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경기 안성 서운산 석남사(瑞雲山 石南寺)를 찾아서 ①
- 금광루(金光樓)에서 대웅전(大雄殿)까지 -
11월 15일, 칠현산 칠장사를 두루 순례한 다음, 11시 20분 경 칠장사를 나와 34.3km 정도 떨어진 석남사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석남사 인근에 있는 식당에서 마음에 점 을 찍고 서운산 석남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1시 20분 경이었습니다. 실로 20여년 만에 찾아보는 절이었습니다.
서운산(瑞雲山 547m)은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과 금광면, 그리고 충북 진천군 백곡면과 경계를 이루는 산입니다. 또한 이 산은 칠현산(七賢山)에서 이어져 오는 금북정맥(錦北 正脈)을 천안 성거산(聖居山)으로 연결해 주기도 합니다.
서운산에는 안성을 대표하는 고찰을 품고 있는데, 남쪽에는 청룡사(靑龍寺), 북쪽에는 바로 여기 석남사(石南寺)입니다. 그래서 한때 청룡사를 들머리로 해서 서운산을 오르 고 석남사를 날머리로 하는 산행 겸 사찰순례를 계획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연이 성숙하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불발로 끝난 바 있어 아쉬워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안성 삼대사찰을 순례하면서 비록 산행은 못 하지만 서운산의 남과 북의 고찰인 석남사와 청룡사를 순례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석남사로 향한 발걸음
도솔님 차로 석남사로 발걸음하신 정파님, 공양미를 집에서 정성스레 준비하신 도솔님, 엄마따라 몸과 마음 가벼운 지현어린이 석남사에 도착하였습니다. 아마도 초행이시죠? 저는 승용차가 없었던 20여 년 전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묘법님, 비니초 등 법우님들과 석남사를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도 오래되어 한 번 찾고 싶었던 절입니다.
석남사에 도착했으니 석남사의 대강을 알아볼 차례입니다.
석남사는 안성시 금광면 상촌새말길 3-120(상중리 508번지) 서운산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입니다.
이 절의 창건은 신라 문무왕(文武王) 20년(680)에 당대의 고승 담화(曇華)선사가 창건했 다는 설과 석선(奭善) 스님이 개산(開山)하면서 창건했다는 두 설이 있습니다.
그 후 문성왕(文聖王. ?~857, 재위 839~857) 때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조인 염거대 사(廉居大師)가 영몽(靈夢) 중 대호(大虎)의 안내를 받아 폐허가 된 석남사를 중수했고, 고려 광종(光宗) 때에 혜거국사(惠居國師)가 크게 중건하는 등 이름 높은 스님들이 석남 사를 거쳐 갔습니다. 따라서 이들 스승을 흠모하는 수많은 제자들이 찾아들어 수행지 도를 받았으니, 석남사는 당시 수백인의 참선 승이 머물렀던 수행도량이었습니다.
또한 조선조 태종 7년에는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전국 2,000여개의 사찰을 200여개로 정리 할 때도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하여 지방사찰의 중심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에 세조는 석남사의 전통을 살리고 수행도량의 면모를 지켜나가도록 당부했습니다. 세조 2년(1456)에 세조는 친서교지(親書敎旨)를 내렸습니다.
"석남사에 적을 둔 모든 승려의 사역을 면제하니 수도에만 전념토록 하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 병화(兵火)를 당하여 페허가 되어 터만 남아 있던 자리에 영 조(英祖) 때 석왕사 스님이셨던 해원선사(海源禪師)가 중수했으나 본래의 절 모습을 되 찾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선 높은 누각이 맞이합니다.
두 단의 석축을 쌓아 올리고 누각을 세웠는데 누각의 이름은 금광루(金光樓)입니다. 돌층층대를 올라 누하진입(樓下進入)하면 멋진 풍광이 나타납니다.
서운산 석남사(瑞雲山 石南寺) 편액
금광루(金光樓) 안쪽 모습
석남사는 일주문도 없고 천왕문도 없습니다. 오직 금광루만이 출입문을 대신합니다. 금광루에는「서운산 아래 금광루에서 부처님광명 다시 빛내리」라는 주련이 붙어 있는 데 한 번 읽으니 그 뜻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금광(金光)이란 부처님의 자비광명입니다. 석남사가 지금은 전각이 많지 않아 조촐한 분위기가 나지만, 석남사가 조선 초기에는 자복사원(資福寺院)에 선정될 정도로 사세도 커서 안성을 대표하는 거찰이었다고 합니다.
