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 가장 친숙한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3장, 마가복음 4장, 누가복음 8장에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 비유 중에 가장 순도가 높은 것은 마가복음 4장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마가복음 4장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크게 두 가지 구조입니다. 4~8절은 예수님의 비유이고, 14~20절은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해석입니다. 4~8절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다른 것은 돌밭에 떨어지매
해가 돋은 후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다른 것은 가시떨기에 떨어지며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았다
다른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지며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하나는 삼십 배
하나는 육십 배
하나는 백 배가 되었느니라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선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다양함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자기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촉구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마가복음 4:1절의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게네사렛 갈릴리 바다에서 이제 가르치는데, 아주 많은 사람이 몰려드니까 자꾸 예수님이 위험에 빠집니다. 이 군중들이 자꾸 예수에게 달려들면 예수가 바닷속으로 빠져버릴 위험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배를 띄어서 군중들과 떨어져서, 배에 예수님이 앉고, 뭍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이 비유를 말씀합니다.
씨는 말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 무엇을 합니까? 땅에다가, 밭에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말씀의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1절의 “육지에 있더라”를 직역하면 “땅 위에 있더라”입니다. 8절을 보면 “땅에 떨어지매” 역시 직역하면 “땅 위에 떨어지매”입니다. 마가복음 4:26, 31절 역시 “땅에”가 아니라 “땅 위에”입니다. 땅은 세상, 즉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많은 군중이 형식적으로는 전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3~4절을 보면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 번역에는 “더러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문대로 직역하면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입니다.
이것은 지금 여러 개의 씨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복수가 아니고 단수), 하나는 길 위에 떨어지고, 하나는 바위에 떨어지고, 하나는 가시덤불에 떨어지고, 즉 몇 개가 올바르지 않은 곳에 떨어졌습니까? 3개가 그랬습니다. 나머지 3개는 좋은 곳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 나머지 좋은 밭에 떨어진 3개가 하나는 30배 하나는 60배 하나는 100배를 결실한 겁니다. 지금 하나하나를 말한 것입니다.
네 개의 다른 땅에 이렇게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씨를 가지고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씨로 비유합니다. 야고보서 1:21절, 베드로전서 1:23절, 골로새서 1:5~6절을 보면 복음이라는 것을 씨로 비유를 해서 이 복음이 각 사람의 심장에 떨어져서, 그 심장에서 이 말씀이 점점 싹터서 자라서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변화시킴으로 수확을 가진다고 말씀합니다. 열매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 구원의 힘입니다. 이 복음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에 올바로 떨어져서 싹이 트면 여기 이 비유대로 하면 좋은 땅에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로 결실을 하는데 이 결실이 뭐냐면 하나님 나라 구원의 구체적인 표현들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실제적인 건강으로도 표현이 되고, 정치적 자유로도 표현이 되고, 관계의 온전함, 올바른 관계 사항으로도 표현이 되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온전케 함으로 표현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죄악과 죽음의 세력, 고난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실현이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마음속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서 점점 싹이 터서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속에서부터 우리의 동기와 감정,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과 불신앙의 태도가 결정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 심장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우리 마음속에서 결정지어집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주권이 작용을 해서, 우리가 자기를 신뢰하고 맘몬 즉 우상을 숭배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받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을 순종케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씨의 비유를 말씀할 때 예레미야서 31:33절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첫 언약의 실패로 말미암아, 즉 첫 언약에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곧 다윗 왕조가 완전히 파괴될 것이며 유대민족 전체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서 노예 생활을 할 것을 지금 목전에 두고 무엇을 예언합니까? 새 언약을 예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세웁니다. 그런데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쓴다고 합니까? 사람들의 심장 속에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내면에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내면에서부터 드러나게 한다고 그렇게 예언합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예수님은 진정한 구원은 어디서 오느냐고 생각한 것 같습니까? 우리 심장의 변화에서 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주로 무엇을 합니까?? 말씀으로 합니다. 칼로 군대를 동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합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말하면 말씀을 우리 심장 속에 심는 것입니다. 왜 심장 속에 심습니까? 심장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불신앙이 결판 지어지는 곳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결판이 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그 심장에 하나님이 주가 되심을, 하나님이 왕이 되심을 인식시켜 줍니다. 그림으로 말하면 거기다가 새깁니다.
