행하고 있다. 원룸에서 예배를 드리다보니 교인들이 불만이 적지 않다. 그래서 번듯한 교회로 옮기자고 하지만 아직 그럴 생각이 없다. 번듯한 교회로 옮기면 임대료와 관리비가 더 들어갈 터이고 그렇다면 필요이상으로 교인들의 헌금을 요구해야 한다. 필자는 그런 불편한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 물론 교인이 너무 많아 도저히 지금의 예배장소로 감당하지 못한다면 생각해 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돈 때문에 신앙의 자유를 잃게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환경이 열릴 때까지 지금의 장소를 유지할 생각이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는 격으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대형교회는 아니라도 중견교회 이상을 소망하는 목사들의 속내가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목사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게 바로 교인들의 숫자이다. 그래서 최소한 수백 명이 된다면 칭찬하지만 겨우 십여 명에 불과하다면 걱정스런 눈치를 보인다. 세간의 잣대로는 많은 교인을 둔 목사는 능력 있는 목회자로 여겨지지만, 퀴퀴한 냄새가 밴 지하실에서 겨우 몇 명을 모아놓고 설교하고 있다면 실패한 목사로 분류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또한 교인의 숫자는 목회자의 삶의 질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우리나라 교회의 절반이상이 미자립 교회이다. 미자립 교회란 연간 재정예산이 2,000만원이 안 되는 교회를 말한다. 월 170만원으로 임대료에 관리비, 공공요금, 차량운행비를 제외하면 최저생계비도 안 되는 돈이 목회자의 사례비이다. 말하자면 일반가장의 용돈 수준이다. 이렇게 현실적인 삶의 고통에 시달리다보면 큰 교회를 소망하는 것이 당연해진다. 적지 않은 경우, 목회자의 아내가 직업을 갖고 생계비를 벌어오기도 하지만 성에 안 찬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인을 불리는 것이다. 물론 외국이나 필자처럼 목회자가 생업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어찌된 일인지, 우리나라는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갖는 다면 믿음이 없다는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바울사도는 교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자신과 동료들의 선교비용을 대기위해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다고 했는데(살전2:9), 그렇다면 바울이 믿음이 없어서 그랬는가? 성경에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먹지도 말라고 했다.(살후3:10) 이는 목회자의 경우에도 예외가 없다. 가난하게 사는 것은 지혜가 없고 게을러서이다. 목회에서 생계비가 나오지 않는다면 다른 수입원이 있어야 사역에 열매를 맺을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다. 또한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면 믿음을 배반한 자이며 불신자보다 악하다는 성경말씀(딤전5:8)을 비추어보면 목회자 이전에 악한 가장이 적지 않다. 어째든 가난하고 궁핍한 삶의 고통은 대형교회로의 갈망을 추구하게 만든다. 교회만 커지면 자연스레 목회자의 수입도 따라 커지게 마련이다. 아시다시피 대형교회가 아니더라도 중견교회만 되면 목회자의 수입은 엄청나다. 게다가 집회 강사료나 촌지(?)의 부수입도 짭짤하다. 게다가 자녀 교육비나 사택 공공요금, 도서비 등이 교회에서 지급된다는 것을 따져보면 총수입은 웬만한 회사 사장이 부럽지 않다. 물론 이는 담임목사의 경우만 해당된다. 아무리 대형교회나 중견교회라도 부교역자들은 그림의 떡이다. 부교역자들은 곧 교회를 떠날 사람이라는 분위기가 손을 오그라들게 하고, 가난해야 영성이 유지된다는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게다가 교인들의 헌금으로 생활하는 목회자들은 당연히 교인보다 수입이 더 많아서는 안 되다는 암묵적인 한계도 있는 듯하다. 그래서 모든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교회를 개척해서 대형교회로 성장시키는 것만이 춥고 배고픈 터널에서 탈출하는 비상구로 여긴다.