자복사원(資福寺院)이란 조선시대 초기에 불교를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 있던 전국의 사찰을 각 지방별 주요사찰 일부만 남기고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양종으 로 구분하여 통폐합을 하면서 만든 제도입니다. 자복사찰은 왕실의 안녕과 국가의 국 운융창을 비는 사찰입니다. 이런 자복사찰로 안성을 대표하여 석남사가 선정되었던 것입니다.
주련에는 옛 영화를 다시 구현하고자 하는 간절한 비원(悲願)도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금광루(金光樓) 편액
이곳이 석남사의 제1경이 아닌가 합니다.
금광루를 지나면 나타나는 풍광입니다. 석남사는 층층이 석축을 쌓아 좌우에 전각을 마련했습니다. 우선 한 계단 오르면 왼쪽에는 종무소가 있고, 오른쪽에는 감로수가 있습니다. 또 한 층 오르면 좌우에 삼층석탑이 있고 오른쪽에는 영산전이 있습니다. 다시 한 층을 더 오르면 대웅전이 우뚝 서 있습니다.
석남사종무소 모습
석남사는 단종의 왕비였던 한 많은 정순왕후(定順王后)가 석남사로 와서 처음 머리를 깎았다고 하는 절입니다. 그래서 간단히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여산 송씨(礪山宋氏)인 판동녕부사(判敦寧府事)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 후는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하여 단종 1년(1453) 왕비로 간택되어, 이듬해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이듬해에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조가 즉위하니 정순왕후는 의덕왕 대비(懿德王大妃)에 봉해졌습니다. 2년 뒤인 세조 3년(1457)에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 동을 문제 삼아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나니 정순왕후 도 부인으로 강등되었고, 단종은 그 해에 사사되었습니다.
그러자 정순왕후는 궁궐에서 추방되어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東望峰) 기슭에서 초 막을 짓고 살며 동망봉에 올라 유배지를 향해 통곡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동망봉은 그래서 유래된 이름이라 합니다. 정순왕후는 시녀 셋이 해오는 동냥으로 끼니를 이었 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세조가 영빈전이라는 아담한 집을 짓고 식량을 내렸으나 정순왕후는 이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정순왕후가 살았던 초막을 정업원(淨業院)이라 하는데 여기는 궁중에 살던 여인들이 머리를 깎고 비구니로 사는 여승방입니다. 지금의 청룡사(靑龍寺)에는 정업원구기(淨 業院舊基)라는 비각이 있는데 영조가 눈물을 머금고 비문을 썼다는 비가 있습니다. 지금의 청룡사가 정업원이었던 것입니다. 정순왕후는 이곳에서 자줏물 들이는 염색업 으로 여생을 때묻히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 라고 부른다 합니다. 정순왕후는 평생 이곳에서 82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석남사에서 발행한 팜플렛을 보니 정순왕후가 출궁한 후 걸식을 하며 비참한 생활을 했으며, 관노의 신분으로 추락하자 정순왕후의 미모에 반한 신숙주가 세조께 자신의 첩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 은 불가에 귀의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석남사로 와서 처음 머리를 깎았다고 합니다.
세조는 조카며느리인 여산 송씨가 비구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석남사 스님들에게는 부역을 면제 한다."는 교지를 내려 조카며느리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전국에서 무려 300명에 이르는 승려들이 모이게 되 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사세가 더욱 커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순왕후는 석남사에서 머리를 깎고 정업원으로 들어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각현님이 이 멋진 장면을 놓치지 않습니다.
뒷짐을 쥐고 석원님이 오르시고 그 뒤에 역시 뒷짐을 쥐고 정파님이 오르시는데 지현 이가 옆을 따르고 있네요. 비니초님은 오르다 말고 내려오시고 덕명님이 한 발 오르니 그 뒤를 화광님과 도솔님이 따라 오르는 모습입니다. ^^
화려했던 꽃들은 지고 겨울을 준비하고 있네요.
석남사에 왔을 때 하늘에는 구름이 모여 들어 한바탕 비를 뿌릴 기세였는데 잘 참아 주네요. 그래서 배경이 좀 어둡습니다.
옆에서 본 감로수(甘露水)
시원한 감로수(甘露水) 한 바가지 드세요.
