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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산 용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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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림의 소리 스크랩 부여기행(2/4) 구드래나루터에서 고란사로
현림 추천 0 조회 49 16.01.09 22: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부여기행(2/4) 구드래나루터에서 고란사로

 

궁남지연꽃을 돌아본 후 고란사로 향했다. 옛적에 이미 부소산성은 다녀온 터라

이번에는 황포돛배로 유명한 구드래나루터에서 돛배를 타고 고란사로 가 보기로 했다.

무더운 여름 날씨. 올해는 유난히 더 더운 것 같다.

그나마 하늘이라도 맑았다면 백마강의 푸른 물결을 즐겼을 텐데

불행히도 하늘은 아침부터 내내 재빛이다. 말없이 흐르는 백마강, 물빛 또한 그렇다.

 

 

 

 

@구드래 나루터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 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

이 명칭은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하는데, 삼국유사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 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이라 하였는데 뒤에 구드래로 변하여 구드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구들돌이란 옛날 한옥에서 난방목적으로 방고래 위에 덮어 바닥을 만드는

얇고 널찍한 돌을 말한다. 흔히들 구들장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구들돌이다.

 

 

 

또한 백제를 오가는 왜의 배들이 구드래 나루터를 통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들어 왔는데,

일본 사람들은 백제를 百濟라 쓰고 구다라로 읽었다는 것에서 연유한다는 설도 있다.

이는 백제를 동경했던 고대 일본인들이 그들의 고대 오사카를 구다라스(百濟州)로 칭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구두래 나루를 건너 울성산 남쪽 기슭에는 백제 법왕 2(600)에 세운 왕흥사가 있고,

옛 문헌에 사비의 강으로 기록된 백마강이 부소산 기슭을 따라 흐르고 있다.

백마강 양쪽에는 왕흥사와 호함리절터, 부소산성, 부여나성을 비롯한 당시의 유적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소중한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중요한 유적이다.

 

 

 

 

 

 

 

 

 

 

 

 

 

 

 산 중앙에 낙화암이란 붉은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고 한다.

 

 

 

 

 

 

고란사의 극락보전. 이상하게도 내가 갈 적마다  보수 중이라서 옆 고란사가 붙은 편액은 담지 못했다.

 고란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부소산(扶蘇山)에 있는 절이다.

한자로는 고란사(高蘭寺) 또는 고란사(皐蘭寺)로 표기된다.

면적은 170.9.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1984517일 지정되었다.

 

범종각인 영종각

 

[사찰내역]

고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절의 연혁에 대해서는 백제 말기에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이었다고도 전한다.

혹은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고려 현종 19(1028)에 중창된 사찰이라고도 한다.

중창한 고란사(高蘭寺)는 그 후에 법당 뒤편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皐蘭寺)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삼성각은 절벽 위에 세운 절이라 그 내부가 협소하다.

 

 

 

@법당은 1028(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인조 7)1797(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고란사의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고,

주위에는 낙화암·조룡대(釣龍臺사비성(泗?城) 등이 있다.

절 일원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여 고란사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보살좌상(扶餘 皐蘭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菩薩坐像)

 조선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되며 2011720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41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란사 법당에 봉안된 삼존불상은 본존과 향 왼쪽의 보살상은 동일한 양식의 고불(古佛)이지만

다른 보살상은 현대에 조성하였다. 본존은 중품하생인을 결한 아미타불이며,

보살상은 삼존의 배치상 대세지보살상이지만,

오른손을 가슴까지 올리고 왼손은 무릎 위에 있는 점으로 보아 관음보살상일 가능성이 높다.

 

 

아미타여래는 방형의 얼굴에, 머리를 육계의 구분 없이 정상계주와 중간계주가 표현하였다.

이목구비는 반개한 두 눈은 살짝 올라가 있고 코는 넓적하며 입은 작게 표현하였고

짧은 목에 머리를 앞으로 살짝 숙인 움츠린 자세로 측면에서 보면 입체감이 떨어지고 불안정되어 보이나,

정면의 모습은 어깨를 넓고 허리가 길면서 무릎 높이를 높게 하여 비교적 안정된 비례를 갖추고 있다.

법의는 안에 편삼을 입은 변형 통견식으로 착의하였으며,

왼쪽 팔꿈치에 맞주름이 표현되었으며, 배 부분의 편삼의 옷주름은 평면적으로 처리하였다.

 

 

보살좌상의 상호와 신체 비례는 여래상과 동일하며 보살 특유의 보발은 작고 낮으며,

귀를 감싸고 어깨로 늘어뜨린 수발의 표현은 조선후기 보살상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가슴에 세 줄로 늘어진 목걸이는 보살상의 목걸이 표현과 유사하지만 꽃이나 수술의 표현은 질박하며

법의는 여래상과 같은 편삼을 안에 입은 변형통견식으로 입고 있다.

양쪽 어깨에는 특이하게 맞주름이 표현되어 있고

옷주름의 표현도 여래상과 마찬가지로 평면적이고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고란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보살상은 움추린 자세와 신체 비례,

유난히 큰 방형의 얼굴과 표정은 매우 특이하여 조선후기에 활동한 장인의 맥락과 계보가 쉽게 연결되지 않는 작품이나

착의법이나 자세, 영락 등의 표현에서 전체적으로 조선후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비록 조선후기에 활동한 조각승의 조각 수법과 상통하는 예는 찾을 수 없으나

오히려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조각승의 한 유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는 점에서

지방회화사 연구 및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고 있다.