결국 대형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는 게 남들이 박수쳐주는 목회성공을 이루는 길이자 대기업 회장 못지않은 럭셔리한 삶이 보장되는 데, 이를 꿈꾸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교인들의 입장에서도 무작정 싫은 것만은 아니다. 교회건축을 하기위해 강요되는 헌금요청을 적당하게 피해갈 수만 있다면 웅장하고 세련된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 되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자랑거리도 되고, 겨울이면 따뜻한 온풍기가, 여름이면 시원한 에어콘 바람이 펑펑 불어오는 세련되고 럭셔리한 예배당에서 설교를 듣고 각종 문화시설을 즐기고 누리는 게 너무 좋다. 이제는 우리네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향상되어 불쾌하고 냄새나는 지하실이나 시끄럽고 좁아터진 상가교회를 다니는 게 너무 불편해 한다. 그래서 담임목사와 적지 않은 교인들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지는 대형교회가 번성하고 있다. 오래 전에 대형건물을 지닌 교회도 다시 허물거나 아예 팔아버리고 새로운 부지를 구해 더 크고 웅장하게 짓는 게 요즘의 모습이다. 그 후유증으로 목회자 부부의 눈물 속에 수많은 지하실교회와 상가교회가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더 이상 고난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짊어지려하지 않는, 이상하게 변해버린 한국교회의 단면이다.
최상의 효과가 입증된 전도방법
90년대를 넘어서면서 한국교회가 침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교단과 신학교, 교회지도자들이 모두 당황해했다. 예전에는 문만 열면 사람들이 교회에 쏟아져 들어오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네 조상들은 궁핍하고 압제받던 봉건주의 시대부터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는 뿌리 깊은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급기야 한국전쟁이후에 피폐해진 산업시설과 절망에 빠진 민초들은 희망과 복음의 소식을 절실하게 기다려왔다. 그래서 새벽마다 교회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찾아들고 방방곡곡에 교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너나없이 궁핍하고 희망이 없었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한줄기 생수가 되어 타는 듯한 목마름을 해소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 오래지 않은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에 기독교의 성장은 세계 역사상 유래를 보기 힘들 정도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베이비 붐세대가 열렸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대여섯명의 자녀는 물론이고 초등학교 교실은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했다. 게다가 7,80년대의 눈부신 경제개발로 인해 교인들의 지갑이 두둑해졌다. 아낌없는 헌금으로 수많은 교회와 신학교가 지어졌다. 그렇잖아도 기복신앙이 뿌리 깊은 우리네 민족이라, 적당하게 성경말씀을 접목한 사이비 축복관이 교회의 전도 캐치프레이즈로 맹위를 떨쳤다. 예수 믿고 축복 받으라는 것이다. 성경의 축복관은 영혼이 잘되는 것을 골자로 말하는 것이지만, 성경에 무지한 보통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일반적인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모두들 놀라운 경제성장이 우리나라를 축복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입을 모았다. 이러한 상황을 부추긴 게 그간의 목회자들이었다.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을 설득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한국교회는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으며 급기야는 기독교인이 국민의 4분의 1인 일천만 명이 넘어섰다.
