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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의 吳는 백제> 吳를 고구려로 보는 이유는 왜의 항해술로는 풍파가 높은 동지나해를 지날 수 없다는 것이지만 왜는 백제의 종속국이므로 왜의 선단이 백제까지 온다면 중국으로의 왕래는 자유로왔을 것이다. 吳 = 중국 춘추전국시대 吳땅 = 백제 문정창《한국사의 연장 일본고대사》 |
5.고마 = 백제
․《양서》: 백제의 도읍은 고마(固麻)
서울사람 = 한국인
고마사람 = 백제인
6.豐 = 가라?
豐國: 가네자와 《일본동조론》에 따르면 豐國은 가라구니(韓國)이다.
<이도지마 반도 가야소국> ․4세기 - 전방후원분, 수혈식 석실 ⇒출토된 유물(거울류, 구슬류, 칼, 창, 갑옷)들은 가야 유물에 기원을 둔 것 - 가야산 부근 미도꼬, 마쯔바라 유적들에서 가야식 질그릇 출토 ․5세기 - 횡혈식 고분 출현(가장 이른시기로 추정) →가야계: 로오지무덤(수혈식 횡구식) - 무덤형식과 무기, 무장, 농구, 공구 등 일련의 생산 및 사회생활과 군사분야에서 전 일본 적으로 제일 먼저 급속한 변화를 일으킨 곳(외적침투에 의한…) 조희승《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
<북큐슈 무나가다 가야소국> ․지명: 오아라(큰아라), 아라기(아라 성), 가라이에(가라의 집), 아라지, 고아라(작은아라) ․서해도 <풍토기>: 무나가다의 신이 아마(天海)에서 내려 사끼도야마에 내려왔다. ․4세기까지 이지방에는 큰 무덤이 없었으나 5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거대무덤 등장 ․5세기 초 대표적 무덤: 무나가다군 오시마촌 오끼노시마 섬 유적에서 나온 마구류와 패갑은 조선에서 나온것과 일치 - 무나가다군 쯔야시끼에는 5세기 후반기 이후의 전방후원분으로 약 20여기 , 그 중 누야마(好山)5호무덤에는 가야식 대형 질그릇 출토 가쯔우라(勝浦)제 10호 무덤: 길이 약 70m의 전방후원분, 수혈계 횡구식 ․5세기 후반기에는 세력이 점차 내륙쪽으로 내려가 쯔리천 상류일대에 자리를 잡음 : 우라노다니(浦谷)제 5호무덤에서 나온 쇠활촉, 쇠창, 말안장, 등자, 쇠고리 등은 고령 지산동 44호무덤의 것과 유사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전부가 국보로 지정된 고분※ :소왕국급 유적. 일본인들은 일본귀족이 그 유물을 수입해온 것이라고 주장 <미야지다께(宮地●)무덤(6~7세기) 횡혈식돌칸무덤, 금동제 등자 등의 무구류 금동제 용무늬 뚦음새 금관모 등 출토 ⇒조선제 (후나야마 무덤에 묻힌자 못지않게 조선제 유물로 휘감았음) 무나가다군 최북단 유가와산(湯川山)에서 조선식산성 발견> 오끼노시마 제 7호 제사유적에서 나온 금, 은, 동으로 된 마구류와 가락지, 창집은 신라계 : 백제, 고구려, 임나 등 여러나라의 무덤에서 출토된유물들과 대조한다면 신라에 보다 가까운 물건이 많다. - 《고대 아시아와 큐슈》 4세기까지는 신라계주민들이 살다가 5세기 가야가 진출한 것은 아닐까… 조희승《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P174~182 |
<휴가(日向)지방의 가야계통 소국(사로벌 소국)> ․日向: 해를 향하는, 해가 향하는 ․경경저존이 “이 당은 가라구니를 향하고 가사사의 앞을 곧바로 지나가고 아침해가 비치는 나라, 저녁해가 비치는 나라이다. 때문에 이 땅은 참으로 길한 땅이다. ․큐슈 쯔시마(가미아가다 고을)에 무까히(日向)라는 고지명 존재. 向日도 日向과 같이 조선을 향해있다고 해서 지었다한다. 이도지마를 바라보는 곳에도 日向고개가 있다. ※휴가의 무덤떼는 남북으로 크게 사이토바루(西都原)무덤떼와 도오진무덤떼로 나뉘어져 있다. 여기서 사이토바루무덤떼가 가야적 성격을 띤다. 사이토바루무덤떼에는 32기의 전방후원분이 있는데 태반이 전방부가 낮고 평편한 이른바 자루거울식의 형식으로 기내식이 아닌 송학동 제1호무덤(전방후원분)과 형태와 수치(50~60m)가 유사하다. - 자루식 전방후원분과 짝을 이루고 발전한 것이 점토곽인데 점토곽의 연원은 가야에서 찾을 수 있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특히 마구류나 무기, 무장)들을 부산 동래복천유적과 고령 자산동 유적과 유사하다. - 아직까지 일향지방에서 조선식산성이 발견된 예는 없다. 하지만《일본서기》(권1, 문무3년 12월 갑신)태재부로 하여금 미누, 이나즈미의 두성을 수리하겠금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미누는 三野라고 쓰며 휴가국 고유군 미누향으로 비정하고 있어 성이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 조희승《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P211~218 |