영산전 쪽을 바라보며
계단 오른쪽의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에 대해서는 제2탄에서 알아보겠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경기도유형문 화재로 지정된 대웅전과 국가보물로 지정된 영산전 뿐입니다. 그리고 대웅전을 오르 는 계단 양 옆에 경기도향토유적 제19호로 된 3층석탑 2기가 있습니다. 이 탑은 고려 시대 말 조선시대 초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3층석탑으로 재질은 청회색이 감도 는 화강암으로 높이는 2.3m 정도입니다.
그런데 석남사의 팜플렛에는 5층석탑이라고 했네요. 어떻게 보면 5층석탑 같기도 해 애매합니다. 전통사찰총서에는 3층석탑이라 했습니다.
경기도향토유적 제19호인 동쪽의 3층석탑
「이 탑은 영산전 앞에 있는데 1매의 판석으로 지대석(址臺石)을 만들었으며 1단의 괴 임을 두었다. 이 위에 얹은 중석(中石)에는 가는 선각으로 우주(隅柱)를 표현했으며 갑석(甲石)에도 아무 장식 없는 판석 1매로 되어 있다. 1층 옥신은 한쪽 면에 형식적 인 감실(龕室)을 두었는데 양옆과 위아래를 놔두고 가운데는 조금 파내어 도드라지게 했다.
옥개석(屋蓋石)에는 3단의 층굽이 있으며 나머지 옥신도 우주가 새겨진 1매의 돌로 이 루어졌다. 그러나 3층 옥개석은 갑석(甲石)과 비슷한 형태로 이 위에 얹혀진 것은 노 반(露盤)과 복발(覆鉢)인 것으로 보인다.」 -전통사찰총서 석남사편-
경기도향토유적 제19호인 서쪽 3층석탑
「서쪽에 있는 탑은 1매의 지대석으로 되었는데 3단의 층굽이 있고 그 위에 그대로 우 주가 있는 기단을 놓았다. 그러므로 이 석탑은 본래 현재의 모습보다 좀더 크고 다양 한 형태로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복발 위에 다시 옥개석이 얹혀져 있는 것도 보 통의 석탑에는 없는 양식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옥개석 형태나 옥신 등에 나 타나 있는 형식은 고려시대 말기 혹은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전통사찰총서 석남사편-
대웅전(大雄殿) 앞에서
그런데 이 사진을 처음에 놓은 뜻은 대웅전 사진을 깜빡 잊고 못 찍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찍는다 하고 미뤘던 것이 화근입니다. ^^
대웅전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08호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본래 영산전 앞에 있었으나 1978년에 현재의 위치로 석축을 쌓아 옮겼다고 합니다. 조선 영조 1년(1725)에 해원선사가 대웅전과 영산전의 기와를 갈았다는 기록이 있어 18세기경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법당 안에는 본래 신라시대 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도둑을 맞아 지금은 최근 에 조성한 삼존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벽에는 후불탱화ㆍ지장탱화ㆍ신중탱화ㆍ산신탱 화ㆍ칠성탱화 등의 불화가 모셔져 있습니다.
대웅전(大雄殿) 편액
우보처 보현보살(普賢菩薩) 본존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좌보처 문수보살(文殊菩薩)
지장탱화(地藏幀畵)
신중탱화(神衆幀畵)
이 신중탱화에서 가운데에 이글이글 화염을 뿜는 신중은 예적금강(穢跡金剛)입니다. 이 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현(化現)이라 하는데 부정금강(不淨金剛), 화두금강(火頭 金剛)이라고도 합니다. 더러운 것을 없애므로 예적부정(穢跡不淨)이라 하고, 온 몸에서 지혜의 불길을 내뿜기에 화두(火頭)라고 합니다. 아주 무서운 상을 하고 있는데, 삼면 (三面), 삼목(三目), 팔비(八臂)로서 독사를 몸에 감거나 잡고서 법륜을 굴리면서 온 몸에 불길이 치솟는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윗쪽 좌우에 두광(頭光)을 두룬 분은 각기 범천왕(梵天王)과 제석천(帝釋天)입니다. 하단의 왼쪽에 두광을 두룬 분은 위타천(韋駄天)이라 하는 동진보살(童眞菩薩)입니다. 대개의 신중탱화에서는 이 분을 중앙에 모시기도 합니다. ※ 여기서 방향은 신중도 기준입니다.