그렇지만 90년대를 넘어서자 상황이 달라졌다. 불황의 어두운 그림자가 스멀스멀 덮치더니 급기야는 IMF 외환위기사태가 터졌다. 예수를 잘 믿으면 부자가 되고 성공한다는 환상이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집사고 부유하게 살았던 게 예수를 잘 믿어서라는 목사들의 설교에 의심이 들었고, 우리나라에 들이닥친 유례없는 초고속 경제성장덕분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더 이상 예수만 잘 믿으면 부자가 되고 잘 산다는,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던 전도 캐치프레이즈가 씨가 먹히지 않았다. 게다가 베이비붐을 타고 폭발적인 인구증가가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교육비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본 신세대 부모들은 더 이상 자녀를 두지 않으려 했다. 국민소득이 높아져서 삶을 즐기느라 영혼에 대한 관심도 점점 떨어져서 전도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교회만 세우면 저절로 교인이 찾아들던 황금시대는 막을 내린 셈이다. 희생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순교자정신으로 견고한 믿음을 일구던 기성교인들은 늙어 세상을 떠나가고 냉철하고 합리적인 신앙방식으로 무장한 신세대 교인들로 교회의자가 채워졌다. 그들은 과도한 교회헌금의 요청에 싸늘한 반응을 보였으며 부흥사를 동원한 교회건축 부흥회에도 반응이 없었다. 비성경적이고 관행적인 방법으로 교회건축을 충당하던 그간의 재정모집 방법들이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격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새로운 교회로 옮기려는 이들은 자기건물이 없는 개척교회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 했다. 그간의 비정상적인 건축헌금을 강요했던 부작용이 낳은 산물이다. 신세대들은 더 이상 비정상적인 신앙심에 자신의 돈과 삶을 희생하지 않으려했기에 이미 웅장하고 럭셔리한 대형교회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형교회 목회자의 설교는 고등교육을 받은 신세대 교인들의 귀를 만족시켰으며 럭셔리한 교회시설을 누리는 즐거움도 한몫하기도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무리하게 건축헌금을 요구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기대심리가 가장 컸다. 그래서 대형교회를 지어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방법이 최고의 전도방법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충분한 재정으로 그간 방송설교를 독점하다시피한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반면에 지하실과 상가에 세들어 살던 개척교회에는 사람들의 발이 뚝 끊겼다. 그간 다니던 교인들도 과도한 헌금강요와 자질이 부족한 목회자에 실망해서 점점 대형교회로 옮겨갔다. 그러자 자본주의 시장처럼 교회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졌다. 대형교회는 더 큰 대형교회로 몸집을 불리지만 작은 교회들은 점점 문을 닫는 현상이다. 웅장하고 럭셔리한 대형교회를 짓는 게 최고의 전도방법이 된 셈이다. 교인 한사람을 얻기 위해 들이는 노력보다 시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건물을 짓는 데 훨씬 효과적이라는 게 증명이 되었다. 그래서 목회성공을 꿈꾸는 대부분의 목사들은 교회를, 그것도 웅장하고 럭셔리하게 교회건물을 짓는 일에 인생을 걸게 되었다.
과도한 대출이 그들의 발목을 잡다.
중견잡지 “시사저널”은 최근 발표한 기사에서 국내 대형교회들이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는지 해당교회의 등기부등본을 통해 실태를 파악했다고 한다. 그중 몇개를 소개하면,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사랑의 교회”는 2012년에 완공될 신축공사에 600억원, 온누리교회 91억원, 새문안교회 208억원, 안산시 상록구에 있는 안산동교회는 3백28억원, 용인 수지구에 있는 지구촌교회는 188억원, 같은 지역의 새에덴교회는 144억원, 인천 부평구에 있는 주안장로교회 130억원, 인천 숭의교회 107억원 등을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가 발췌한 내용은 등기부등본을 열람한 것이므로 사실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발표하지 않은 대형교회들도 신축건물을 지으면서 금융기관에서 얻은 크고 작은 빚이 수십억에서 수백억원이 넘을 것이 분명하다. 교회들이 빚을 얻는 이유는, 대부분의 교회건축비용이 교인들의 헌금만으로 되기보다는 은행 대출을 해서 충당하고, 그것들을 교인들의 헌금으로 갚아나가는 방식이 관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대형교회의 건축과정을 배워 다른 중견교회들도 교회신축을 하는 과정에서 금융기관의 대출을 얻는 것을 필수적인 방법이라고 따라하고 있다.
잠 22:7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막대한 대출을 얻어 교회를 신축하는 것은 그간 교회의 관행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성경에서 밝히는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빚을 싫어하시며 빚진 자는 채권자의 노예가 된다며 강한 어조로 이의 해악을 경고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대출로 벌어들이는 수익시스템은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금융기관의 주된 수입원이다. 빚을 얻는 이유는 대부분 쾌락을 즐기고 싶어 하는 방탕함과 준비되지 않았음에도 미리 누리려는 조급함의 결합이며, 한마디로 이는 탐욕이라는 악한 성품이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상 금융기관이 차지하는 영향력을 엄청나기 때문에 정치가와 관료들은 금융기관의 사업을 돕고 있으며 엄청난 돈을 들인 광고효과로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다. 자신의 능력으로 빚을 갚을 수 없는 악성부채로 시달리는 사람들의 궁핍하고 피폐한 삶이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이는 과소비와 충동구매로 이어지는 신용카드의 남발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무리하게 빚을 얻어 쏟아 부은 투자와 사업도 빚에 대한 무지와 어리석음의 결과이다. 필자가 재정관리 사역을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부채가 악한 영의 공격무기임을 꿈으로 보여주셨다. 성경에도 빚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행위라고 하지만 이를 가르치는 교회는 거의 없다. 교회조차도 빚을 얻어 몸집을 키우는 입장에 교인들에게 빚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젊은 시절에 과도한 빚을 얻어 사업에 실패한 게 평생 평안한 삶의 발목을 잡혔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다.