예레미야 31장의 말씀으로 하면 곧 심장에 하나님이 왕이심을 새깁니다. 그래서 오로지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순종하도록 그렇게 새깁니다. 그것만이 결국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랬을 때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 총체적인 의미로 우리 삶을 온전케 하는 그 구원이 실현됩니다. 자유가 더 발생하고 정의가 더 성립되고 평화가 더 확대되고 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씨의 비유들이 복음의 말씀을 씨로 비유하는 것과 이 씨가 우리 심장에 떨어진다고 하는 말씀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 14~20절을 보면 씨가 떨어지는 밭의 네 종류, 즉 예수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반응하는 네 가지 다양한 반응들이 소개됩니다.
하나는 길 위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사단이 그 씨를 낚아채 버립니다. 그 복음의 씨가 그 사람의 심장에 침투하기 전에 낚아채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전혀 영향을 못 미칩니다.
마가복음 8:27~33절을 보면 예수님이 길가에서 처음으로 수난 예고를 하였을 때 베드로가 사탄의 유혹으로 그 말씀을 거부합니다. 길 위에 떨어진 첫 번째 씨가 이 이야기와 아주 유사합니다.
마가복음 4장을 보면 항해 이야기 뒤에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마가복음 4:35~41, 5:1~20). 마가복음 6장을 보면 오병이어의 이야기 뒤에 항해 이야기나 나옵니다(마가복음 6:30~44, 6:45~52)). 마가복음 8장을 보면 4,000명을 먹인 사건 이후에 항해 이야기가 나옵니다(마가복음 8:1~9, 10). 항해 이야기를 통해 제자들은 바다의 리워야단에 직면합니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갔을 때 그곳에서 사탄에 들린 사람을 만납니다. 과연 제자들이 사탄과 직면하였을 때 말씀을 간직하겠습니까? 빼앗기겠습니까?
5절을 보면“하나는 더러는 흙이 엷은 돌밭에 떨어지매”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바위 위에 얇은 층이 있는데 거기에 떨어져서 싹이 곧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어져서 말랐고 깊이 뿌리박지 못한 말씀, 그래서 우리 심장의 내면에 우리의 감정과 의지와 사고의 원천까지 파고들지 못함을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 박해에 넘어집니다. 마가복음 14:49~50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을 부인함으로 넘어집니다. 윗 뜰에서는 예수님이 심문을 받습니다. 자신의 메시아 됨을 담대하게 인정합니다. 아래 뜰에서는 베드로가 한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의 메시아 됨을 불인정, 부인합니다. 결국 둘째 땅 이야기는 베드로의 운명을 복선처럼 깔고 있습니다. 베드로(헬라어: 페트로)와 돌밭(헬라어: 페트로데스, 흙이 얇은 돌밭, 흙이 거의 없는 암석)이 같은 의미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매 결실치 못하고”라는 말씀은 다른 많은 세상의 관심들 또는 세상의 매력들, 많은 세상의 사상들 이런 것들이, 이 씨가 깊이 우리 인격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것은 많은데,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기타 욕심이 말씀을 막습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한 청년은 그가 부자였기에 슬픈 기색을 남기고 떠나 예수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왜 슬픈 기색이었습니까?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재물의 유혹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이 세 가지를 통하여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이 무엇인지 현실적으로, 너무나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떤 이들은 말씀을 듣고 / 받아 / 결실합니다. 혈루증 여인의 믿음(마가복음 5:25~34),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마가복음 7:24~30), 바디매오의 믿음(마가복음 10:46~52) 사건을 복선으로 보여줍니다.
열두 해 혈루증 여인은 마가복음 5:27절을 보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라고 말씀합니다. 혈루증 여인은 많은 사람의 포위망을 뚫고 예수님에게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그런 여인의 행동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병을 낫게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마가복음 7:25), 논쟁 끝에 예수님을 이깁니다. 예수님은 그런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멀리 있는 딸을 고쳐 주십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온다는 말을 듣고(마가복음 10:47), 예수님을 목 놓아 부르고, 예수님은 그것에 반응해서 고쳐 주십니다. 세 사람 모두 예수님의 복음 이야기에 기록이 됩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장애를 극복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게 될 때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 예수님 복음 이야기의 주인공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심장에 하나님 나라의 씨를 받아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항상 가치판단하고 윤리적인 선택을 하게 될 때마다 아주 의식적으로, 심장의 내면에서부터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렇게 순종을 하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총체적인 구원의 열매를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