(출저: 위키백과에서 펌)

 

 

@고란사 바로 위쪽으로 백마강에 투신한 3천궁녀의 전설이 된 낙화암이 있다.

법당(극락보전) 뒤의 바위틈에는 고란정이 있고, 그 위쪽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자라고 있다.

 

 

@고란초에 얽힌 전설

부여 부소산 낙화암 아래에 있는 고란사 바위틈에서 솟아 나오는 약수에는 갓난아기가 된 할아버지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아득한 옛적 소부리의 한 마을에 금슬 좋은 노부부가 살았는데 늙도록 자식이 없어

할머니는 늘 세월을 한탄하며 다시 한 번 회춘하여 자식 갖기를 소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일산(日山:금성산)의 도사로부터 부소산의 강가 고란사 바위에는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에서 스며나오는 약수에 놀라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다음 날 새벽 남편을 보내 그 약수를 마시게 하였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다음 날 일찍 약수터로 찾아가 보니

할아버지가 없고 웬 간난아이가 남편의 옷을 입고 누워 있어 깜짝 놀랐다.

 

 

할머닌 "아차!" 했다. 도사가 한잔 마시면 삼년이 젊어진다는 말을 남편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갓난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와 고이 길렀는데 후에 이 할아버지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백제시대 최고의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고 한다.

 

 

법당에서 내려 다 고란사선착장

 

배를 타고 바라 본 부여대교의 전경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

백강, 사하(泗河), 백촌강(白村江)등으로 불리는 충청남도 부여 부근을 흐르는 금강은

일반적으로 금강변 부여읍(扶餘邑) 정동리의 앞 범바위[虎岩]에서부터

부여읍 현북리파진산 모퉁이까지의 약 16구간을 일러 백마강이라 한다.

 

선상에서 바라 본 구드레선착장

 

금강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꺾여 흘러서

공주에 이르러 웅진(熊津) 또는 금강이 되고 유구천(維鳩川)을 합하여 남쪽으로 곡류하면서

부여군에 이르러 고성진(古省津) 또는 백마강이 된다.

금강은 백마강을 지나 논산천(論山川)을 합하고

강경을 거쳐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며 황해로 들어간다.

 

 

 

[백마강의 명칭 유래]

백마강은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았던 바위를 조룡대(釣龍台)라 하고

강의 이름도 사하(泗河)에서 백마강(白馬江)으로 바뀌었다고하나,

백제 말기보다 160여년 앞선 무녕왕시대의 기록에 이미 금강을 白江(백강)’으로 표기했던 사실이 있고

역사적으로 말()크다는 뜻으로 써온 것을 감안할 때

백마강은 곧 백제에서 가장 큰 강이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선상에서 바라 본 고란사

   

백마강은 삼국사기에는 백강(白江), 일본서기에는 백촌강(白村江)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도읍이 들어선 이후로 금강의 역할이 더욱 커졌는데,

특히 백마강은 일본, 신라, 당나라, 서역에 이르도록 문물교역의 큰 길목이 되었던 곳이다.

 

 

(구드래나루터)

 

[자연환경]

우리나라 하천이 대부분 하류에서 곡류하고 있는데, 백마강 유역은 금강 하류 중에 곡류가 뚜렷한 곳이다.

백마강의 범위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공주를 지나 청양군 청남면, 부여군 부여읍 및 규암면에 인접한 지역이다.

이 일대에서 백마강은 서남류하는데, 북동으로부터 많은 강이 흘러들어 부여 부근에서

지천, 은산천(恩山川), 구룡천, 금천(金川)이 합류한다. 백마강과 이들 하천이 만나는 지역에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동남부 구릉지대는 백마강 연변의 부여읍 남부와 장암면, 석성면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해발 100m 정도의 낮은 저산성 구릉지가 형성되어 있다.

남동부 저지대는 동남부 구릉지대의 남쪽, 즉 양화면, 임천면, 세도면의 금강본류 유역과

석성면, 초촌면의 석성천 유역에 발달된 충적평야지대로서,

이 지대는 중앙부 저지대의 충적평야와 근본적으로 같은 발달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평야지대이다.

 

 

 

백마강의 기온분포는 평균 11.8이며, 최저 ­2.5(1), 최고 25.3(8) 정도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311이며 강수량의 60%가량이 여름철인 69월 사이에 집중되고 있으며

그 중 7월 강수량이 30%를 차지한다. <출처: 위키백과>

 

 

* 백마강의 볼거리 *

부소산을 휘돌아 흐르는 백마강에는 백제시대의 중요한 국사를 결정했다는 천정대, 낙화암, 조룡대,

조각공원이 있는 구드래, 부산대재각, 스스로 따뜻해졌다는 자온대, 수북정 등

발길이 닿는 곳마다, 뱃길이 가는 곳마다 옛 전설이 있다.

 

 

또한 조룡대는 고란사 아래 백마강가에 작은 섬처럼 있는 바위가 조룡대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침공할 때, 강 건너는 것을 방해하던 용을 이 바위에서 낚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며,

대재각은 구드래 건너편 백마강가 부산의 절벽에 있으며

그 안에는 자연암반에 '지통재심 일모도원이라 쓰여진 각서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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