빚을 얻는 또 다른 해악이 교인들의 귀한 헌금이 배부른 금융기관의 금고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수백억의 빚을 지고 있다면 이자비용만 해도 일년에 수억 원이 될 것이다. 필자가 아는 교회들도 대부분 엄청난 금액의 돈을 대출이자로 내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의 교회에서 금융기관에 내는 이자를 따져보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될 것이다. 그 반면에 우리나라의 교회에서 불우한 이웃을 위한 구제비용으로 쓰고 있는 비율은 재정의 3%도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헌금으로 들어온 재정의 대부분이 교회 건물을 유지하고 목회자들의 사례비로 나간다. 구제에 쓰려고 해도 돈이 없다고 한다. 대출이자로 엄청난 금액을 내고 교회건물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비용도 만만찮다. 이 모든 이유가 크고 웅장한 교회건물을 빚을 얻어 무리하게 지은 탓이다. 하나님은 헌금의 쓰임으로 목회자들의 생활비와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에 우선적으로 사용하기를 바라셨다.(신14:22~29) 그렇지만 우리네 교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자연스럽게 교회가 성장해서 그동안 헌금해서 모은 돈으로 교회를 건축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지만 교회 건물을 근사하게 지어 놓으면 교인이 늘어난다고 생각해서, 교인들을 담보로 잡고 앞으로 들어올 헌금을 이자로 내겠다는 계산으로 교회건물을 짓는 것은 악한 일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가르쳐서 따르게 해야 하는 교회가 먼저 세속적인 의도와 세상적인 방법으로 빚을 얻어 교회를 짓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작금의 세태가 안타깝다. 교회는 웅장하고 번듯하게 지어놓았지만 하나님이 떠나셨다면 빈껍데기일 뿐이다. 교회가 침체되고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 이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빚을 얻어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하기에 하나님이 교회를 떠나셨기 때문이다.
대형교회는 초신자의 신앙성장이 어렵다.
필자는 평신도 시절에 작은 교회와 대형교회를 두루 다녀보았다. 작은 교회는 담임목사의 탁월한 영적 능력과 리더십이 필요한데,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작은 교회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말하자면 작은 교회에는 자질이 부족한 목사가 많았다. 그래서 목사의 영적 능력이나 건강한 목회철학이 검증되지 않았기에, 이에 대한 분별력과 통찰력이 없이 아무 교회나 선택했다면 나중에 후회막급일 것이다. 그래서 일단 검증된 곳이라고 볼수 있는 대형교회를 선택하기 쉽다. 대형교회는 사람들이 붐벼 복잡하기는 하지만 장소의 쾌적함과 다양한 시절 그리고 담임목사의 설교 등이 일단 흡족할 것이다. 게다가 여러 소그룹이나 다양한 봉사단체가 있어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면 자신의 신앙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기도 하다. 게다가 맘만 먹는다면 마음에 드는 교우들을 사귈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렇지만 대형교회는 특성상 담임목사를 직접 만날 일은 거의 없다. 무슨 행사에서나 얼굴을 가까이서 볼수 있을 것이며 주일 예배 설교단상에서 만나는 게 전부일 것이다. 대신 잘 짜여진 조직표에 따라 수많은 부교역자가 소그룹을 지도하고 있다. 부교역자도 목회자일진대 일반교회의 담임목사와 비교해서 부족한 게 없을 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대형교회의 특징은 담임목사의 커다란 리더십아래서 통 큰 선교와 봉사에 참여하는 자긍심을 느낄 수 있고 다양하고 풍부한 신앙프로그램으로 더 많은 교육을 받으며 교인으로 있는 각계 각층의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좋아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이유이기도하다. 그렇지만 이는 신앙이 어느 정도 성숙되어있고 믿음이 적잖게 뿌리내려져 있는 교인인 경우에 해당된다. 이들은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동력을 얻어 자신의 은사에 맞는 프로그램에 자발적이고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다양한 소위원회에서 자신이 봉사할 역할을 찾는다. 