칠성탱화(七星幀畵)
법륜(法輪)을 들고 계신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 菩薩) 좌우에서 협시하고, 그 좌우엔 칠여래가(七如來)가 합장한 모습으로 시립해 있고, 하단에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이 일렬로 시립한 모습입니다. 칠원성군이 여래로 화현하 신 분이 칠여래입니다.
산신탱화(山神幀畵)
영단에 모셔진 석남사 회주 원공당(圓空堂) 정무대종사(正無大宗師)
「원공당 정무대종사는 1931년 전북 군산에서 출생해 1958년 전북대 수의학과를 졸업했 다. 졸업하던 해 전강스님을 친견하고 군산 은적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다. 1965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정무스님은 한결같이 일상에서의 수행을 강조했다. 수행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 참선, 주력, 경전공부 등 어떤 수행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흔들림 없이 꾸준히 실천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수행이다. 그래서 습관이 중요한 것이다. 병이 생겼을 때 의사가 치료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활을 바로 잡아야 근본적인 치유가 된다." 고 강조했다.
효 사상으로 청소년의 심성을 치유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던 스님은 1971년부터 1983년 까지 제2교구본사 용주사 주지로 재임하면서 선원을 개원하고, 신도수련회와 대학생불 교학생회 수련회를 시작했다. 포교자료집을 자체적으로 발간해 배포하는 등 신도교육 에도 열의가 높았다. 지난해까지도 여분의 보시금이 생기면 대학생불교학생회에 쾌척 하며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하지만 스님의 생활은 늘 검소했다. 겨울에도 웬만한 추위에는 방에 불을 넣지 않고 지 낼 정도였다. 또 법문이나 결혼식 주례 등 스님을 초청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있으면, 자리를 따지지 않고 흔쾌히 수락했다. 버스와 지하철로 법문을 다니면서 삼보정재를 아꼈지만, 포교를 위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아낌없이 쾌척했다. 대구 정법거사림회, 한국관음회, 세불회(稅佛會), 경찰대학불교학생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법사를 역임하였다.
사찰 불사를 할 때도 스님은 직접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며, 나무 한 조각이라도 헛되게 버리지 않도록 감시하고, 불사를 지도했다.
정무스님은 또한 항상 수행자의 본분을 강조하고 실천했다. 1963년 김제 흥복사에서 5하안거를 지낸데 이어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등 전국의 선원을 찾아 참선수행을 했다. 스님은 특별한 일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3시 기상, 4시 예불, 5시 참선, 6시 공양, 7시 청소, 9시~11시 면담 및 공부, 11시 헌공… 오후8~9시 공부, 10시 취침’의 일과표 를 방에 붙혀놓고 철저하게 정진을 했다. 평생 방 청소와 빨래를 남에게 미룬 적도 없이 검소한 승복을 입으며 생활을 했다.
문서포교에도 관심이 많았던 스님은 <용주사 본말사지>를 발행한데 이어 <정명의 길> <은혜를 갚은 사람> <평생공부> <마음공부> 등 다수의 저서 및 역서를 펴냈다.
또 용주사에 한글부모은중경탑을 세워 사찰을 찾는 사람들에게 효사상의 중요성을 전하 고자 했다.
스님이 재가불자들에게 전하는 인생의 지침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첫째 깨끗한 자연환경에서 살며, 둘째 본성을 해지는 직업은 버려라. 셋째 시간과 돈은 일의 가치 순위로 쓰며, 넷째 항상 공부하고 실천하라. 그리고 다섯째로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는 사람이 되라."
원로의원 정무스님은 입적을 예견한 듯, 지난 8월 오랫동안 법문 인연을 맺은 대구 법왕 사를 찾아 ‘회향법문’을 하셨다. 그리고 스님은 “집에서도 부처님을 모시고 항상 기도 하고 공부하라”고 강조했다.
"내가 이 세상에 인연 따라 왔다가 바르고 정직하게 열심히 살다 간다. 도솔천 내원궁에서 우리 거기서 만나자." 라는는 열반송을 남기고, 스님은 이제 빛으로 가셨다.