․후꾸오까시 시와라구 니시진정(早良區西新町) :57개의 움집터 발견, 그 중 2개터에서 가마터 발견 ․가마터가 달린 집이란 취사와 난방을 겸한 온돌 ⇒경남 김해 부원동 유적에서 발견된 가마터를 니시진유적 가마터의 원형으로 인정 <야요이 문화 후기에 가마터가 달린 집이란 개념이 한반도의 동남부 해안지방으로부터 북큐슈나 깅끼지방에 전래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 《가야지역과 북큐슈》요시까와 홍문관, 1983년 조희승《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
<이도지마 반도 가야소국에 침투한 백제> ․백제또한 가야와 같은 시기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횡혈식석실 채용 ․하지만 토기양식으로보다 5세기는 가야의 영향이 더 컸을 것임 ․《정창원문서》의『지구젠 대보2년 시마군 가와베리 호적』에 의하면 시마군 가와베리마음 258명중 ‘고마기미(肥君)’가 70명 ‘모노노베(物部)’가 60여명 ‘가노도(葛野)’가 40여명이라고 한다. 조희승《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
<큐슈 중서부의 고마 - 백제소국> ※대표적인 곳: 기꾸찌강 일대 - 대표 고분: 미마나군 에다 후나야마 고분 ․철검출토: 75자 명문 ․日학자들: 반정천황이 준 것이다. <무덤 주인공이 휘감은 치레거리는 9부9리 조선반도의 공예기술 그대로이다…금공품의 모두가 조선제라고 보아도 일없는 특이한 성격을 가지는 무덤 - <철검을 가진 나라>1980> ※5말6초 기내야마도정권의 그 어느 왕자도 그와 같은 우수한 금동제 왕관과 금신발 그리고 금귀걸이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후나야마 고분 출토유물(6세기 초)의 조선적 성격 ․관모: 나주 반남면 신촌리 제 9호무덤, 경주 천마총것과 동일 ․금귀걸이: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심엽형 금귀걸이와 동일 ․금동신발: 전남 익산 웅포면 입점리 무덤 것과 동일 - 산성: 기꾸찌강 유역 무덤 뒤편, 기꾸찌산성 존재, 무수히 많은 백제 기와 출토 조희승《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
<동부큐슈의 신라소국>:7세기이전 부젠국의 정치적 중심지는 오늘의 후꾸오까현 다와가(田川)일대와 나까쯔평야의 우사일대 - 문헌적 근거 1)《고사원류》본조고승전 72원잡 백제국사 문풍국전 :불교중인 풍국은 백제인인데, 그 이름이 사서에 전하지 않으니 나라이름으로써 부른다. 2)《고사원류》일본령이기고증(상) 풍국에 대한 주석 :대개 가라구니(韓國)을 말함이다. 3)부젠《풍토기》 :부젠국의 풍토기를 말하기를 다가와의 고을 가하루의 마음에 강이 있다. … 옛날 신라국의 신이 스스로 건너와서 그 강에서 살았다. 4)《탁선집(托宣集: 야하다 신사(신라신을 받드는 신궁)에 전하는 민간전승들의 기록집) ․신라의 태자신이 건너와서 일본국의 여러신을 물별속에 집어넣으려고 하였는데… 제1권 ․흠명32권 신묘에 부젠국 우산군 릉형 대미산에서…오마와가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하늘의 아이(天童)가 나타나서 “가라구니의 성세(辛國城)에 비로소 하늘로부터 여덟흐름의 기발이 내렸으니 나는 일본의 신이 되련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의 가라구니성은 서어봉 (신라의 왕도라는 ‘서호’)인데 기리시마산의 별호이다. 제3권 ․쯔구시 부젠국 우시군 릉형지 주변 소창산 기슭에 … “가라구니성에 비로소 하늘의 여덟 흐름의 기발을 내려보내여 내가 일본의 신이 되련다”라고 하였다. 제5권 조희승《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
7.일본 고서<이로하(伊呂波)>자류초(字類抄) 9권 중애 천황 어우(御宇)2년
: 신라국이 본조를 탈취하려고 하였다. 이 때 천황은 해중 용왕에게 말하기를 “용왕이 힘 을 합쳐 주어서 이웃나라(신라)를 이기게 되면…”