그렇지만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이거나, 연륜이 오래 되었어도 신앙이 미성숙한 교인의 경우는 다르다. 물론 대형교회에도 신앙의 성숙도나 초신자에 알맞은 프로그램을 갖고 있으며 이런 사역을 전담하는 사역자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효율성에 있어서는 미지수이다. 게다가 대형교회는 부교역자가 담임목사의 열정을 갖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고 담임목사의 목회 방식이나 철학을 넘어서는 행위도 금기시되어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부여받은 책임에서 좀처럼 벗어나려하지 않는다. 게다가 많은 수의 교인들을 지도하는 것 때문에 어느 개인 한사람에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도 버겁다. 그래서 대형교회에서는 적극적으로 따라오려는 이들에게 관심을 쏟을 수 밖에 없다. 소극적이며 미지근한 초신자들은 이내 부교역자들의 관심에서 사라져버릴 것이고 그러다가 교회를 떠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나 과거에 신앙성숙이 멈춰버린 인들에게는 개인적인 일대일의 맞춤형지도가 최선책이다. 말하자면 교역자가 멘토가 되어 신앙전반이나 영적인 가르침을 해주어야 한다. 또한 개인적으로 맞닥뜨리는 문제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이들의 문제를 통찰력과 분별력을 갖춘 멘토가 때에 따라 상담을 해주고 오랜 시간동안 피드백 과정을 통해 신앙이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다. 이런 개인맞춤형 교육은 한 교역자가 최소한의 인원을 책임지고 오랜 시간 지도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물론 대형교회에서도 이러한 교육을 할 수 없는 게 아니지만 소극적이고 성과가 더딘 개개인들을 참고 기다리면서 맞춤형 교육을 하는 게 거대규모의 교회 시스템 상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 맞춤형 교육은 작은 교회가 적격이다. 작은 교회는 담임목사가 가르치고 관리하는 인원이 적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들의 삶과 신앙에 맞추어 교육시킬 수 있다. 문제는 작은 교회라도 성경적인 깨달음이나 영적 능력이 탁월한 목사가 있어야 가능하다. 인원이 작더라도 리더십이나 영적 능력이 없다면 차라리 대형교회에 다니는 것이 낫다. 열정적으로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한다면 좋은 열매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공생애 시절에 12명의 제자들의 가르치는 데 혼심을 기울이셨다. 예수님의 교육방침은 손수 모범을 보임으로서 제자들이 보고 배우고 몸에 익히도록 하셨다. 이러한 교육방법은 최고의 효과를 거둘 수 있지만 소수 인원만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대형교회가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많이 있지만 일대일 맞춤형교육이나 소그룹 교육의 효과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초신자이거나 신앙이 멈춰버린 교인들은 탁월한 리더십과 건강한 목회철학을 지닌 작은 교회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안타깝게고 우리나라의 교회들은 너나 없이 대형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이미 신앙이 성숙한 크리스천에게는 더 없이 좋은 교회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대형교회는 형식적인 예배에 만족하거나 단지 머리수를 채워주는 곳에 불과하다. 초신자이거나 미성숙한 교인들에게 맞는 좋은 교회의 교인규모는 100여명을 넘지 않은 수가 가장 좋다.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적어도 200~300명의 교인수가 있는 교회가 적정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연스럽게 성장한 대형교회도 필요하겠지만, 신앙성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교인들은 잘 가르치는 작은 교회를 찾아야한다. 겉만 번드르한 대형교회는 절대 피해야 한다. 천국은 대형교회에서 단체로 입장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