다음은 원공당 정무대종사의 행장
· 1931년 4월 19일(음) 전북 군산시 임피면 축산리에서 출생. · 1958년 1월 15일 군산 은적사에서 전강선사를 계사(은사)로 사미계 수지. · 1965년 3월 15일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선사를 계사로 보살계 구족계 수지. · 1963년 4월 15일(음) 김제 흥복사에서 전강선사를 조실로 3하안거 성만. · 1966년 4월 15일(음) 대구 동화사에서 효봉선사를 조실로 3하안거 성만. · 1987년 10월15일(음) 속리산 복천암에서 3하안거 성만. · 1968년 10월 15일 영주 포교당 주지. · 1970년 8월 10일 제2교구 3대 중앙종회의원. · 1971년 10월 22일 제2교구본사 용주사 주지. · 1974년 9월 제2교구 4대 중앙종회의원. · 1978년 9월 제2교구 5대 중앙종회의원. · 1980년 4월 제2교구 6대 중앙종회의원. · 1981년 3월 7일 조계종 중앙종회 선거관리위원. · 1993년 4월 1일 대구 법왕사 회주. · 1983년 6월 3일 제2교구 여주 신륵사 주지. · 1999년 7월 1일 조계종 총본산 성역화 추진위원. · 2000년 11월 제2교구 안성 석남사 주지. · 2007년 3월 제2교구 안성 석남사 주지. · 2007년 4월 조계종 원로의원 추대. · 2008년 10월 대종사 법계 품수. · 2011년 9월 29일 오전 8시 40분 석남사서 입적.」 -출처 : 불교신문- 석남사하면 청빈의 사표로 추앙받는 정무대종사를 빼놓을 수 없어 길지만 옮겨 보았 습니다. _()_ 불단에 올려진 도솔님 공양미
정성 가득한 공양미를 헌공한 인연으로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두루하시길 합장합니다.
대웅전 앞에서 기념사진
왼쪽 윗줄로부터 석원님, 덕명님, 정파님, 김명국님, 각현님 아랫줄은 묘법님, 화광님, 비니초님, 도성님, 도솔님, 그리고 김지현 어린이.
묘법님과 자리를 교체하고...
석원님과 덕명님
우리는 정다운 자매 도솔님과 비니초님
거사들만 모이시오.
대웅전에서 내려다본 풍광
다음은 영산전을 비롯한 이모저모인데 석남사 2탄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
첫댓글 백우님의 순례기를 통하여 다시한번 그 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려 봅니다.
명품 순례기에 감사드립니다()()()
순례기를 보시면 그날이 새록새록 나게 되지요.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감사합니다.
_()_
향불교 법우님들이 함께한 석남사 순례기 1부 잘 봤습니다.
_()_
염화님께서 오셨으면 아마도 대웅전을 자세히 담으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_()_
그러면 사진을 모셨왔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반가운얼굴들이많아요 이번순레기는배경음악부더 멋집니다 ()
낯선 분도 많이 계시죠
배경음악에 마음이 많이 가시는가 봅니다. 

감사합니다. 
_()_
단종의 왕비였던 한 많은 정순왕후가 석남사로 와서 처음 머리를 깎았다고 하는 절이군요.
순례기를 보면 언제나 상세한 설명에 가 본 것처럼 느껴진답니다. 감사합니다. ()()()
10대에 청상이 되어 80대까지 사셨으니 그 고단한 삶을 무엇으로
랬으리오.
_()_
부처님이 아니시면 어디에서 위로 받았을까 싶습니다.
석남사는 안성도 유명하지만 울산 울주의 석남사가 유명합니다.
자세히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석남사 해우소는 연못위에 지은 다리가 덜덜 떨리는 옛날 모습을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냄새도 없구요
지현이가 손잡고 눈감고 저를 따라오면 귀한 보물이 있다기에 갔더니 해우소더라구요.ㅋㅋ
지현이가 저도 끌고 가서 가 봤어요.


다른 분들은 기겁했을 터인데 지현이는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 감탄했으니 이곳은 대단한 보물로 여겨졌던 모양이네요. 
_()_
시골의 통시를 보고도 "아, 좋다
석남사 하면 대종사 정무스님 생각~~ 지난번 순례 때는 뵙고 법문도 들려 주셨는데, 옛 생각 하면서 순례하였습니다....나무묘법연화경()()()
올곧은 스님들이 한 분 한 분 가시는 게 안타깝네요. 직접적으로 뵌 적은 없지만 성원은 들은 바 있습니다.
_()_ 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